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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30)화 (30/91)

30화.

“으으.”

침대에서 찌뿌듯한 신음을 내뱉던 나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와…. 숙취 대박.”

이런 숙취는 20대 초반 이후로 처음이었다.

가까스로 상체를 세우자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느낌에 그대로 쓰러져 침대 시트에 얼굴을 처박았다.

“으어… 미치겠네….”

이럴 땐 뜨끈한 북엇국에 고춧가루 팍팍 쳐서 먹어야 하는데.

이 세계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가만 보자…. 어제 어떻게 들어왔더라….”

침대 시트에 얼굴을 박은 채로 웅얼거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제 귀부인,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 잔씩 받아먹다 보니 잔뜩 취기가 올랐고….

분명 파티장에서는 취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정신력 하나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귀가하기 위해 마차를 탄 순간부터 누가 필름을 뚝 잘라 간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아, 내가 엘로이즈 주량을 무시했다….”

엘로이즈는 내 생각보다 훨씬 주량이 약했다. 속된 말로 알콜 쓰레기.

고작 샴페인 다섯 잔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못해 뒤집히는 것을 느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고지식한 엘로이즈가 술을 즐겼을 리 없는데 말이야.’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내가 입은 옷을 확인했다.

그 와중에 얌전히 네글리제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용케 시중을 받아 옷까지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일단… 일어나자….”

시간은 오전 10시를 훌쩍 지나고 있었다.

‘오늘도 제시간에 아침 먹기는 실패했군.’

이안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건 오히려 좋지만.

으어어. 좀비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누군가 작게 노크를 했다.

“…들어오렴.”

“마님, 일어나셨군요.”

달칵,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비비가 아닌 집사 헤럴드였다.

눈을 살포시 아래로 내리깔고 정중하게 손을 모은 그가 내게 인사했다.

“…집사,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이른 아침부터 실례가 많습니다. 오늘 조찬 참석 여부를 여쭈러 왔습니다.”

“새삼스럽게 그걸 물으려 아침부터 여기까지 왔나?”

갑자기?

그러자 헤럴드가 조금 더 공손한 태도로 재차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라, 주인어른께서 마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겠다고 전하라 하셔서.”

…응?

“대공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

“예.”

“지금 열 시가 지났는데?”

“예.”

나는 방금까지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를 견디던 것도 잊고 눈을 끔뻑였다.

설마 며칠 전처럼 식어 빠진 커피를 앞에 두고 신문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내가 말이 없자 흘끗 눈치를 본 집사가 헛기침했다.

“…오늘도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말씀 올릴까요?”

“아니, 되었네. 가지.”

“예.”

내 대답에 다시 인사한 헤럴드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의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뭔데, 이건 또?”

***

간단한 채비를 바치고 다이닝 홀로 내려갔을 땐, 정말 이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려 식사 시간보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난 11시였다.

‘진짜 기다리고 있었어…?’

의아하다 못해 황당했다.

심지어 식어 빠진 커피만 앞에 두고 있던 며칠 전과 달리 이번엔 식사조차 시작하지 않은 듯 그의 앞에 놓인 커트러리가 깨끗했다.

뭐 잘못 먹었나?

‘쟤 이안 아닌 거 아냐?’

신문을 보던 이안이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늦으셨군요.”

“네… 근데 안 바쁘세요?”

“바쁩니다.”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말없이 신문을 접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싹바가지를 보니 이안이 맞긴 맞군.’

얼떨떨함과 찝찝함이 반쯤 섞인 기분으로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들이 식사를 내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안과 내 메뉴가 달랐다.

차가운 전채요리를 받은 이안과 달리 내 앞에는 따뜻하고 맑은 수프가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수프를 내려다보던 내가 접시를 내려놓는 시종에게 물었다.

“이건 뭔가?”

“아, 그것이….”

“어제 음주를 많이 하신 듯하여 주방장에게 일러두었습니다.”

