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다이빙하듯 쓰러져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아, 미치겠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으아아아아!”
답답함과 수치스러움이 번갈아 밀려왔다.
나는 침대 위에서 팡팡 몸을 튕기며 머리를 마구 잡아 뜯었다.
그때였다.
“마님, 황실에서 서신이… 엄마야,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때마침 내 방으로 들어오던 비비가 화들짝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침대 위에서 무아지경으로 자학을 하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왔니?”
“네, 눈 감고 들어오느라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정말이에요, 마님.”
“응, 그렇구나.”
다 봤구나.
비비에게 별꼴을 다 보인 탓인지 이제 이런 일로는 부끄럽지도 않았다.
어차피 빙의 첫날부터 육두문자를 뱉는 걸 들킨 마당에.
‘정신병원에 신고도 안 하고, 우리 비비 참 기특해.’
차분하게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언제 비명을 질렀냐는 듯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그래, 황실에서 편지가 왔다고?”
“네, 황녀님께서 보내신 편지예요.”
비비가 편지와 레터 나이프가 담긴 은쟁반을 내게 내밀었다.
편지 봉투 한가운데에 레반트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하여간 성격 한번 급하다니까.’
마담 제드를 소개해 주기로 한 것이 어제 오후인데, 벌써 서신을 보내다니.
아닌 척하면서도 내 드레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봉투를 열어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겉치레 인사 같은 건 전부 생략하고 첫 줄부터 본론이 적혀 있었다.
〈내 친히 시간을 비워 놓았으니 마담 제리와 함께 내일 방문해 주면 좋겠어.〉
일주일 후도 아니고 내일이라니.
보통 이런 건 준비하는 사람을 생각해서 이삼일 정도는 여유를 주지 않나?
그 와중에 마담 제드의 이름까지 틀려 있었다.
본인의 관심 분야 외에는 티끌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는 게 참 황녀다웠다.
〈P.S. 대공비가 돌아가고 나서도 다들 한동안 대공비의 드레스 얘기를 하더군! 다들 눈이 발바닥에 달리진 않아 어찌나 다행인지!〉
마지막 추신까지 확인한 내가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황성으로 날 초대하시겠다는구나.”
“헉, 맙소사.”
비비가 깜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 당장 준비해야겠네요. 장신구도 다시 확인하고… 날짜가 언제인가요? 일주일 후? 이 주 후? 어느 쪽이든 빠듯하겠지만 제가 열심히….”
“내일.”
내 은은한 미소에 호들갑을 떨던 비비가 고장 난 것처럼 우뚝 멈췄다.
“내일…이요?”
“그렇게 됐다.”
하녀들이 오늘부터 고생이 많겠구나.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은 비비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아, 그리고 비비. 혹시 아리아 소식지라고 알고 있니?”
내 질문에 얼음 상태로 서 있던 비비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비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엇, 네. 아리아 소식지라면 당연히 알죠!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그래?”
또 나만 몰랐구나.
“듣자 하니 그냥 소식지가 아니라, 무슨 마법이 걸려 있어서 실시간으로 의견 같은 게 올라온다면서요?”
“응, 맞아.”
“헉, 소문이 진짜였군요!”
양손으로 입을 막았던 비비가 아쉬운 듯 꾸물꾸물 손을 내렸다.
“철저하게 회원 구독제인 데다가, 높으신 분들께만 발행되는 소식지라 저희 같은 아랫것들은 소문만 주워들을 뿐이지만요.”
아무한테나 발행되는 소식지는 아니었구나.
하긴, 사교계의 온갖 이슈를 싣는 소식지인데다가 마법까지 걸려 있다면 꽤나 고가일 텐데 구분 없이 여기저기 퍼져 있을 리가 없지.
‘이래서 부르주아 놈들이란.’
아마 추측건대 구독자 관리도 보통이 아닐 거다.
짧은 사색을 마치고 비비에게 말했다.
“그걸 구독해 볼까 하는데. 오늘부터 가능하겠니?”
비비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헉, 마님. 드디어 구독하시려는 거군요! 저도 실물을 보는 날이 오겠네요!”
“비비?”
왜 네가 신난 건데.
내 눈초리에 큼 목을 가다듬은 비비가 살랑살랑 웃었다.
“집사 어른께 말씀드려 볼게요. 아마 오늘이 발행되는 날일 텐데… 오늘 신청해도 오늘 자 소식지가 전달되는지는 모르겠네요.”
“이왕이면 오늘 소식지도 받아 보고 싶으니 그것도 같이 전달하도록 해.”
“네! 근데 마님, 전에는 아리아 소식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비비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그랬던가?”
“으음, 전에 집사 어른이 구독지 목록을 갱신하면서 한번 여쭈어보았을 때 괜한 사교계 이슈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었지.”
엘로이즈가 그랬었구나.
확실히 엘로이즈다운 발상이군.
고개를 끄덕이고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살다 보면 생각이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군요… 앗, 혹시 어제 파티가 마음에 드셨던 건가요?”
“뭐… 따지자면.”
“역시 전 마님께서 모두의 이목을 끄실 걸 알았어요! 다들 이래저래 말이 많긴 해도, 마님께선 사교계의 꽃이시잖아요. 그런 분이 사교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면 누가 가지겠어요?”
비비가 화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아무래도 비비는 나에 대한 알 수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비록 시즌 파티에서 다른 의미로 이목을 끌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만 보면 비비가 한 말이 맞기도 했고.
“그래. 그동안 너무 사교계 소식과 단절되어 있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더구나. 이제 나도 사교 행사에 꾸준히 참여할 테니 그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지.”
“마니이임….”
비비가 감격한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제가 집사 어른께 말씀드려서 오늘 자 소식지부터 구해 올게요!”
“그래, 고맙다.”
그대로 비비를 내보내려던 내가 일순 멈칫했다.
머릿속을 스친 생각 때문이었다.
“음, 저기. 비비.”
“네?”
머뭇거리며 운을 떼는 내 모습에 비비가 반쯤 돌렸던 몸을 바로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말했다.
“…혹시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니?”
“말씀하세요, 마님.”
다소곳하게 선 비비를 쳐다보며 망설이던 내가 큼,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어제 내가 귀가하고 나서 소란이 있었다거나….”
“네? 아.”
멀뚱멀뚱 나를 보던 비비가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어제 귀가 후라면… 주인어른께서 잠든 마님을 안아 들고 침실까지 데려다주신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주인어른께서 마님을 데려다 놓으시고는 저희한테 환복을 도와주라 하셔서 그렇게 했거든요.”
“뭐?!”
나도 모르게 음 이탈을 곁들인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비비는 격한 내 반응에 덩달아 놀란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제, 제가 말을 잘못한 걸까요? 으앙, 이놈의 입!”
“아니, 아니야.”
제 입을 툭툭툭 치는 비비에게 손을 휘휘 젓고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어쩐지 기억이 없다 했는데.
내가 두 발로 걸어온 게 아니었다니.
그것도 이안 놈에게 안겨 침실까지 운반되었다니.
그 말도 안 되는 장면을 상상하자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전부니?”
제발 그게 전부라고 해.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비비는 으음, 하며 난감한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말아 물었다.
더 있구나.
“…또 뭐가 있어?”
“아, 그게.”
“말해 보렴, 벌하지 않을 테니.”
나긋함을 가장한 내 채근에 비비가 마지못해 꾸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제 마님께서 로비에서 주인어른께 소리를 지르셨다는 얘기를 선배한테 들었어요. 또….”
“…또?”
“마님께서 무슨 고백… 같은 걸 하셨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