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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63)화 (63/91)

63화.

내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비비, 로저 공작가로부터 온 이 서신. 대공의 것은 없었니?”

“주인어른께요? 네, 없었어요. 마님께 온 편지가 전부였어요.”

“그래…?”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보통 부인들만 참석하는 살롱이나 티 파티가 아닌 이상, 기혼자를 개인적으로 초대할 땐 그 내외를 함께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로저 공작이 보낸 서신의 어디를 보아도 이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즉, 로저 공작은 오로지 나만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물론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니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지만….’

로저 공작처럼 황제의 최측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구태여 이렇게 서신을 보낸 것이 의아하긴 했다.

편지를 내려놓고 눈을 굴렸다.

‘오찬이라….’

수 초의 고민이 이어진 끝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오찬 정도면 나쁘지 않겠지.’

미혼인 공작과 기혼인 대공비가 단둘이 저녁 만찬을 즐긴다면 제법 이야깃거리가 되겠지만, 오찬 정도는 친구 사이에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식사였다.

드물긴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선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고.

결론을 내린 내가 비비에게 말했다.

“고급 편지지를 준비해 주렴.”

***

“다음 주에 로저 공작가에 방문할 것 같아요.”

다음 날 조찬 시간, 문득 뱉은 내 말에 이안의 칼질이 멈췄다.

“…헤이든 로저 공작 말입니까?”

“네, 함께 오찬을 들자고 하셔서요.”

“로저 공작이요.”

중얼거린 이안이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머금은 뒤 내려놓았다.

“헤이든 로저 공작과는 접점이 없으신 것으로 아는데요.”

“아, 어쩌다 보니 연이 생겨서요. 얼마 전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제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시던데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하며 내려놓았던 포크를 들었다.

이어서 방울토마토 한 조각을 콕 집어 꾸역꾸역 썰던 내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 저 표정.’

거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임에도 이마 위에 대문짝만하게 ‘언짢음’이라고 적힌 것 같았다.

‘혹시 별로 사이가 안 좋은가…?’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거둔 이안이 나이프를 다시금 움직이며 말했다.

“로저 공작과는 어릴 때부터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황제파 중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가문이기도 하고요.”

“아.”

그제야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국엔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있고,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온건파와 강건파가 바로 그것이었다.

온건파는 단순히 황제와 그 동복 자매인 황녀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 주려는 분위기인 반면, 강건파는 언제 위협이 될지 모르는 이안을 정계에 간섭할 수조차 없도록 수도 밖으로 보내 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전대 로저 공작은 아들을 황제의 소꿉친구로 삼았을 정도니까….’

황자였던 이안과도 과거에 적지 않은 접점이 있었을 것이다.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건 정확히 어떤….”

“폐하께서 저를 아끼셨던 것과 별개로, 제 모친이 당시 황태자였던 폐하의 안위를 몇 번이나 위협했으니까요.”

당연하게도 엘리시아는 황비에 의해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 어릴 때부터 어울린 로저 공작이라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네.

토마토를 반으로 가르던 칼질이 느려졌다.

‘잠깐, 그럼 그래서 초대장에 내 이름밖에 없었던 거야?’

그제야 공작씩이나 되는 헤이든 로저가 왜 그런 식으로 서신을 보내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그럼 대공비인 나와도 거리를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맞았다.

나는 왜 초대를 한 거야?

황제파가 굳이 나를 초대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거 아닌가?

“…….”

반쯤 잘린 토마토를 보다가 포크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저어… 대공.”

“말씀하십시오.”

“혹시 마음에 걸리신다면 이제라도 초대를 거절하는 게….”

드물게 이안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덩달아 칼질이 느려진 이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대공과 별로 사이도 안 좋다고 하시고. 저만 혼자 초대받은 것도 마음에 걸리고. 제가 그래도 아직까지는 대공비니까.”

“…….”

“역시 안 된다고 할까요?”

흘끗 눈치를 살피자 어쩐지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직까지라….”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다이닝 홀에 흐르는 잔잔한 음악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왜, 또. 뭐가 문젠데.’

이윽고 그가 식기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부인을 초대했다면 그쪽에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겠죠. 다녀오셔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죠?”

“…네.”

어쩐지 심기가 불편한 대답이었다.

***

로저 공작을 만나러 가는 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마님! 지고 오시면 안 돼요!”

비비는 어쩐지 저번부터 내가 다른 사람들과 결투를 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냥 식사 자리란다.”

“하지만 로저 공작님은 주인어른과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시다면서요. 가서 대공비의 위엄을 보여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머리며 옷에 잔뜩 힘을 주어 꾸미는데 할 말이 없어졌다.

위엄을 보여야 한다며 비비가 고른 드레스는 안쪽에 겹겹이 레이스를 덧대 발목에서 풍성하게 흔들리는 보라색 외출용 원피스였다.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고풍스러워 어딜 봐도 ‘나 귀부인이요’ 하는 것 같은 느낌의.

비비의 채근에 못 이겨 칵테일 햇까지 쓰고 일 층으로 향했을 땐 이미 로비 앞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근데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마차만이 아니었다.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어?’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이안이었다.

어디 가나? 외출복 차림 같지는 않은데.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으며 계단을 사뿐히 내려갔다.

인기척을 느낀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만 훑어본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오늘 일 있으세요?”

계단을 반쯤 내려와 던진 물음에 그가 시선을 끌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요.”

천천히 고개를 저은 이안이 잠깐 입을 물었다.

수 초의 간극 후 그가 말했다.

“배웅입니다.”

“…….”

“…….”

“…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던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발을 삐끗할 뻔했다.

메인 홀에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나대로 사고회로가 꼬여 입을 벌렸고, 이안은 이안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가만, 오늘 아침 메뉴로 뭐가 나왔더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잘못 먹은 것도 없는데 이러는 거야?

내가 한껏 진지해진 사이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마차까지 배웅하겠습니다.”

장갑을 끼지 않은 희고 고운 손을 보다가 어정쩡히 포개어 잡았다.

그에게 에스코트에 대해 몇 번이나 가르치긴 했지만, 이렇게 자진해서 배웅 같은 걸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자기랑 사이 안 좋은 귀족 만나러 간다고 신경 쓰는 건가?’

어렴풋한 추측이 떠올라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이안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신경 쓰이세요?”

“…부인께서 하시는 사교 활동에 제가 구태여 신경을 쏟을 이유는 없습니다. 상대가 로저 공작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부가 설명이 뭐 그렇게 길어.

“다만.”

그가 달싹이던 입을 열었다.

“유의는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니까요.”

그저 순한 강아지 같다는 내 감상과 달리 이안은 로저 공작을 꽤나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이미지랑은 조금 다른가…?’

나와 달리 이안은 어릴 때부터 그와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으니, 느끼는 바가 다른 건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용케 보내 주는군.’

눈을 가늘게 뜨던 내가 선선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냥 한 끼 식사인데요.”

어쩐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한 이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오늘은 업무가 없으니, 만찬은 함께 들죠.”

어쩐지 반드시 저녁 전까지 돌아오라는 경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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