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더 자세히 분위기를 살피지 않아도, 올슨 백작 부인의 안타까운 사정에 여론이 술렁이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인 이상 그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지.’
백작의 얼굴조차 모르는 나까지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으니까.
나는 애써 그 말소리에 신경 쓰지 않는 척 대공을 잡아 이끌었다.
“…다들 대자보를 읽었나 봐요. 우리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봐요.”
잔뜩 신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이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시죠.”
평소 같다면 고분고분해서 좋다고 생각했을 텐데, 백작 부부의 이야기를 재차 떠올리고 나니 참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원작 소설의 스토리보다 스쳐 지나가는 조연의 사랑 이야기가 더 소설 같을 수 있는 거냐고.’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휴.”
“…부인?”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좀 많네요.”
‘너는 필릭스 올슨 백작의 반만 따라와 보면 어디 덧나는 걸까?’
결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착잡함은 뒤로하고, 구름떼처럼 몰린 인파를 헤치고 대자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와 대공을 발견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길을 내어 준 탓에 대자보 앞까지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 보자….’
집사가 고용한 길드원이 베테랑 심부름꾼이라더니, 대자보는 눈에 띄는 곳에 아주 예쁜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그 비자나무 아래에 백작 부부의 2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는 수억 톤의 광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남몰래 흐뭇하게 미소를 띠며 대자보의 내용을 읽었다.
‘누가 썼는지, 참 잘 썼단 말이야….’
필력이 아주 대단해. 엄청나.
단언컨대 이 대자보를 읽고 동요하지 않는 인간은 깡통 로봇 이안밖에 없을 터였다.
속으로 감탄하던 중, 이안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감동은커녕 감흥이라고는 없는 음성이었다.
“설마 이 벽보 때문에 다들 난리가 난 겁니까?”
덕분에 방금 전까지 감동에 차 있던 내 마음이 풍선에 바람 빠지듯 푸시시 쪼그라들었다.
“설마 이 눈물 나는 사랑 이야기를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어요?”
“뭘 느껴야 하는 겁니까? 죽은 필릭스 올슨 백작에 대한 애도라면 일전에 했습니다.”
“하… 깡통.”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그래, 이 인간이 이런 절절함을 이해했다면 다이아나의 가슴에 그렇게 대못을 박지 않았겠지.
나는 대자보를 척, 가리키며 말했다.
“낭만적이잖아요! 세상을 떠난 반려와의 소중한 추억을 지키고자 하는 여인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절절해요!”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대자보를 위아래로 훑었다.
“낭만이라….”
역시나 이해는 한 톨도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조신하고 다정한 걸 좋아하신다더니, 이번엔 낭만이군요.”
‘이거 진짜 어쩌면 좋지?’
내 불타는 시선을 느낀 이안이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눈을 마주했다.
자청색 눈동자가 이른 오전의 햇살 아래에서 어울리지 않게 말간 빛을 띠며 반짝였다.
‘이 와중에 순진무구한 눈빛 하지 마!’
질문의 내용이랑 눈빛이 너무 딴판인 거 아니야?
그를 개탄스럽게 째려보던 그대로, 입만 열어 대답했다.
“대공은 모르시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쉽게 감동을 받고는 한답니다.”
“…….”
“그러니까 그런 이해 안 된다는 표정만 짓지 마시고, 좀 낭만을 찾아보는 건 어떠세요? 그러면 우리 결혼생활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
“그리고 원래 정인이라는 건, 오로지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것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는 없다고요.”
‘좀 배워서 돌아올 다이아나한테 좀 잘해라. 조신하게.’
이안을 향해 샐쭉 곁눈질한 나는 다시 대자보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선을 거둔 뒤에도 내게 닿은 눈길은 한참을 진득하게 머물러 있다가 떨어졌다.
유달리 눅진하게, 오래도록 머물러 있던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을 리 없었지만.
***
그로부터 며칠 뒤, 황제는 예상대로 기존 지시를 철회하고 올슨 백작가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일주일 내내 올슨 백작가에 관한 이야기로 사교계 귀족들이며 평민들이 쑥덕거린 영향이 큰 듯했다.
메리 후작가의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염려와 달리 후작은 아주 정중한 태도로 물러섰다.
정말로 백작 부인을 딱하게 여긴 건지, 아니면 한쪽으로 기울어진 여론에 울며 겨자 먹기로 물러난 건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리고 돌아온 주말.
나는 아리아 소식지 1면에 떡하니 실린 올슨 백작 내외의 글을 확인하고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집이 아닌, 한 연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였다!〉
그 밑에 달린 의견 역시 광장에서의 수군거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딱하다고 해야 할지,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전 광장에 붙은 벽보를 보고 펑펑 울었다니까요. 어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이번엔 나도 조금 감동이었음.
-이 정도면 당연히 광산은 양보 못 하죠. 평생의 추억이 날아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요, 사실 백작과 백작 부인이 유달리 애틋해 보인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어딜 가든 꼭 붙어 있었잖아요? 그 둘.
-근데 이 글은 정말 누가 쓴 걸까요?
-사용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글을 정말 잘 쓰네요. 사용인이었다면 평민일 텐데, 꼭 좋은 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매끄럽게 써 놨어요.
차별 발언 대박.
조용히 기함하며 시선을 내렸다.
대부분이 긍정적인 의견이었지만, 역시나 익명란답게 삐딱한 의견도 종종 보였다.
-저번 소식지에서는 다들 올슨 백작 부인 욕하기 바쁘더니 이제는 태도를 바꾸시네요. 손바닥인 줄.
-그땐 사정을 몰랐을 때죠!
-왜 이상한 사람을 만들고 그러시나요?
-큰소리치면 찔리는 거라던데, 다들 찔리세요? 하긴… 저번에 다들 백작 부인 물어뜯는 거 보고 구독 취소할까 고민했으니까.
-저기요, 어디 사는 누구세요?
왜 또 싸워….
나는 슬쩍 소식지를 엎어 놓고 웃었다.
“아무튼,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리아 소식지의 반응까지 확인하고 나니 이번 일의 승리자가 누군지 아주 확실해졌다.
‘완벽한 나의 승리지.’
엘로이즈, 또 한 건 했구나.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맞은편에 앉은 올슨 백작 부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휘휘 손사래를 쳤다.
“되었네, 오늘 벌써 그 말만 다섯 번째일세.”
“하지만 이게 다 대공비 전하의 덕 아닙니까. 고작 이런 차 대접으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른 오후부터 올슨 백작 부인의 초대를 받아 백작저의 정원에서 단출한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저번 주만 해도 바싹 마른 나무만 가득하던 백작저의 정원은, 엉성하게나마 꾸며진 상태였다.
“듣자 하니 정원사를 고용했다고?”
“예, 정원사뿐 아니라 사용인 몇몇도 다시 고용했습니다.”
“그거 잘됐군. 자네가 씩씩하게 견뎌 내야 백작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앞으로는 그 광산을 뺏기거나 나무를 벌목할 일도 없을 테니.”
“예, 그래야지요.”
올슨 백작 부인이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는 그녀가 백작을 잃기 전 곧잘 이런 얼굴로 웃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상념은 이어진 그녀의 말에 깨어졌다.
“사실 오늘은 이유가 있어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저번에 대공비 전하께서 제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 말인가.”
나는 마치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물론 연기였고 사실 아까부터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지만.
“별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