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다른 게 아니라, 백작이 살아생전 관리하던 광산과 광물들이 있지 않나.”
“예, 규모가 크진 않지만요.”
겸손은.
올슨 백작가가 광산과 광물로 유명한 건 제국 전체가 인정하는 사실인데.
‘백작 부인이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는데도 1년 내내 잘 돌아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건 아주 체계가 잘 잡혀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체계가 잘 잡힌 곳에선 그만큼 좋은 광물이 나온다.
“앞으로 올슨 백작령에서 생산되는 광물을 대공저에 한정해서 반값에 팔아 주었으면 해.”
“…저희 영지에서 생산된 광물 말입니까?”
“그래.”
내 선선한 대답에 올슨 백작 부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도 그럴 게, 보통 이런 직거래는 대량으로 물품을 유통하는 업자들이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공가는 광물 관련 사업은 전혀 하지 않는 상태였고.
“그야 어렵진 않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으십니까?”
“물론, 차고 넘치지.”
미안하지만 나는 3년 후의 미래를 보고 있답니다, 백작 부인.
새로 발견될 광물은 다이아나의 슈즈 사업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구태여 내 이름을 걸지 않고 대공가의 이름을 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실질적으로 올슨 백작가와 거래할 안주인은 내가 아니라 다이아나가 될 테니까!
그즈음 나는 이안에게서 적당히 뜯은 위자료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겠지.
‘생각만 해도 좋아.’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아무튼 이번 일로 사교계 내에서 자네의 이미지도 많이 좋아진 듯해. 그러니 이제 슬슬 백작저 밖으로 나오는 건 어떤가?”
“사교계 복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귀족들 여론이 바뀌었을 때 얼른 자리를 잡으면 좋지 않겠나.”
내 말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민을….”
그때였다.
저 멀리서 조용히 다가온 백작저의 집사가 백작 부인의 귀에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아니, 벌써 도착을 했나? 저녁에 오겠다더니….”
그녀가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하고선 말했다.
“다른 손님이 온 모양이지.”
올슨 백작 부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송구합니다, 대공비 전하. 저와 남매처럼 지내는 육촌 형제인데, 제가 대공비 전하와의 선약이 있는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귀빈을 모셔 놓고 약속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는 건 굉장히 큰 실례였다.
올슨 백작 부인은 기껏 호의적인 관계를 맺은 대공비가 노여워할까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올슨 백작 부인을 탓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내 칩거만 하던 사람이 손님을 맞는 건 좋은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오랜만에 온 손님 아닌가? 나도 슬슬 돌아가려던 참이니.”
“하오나….”
어쩔 줄 모르고 난처한 표정을 짓던 올슨 백작 부인이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탄성을 뱉었다.
“혹 괜찮다면, 인사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일전에 제 육촌 형제가 대공비 전하를 뵌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와?”
시즌 파티에서 만난 사람인가?
의아하게 반응하자 그녀가 허락을 구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뭐, 인사라면. 그렇게 하세.”
내 선선한 허락에 백작 부인이 감사를 표하고 집사에게 그를 이쪽으로 불러오라 말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집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곧 한 남자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섰다.
이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티 테이블 앞에 다다른 남자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격식 있게 허리를 숙였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군요.”
“아니, 자네는….”
금색에 가까운 결 좋은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 그 아래서 빛나는 암녹색 눈동자. 서글서글한 웃음까지.
내게 퍽 낯익은 얼굴이었다.
‘육촌이라는 게 로저 공작이었어?’
세상이 좁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적잖이 놀란 나와 달리 헤이든 로저 공작은 당황스러움보다 반가움이 앞서는 얼굴이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대공비 전하께서 백작저에 와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조금 서둘렀습니다.”
‘나 때문에?’
의문스러웠다.
마주친 적이라고는 황성의 제4 정원에서의 일이 전부 아닌가?
그는 그런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설핏 웃었다.
“너무 두서가 없었군요. 다름이 아니라 대공비 전하께서 헤레이스, 아니… 올슨 백작 부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가족 된 도리로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제야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헤이든 로저 공작과 올슨 백작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흔치 않은 암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 색은 올슨 백작 부인 쪽이 조금 더 진하긴 했지만 밀색과 금색, 갈색 그 어딘가에 걸친 것은 비슷했다.
‘얼굴 생김새는 닮은 점이 거의 없어서 몰랐네.’
나는 맞은편의 올슨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공작에게 내 이야기를 했나 보군?”
힐난하는 어조는 아니었으나, 올슨 백작 부인은 자신을 추궁한다고 생각한 건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비 전하, 그것이 아니라….”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단순히 저택의 사용인이 벌인 일이라기엔 너무 시기적절하여, 제가 백작 부인에게 집요하게 물었을 뿐입니다. 만약 도와주신 분이 있다면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하니까요.”
헤이든 로저 공작이 그녀 대신 나서서 차분하게 해명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백작 부인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어.”
공작이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백작 부인과는 워낙 친남매처럼 막역한 사이인지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저번 황성에서 대공비 전하를 마주친 일도 이야기했었죠.”
‘그래서 백작 부인이 나와 만난 걸 알고 있었나 보네.’
“백작 부인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군.”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백작 부인이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우리 두 사람을 보던 헤이든 로저 공작이 덧붙였다.
“혹여 이 일로 대공비 전하께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 저어되어, 과거 백작저에서 일했던 사용인 하나를 매수해 두었습니다. 상황이 꼬여도 그자가 쓴 벽보로 밝혀질 겁니다.”
내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
마냥 순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공작은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인 듯했다.
내가 백작 부인에게 눈짓했다.
“자네, 든든한 가족을 두었군.”
“과찬이십니다.”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살짝 묵례를 했다.
“다시 한번 대공비 전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에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로저 공작, 자네가?”
“예. 말씀드렸다시피 백작 부인과는 친남매 같은 사이입니다. 부디 성의를 표하게 해 주십시오.”
로저 공작의 말에 움찔했다.
‘그냥 구해 준 건 아닌데.’
어디까지나 올슨 백작 부인이 다이아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도와준 것인데다, 이미 나중에 받아 갈 몫까지 만들어 두었다.
내 철저한 계산을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는 두 사람을 보자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내 눈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 강력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얼굴이 무기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마치 햇살을 빚어 만든 것처럼 다정한 얼굴은, 기계처럼 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이안과는 영 딴판이었다.
한동안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나는 괜히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두 사람이 나눌 이야기가 있어 보이니.”
“마차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로저 공작이 조금 다급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