분명 시종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정작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네?”

물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날 쳐다보았다.

“못 듣진 않으신 것 같은데.”

“아니… 대공께서요?”

“문제 있습니까?”

도리어 돌아오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문제가 많지, 아주 많지.

그 꽉 막힌 깡통 이안이 이렇게 누군가를 챙긴다는 건 죽을 때가 되었거나 세상이 멸망할 때가 되었다는 뜻 아니냐고.

내가 혼란스러움에 잠식되어 있든 말든 이안은 식기를 들어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던 시종이 도망치듯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혹시 나 아직 술이 덜 깼나?’

슬쩍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고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아야.”

더럽게 아팠다.

‘꿈은 아니라는 건데.’

“…….”

황당하게 수프를 쳐다보던 내가 어쩔 수 없이 스푼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수프의 맛은 아주 좋았다. 뜨끈한 북엇국만큼은 아니지만.

‘해장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몇 번 접시가 바뀌었을 때쯤, 나는 또 다른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얘 지금 나랑 식사 속도를 맞추고 있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먹는 속도가 오늘따라 느렸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먼저 식사를 마치고 훌쩍 떠나 버렸을 시간임에도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비워지지 않은 내 접시를 보고선 물을 마신다거나, 씹는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에이, 설마.

설마.

그리고 시종이 마지막 디저트로 이안과 내 셔벗을 나란히 내어 왔을 때, 나는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뭔데!’

이쯤 되니 당혹스러움을 넘어 겁이 날 지경이었다.

복잡한 심경에 차마 스푼도 들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달리 이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셔벗을 한 입 떠먹은 그가 스푼을 내려놓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기다렸습니다.”

그래,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보내 줬으면 좋겠다.

나 지금 체할 것 같다고.

“네, 말씀하세요.”

“먼저, 앞으로 술은 적당히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네.”

어제 좀 많이 마시긴 했지.

“그리고 앞으로도 아침 식사는 되도록 같이하죠. 저도 부인을 두고 먼저 일어나는 일은 없을 테니.”

“콜록, 네?”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렸다.

말문이 턱 막힌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정작 이안의 표정은 평온했다.

“죄송한 말이지만, 그 이상의 함께하는 시간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부인께서도 이미 알다시피 대공가 안팎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아서요.”

“네, 알죠….”

그러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같이 있는 시간 같은 걸 신경 썼냐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데 또 그걸 콕 짚어 말하자니 할 말은 없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진짜 뭐 하자는 건데.’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건가? 이안도?

이안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허망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뒤로하고 셔벗을 떠먹는 모습이 태연했다.

‘…잠깐만.’

불현듯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싸한 감각에 내가 우뚝 굳었다.

이거 설마….

“…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예.”

“혹시 어제 제가 귀가한 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가 살다 살다 내 입으로 이런 걸 물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미묘하게 달라진 이안의 태도와 어제 끊긴 내 필름을 조합해 보면, 짚이는 건 그거밖에 없었다.

원래 술 먹고 하는 진상이 제일 무서운 법 아닌가.

“있었…나요?”

불안함을 가득 담은 내 물음에 이안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제 뭐 있었다.

이건 없을 수가 없는 눈빛이다.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요란하게 울렸다.

‘X됐다.’

이래서 술은 막 마시는 게 아닌데.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억해 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는 게 없었다.

내가 혼이 반쯤 나가 있는 사이, 이안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선 평온하게 셔벗을 한 입 먹었다.

너는 지금 그게 입에 들어가니?

달칵, 수저를 내려놓은 그가 고상하게 냅킨으로 입을 톡톡 닦았다.

“별일 없었습니다.”

정말?

의심의 눈초리로 이안을 보던 난, 이어진 말에 그만 접시에 코를 박고 싶어졌다.

“이게 하얀 거짓말, 맞습니까?”

…그냥 혀 깨물고 죽자.

내 스스로의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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