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안은 하마터면 귀를 의심할 뻔했다.
그러나 분명 방금 엘로이즈의 입에서 나온 건 자신을 가리키는 삼인칭이 맞았다.
잠깐 착잡하게 그녀를 훑던 이안이 말했다.
“취하셨군요.”
“네, 보면 모르세요? 파티에서 긴장 안 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부인께선 늘 술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라, 그랬나요? 그것도 몰랐네.”
“…….”
“에이, 진짜 안 취하려고 했는데에.”
술이 언제부터 안 취하려고 하면 안 취할 수 있었습니까?
애초에 취하기 싫으면 마시지 않으면 될 일 아닙니까?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삼키고선 건조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엘로이즈의 의중이 뭔지 오늘은 꼭 가늠해 보려고 했건만 이래선 대화다운 대화도 되지 않게 생겼다.
이안이 설설 고개를 젓고선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오, 에스코트~”
이열, 같은 추임새와 함께 엘로이즈가 배시시 웃었다.
평소와 다르게 부드럽고 나사가 너덧 개쯤 빠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참 여러모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예, 에스코트입니다. 그러니 잡으시죠.”
배운 대로 그녀가 맞잡기를 기다리는데, 금방 제 손을 내어 줄 것 같던 엘로이즈는 빤히 이안의 손을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이 없었다.
“…부인?”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참 멀었어요.”
이안의 부름을 가로챈 엘로이즈가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에스코트로는 안 돼요.”
“…….”
“알겠어요? 안 된다구요!”
방금 전 배시시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톡 쏘아붙이는 말투였다.
이어 그녀가 눈꺼풀을 끌어 올려 이안과 시선을 맞췄다.
에메랄드를 품은 청록색 눈동자가 불만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걸로 퉁칠 생각은 아니죠? 만약 그런 거라면 늦기 전에 생각 고쳐먹는 게 좋을 거예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이안이 한숨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까부터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적당히 취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코만 안 삐뚤어졌다 뿐이지 고주망태가 따로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로이즈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고집스럽게 이안을 노려보다가, 푸우 한숨을 쉬었다.
“꼴랑 손잡아 주는 걸로는 그 안 된다고요. 이걸로 되겠냐, 진짜. 얼마나 외로웠을지도 모르면서….”
“…예?”
“그쪽은 하나도 몰라!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도 모르죠? 아니이, 알 리가 없지! 으휴, 깡통 로봇 같은 게!”
“깡… 예?”
영문 모를 말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는 사이에 엘로이즈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거의 울먹이는 표정이 되었다.
“…진짜 한 대 칠까. 소드마스터가 별거냐, 어? 콱 씨.”
급기야 그녀가 제게 내밀어진 이안의 손을 퍽 밀치며 중얼거렸다.
이안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서렸다.
“부인, 말을 삼가시는 게.”
“그쪽이 잘난 게 뭐가 있다고, 진짜. 아니, 잘나긴 했는데! 얼굴만 잘나면 다냐? 아니다, 얼굴만 잘난 것도 아니긴 하지… 근데!”
“…….”
“난 잘난 사람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씨이, 엘로이즈가 손등으로 제 뺨을 벅벅 문지르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파티에서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게 대단할 지경이었다.
“부인, 이만 손을.”
“…하나만 물어볼게요.”
불쑥 들려온 말에 엘로이즈에게 다시 손을 내밀던 이안이 대답했다.
“또 무엇을 말입니까.”
“알아줄 생각은 있어요?”
“어떤 것을요.”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혼자 속앓이하고 괴로웠는지, 말해 주면 들을 의향은 있냐구요….”
“…….”
“이 씨이, 그럴 리가 없지. 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이안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던 이안이 시선을 끌어 올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당신은 몰라줄 테니까, 그래서 차라리 당신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씨이, 진짜 싫어.
중얼거리던 엘로이즈가 다시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근데, 그러면 안 되니까. 잘해 주란 말이에요. 고작 이렇게 손 내밀어 주는 거 말고. 다정하게.”
“…….”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도 모르면서….”
마지막 말에는 미세한 물기가 서려 있었다. 이안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의 자청색 눈동자가 일순 일렁이고,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진짜, 이딴 놈이 뭐가 좋다고….”
웅얼거리는 말과 함께 엘로이즈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안이 반사적으로 재빨리 움직여 그녀를 잡아들었다.
“부인?”
“으음….”
품에 안긴 엘로이즈는 방금 전까지 혼을 쏙 빼도록 쏘아붙이던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얕은 숨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지금 설마 자는 건가?
방금 전까지 소리란 소리는 다 질러놓고?
“…….”
황당하게 엘로이즈를 쳐다보던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잠든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이안은 귓전을 때리던 그녀의 음성을 조용히 곱씹었다.
‘…괴롭다고.’
그건 지난 2년 내내 감정 하나 없는 사람처럼 굴던 엘로이즈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발갛게 상기된 엘로이즈의 눈가를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거뒀다.
‘그날 정원에서도 이렇게 울었던 건가.’
외롭고, 비참해서?
아마 카일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제 말이 맞지 않느냐며 이안을 맹비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카일의 잔소리나 비난 따위가 아니었다.
“괴롭다니요, 황자.”
“그건 나약함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느끼지 마세요.”
“느끼지 않으면 됩니다.”
“친애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곁에 둘 필요 없습니다.”
“불행해질 뿐입니다.”
“…….”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과거의 기억에 그가 입술을 물며 침음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쉬이 떨어지지 않는 생각들을 떨쳐내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그런 결혼이지 않았나.
엘로이즈는 그저 대공비라는 쓰임새를 위해 곁에 두는 존재일 뿐, 그 이상으로 그녀의 내밀한 감정에 관여할 필요 없었다.
엘로이즈가 원하는 걸 주고, 그녀를 대공비로 둔다.
이안이 생각할 건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유년과 겹쳐 볼 필요 없었다.
“어차피 당신은 몰라줄 테니까, 그래서 차라리 당신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이딴 놈이 뭐가 좋다고….”
그럼에도, 중얼거리던 엘로이즈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신경을 갉작였다.
‘좋아한다고.’
분명 대화다운 대화는 하나도 하지 않았건만, 어쩐지 이안이 내내 의문스러워하던 문제의 답을 어렴풋이 들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으로서의 태도와 부부의 의무를 논하면서도 거리를 두던 이유.
당연하게도 끝이 있을 것처럼 말하던 이유.
‘우습군, 이제 와서.’
처음부터 달리 끼워진 단추인 것을.
이제 와 안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적어도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이안이 해 줄 수 있는 건, 엘로이즈의 말대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 주는 것뿐이었다.
“…다음부터 술은 자제시키는 편이 좋겠군.”
중얼거리며 엘로이즈를 안아 든 이안이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안 스스로도, 그녀를 안은 손길이 조금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