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고 분위기가 뒤바뀌자 이사벨라 하워드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며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는 순진무구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하워드 영애. 난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건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해서 괜찮다면 하워드 영애의 사랑을 돕고 싶다네.”
“하, 아니. 지금….”
“지금 마음에 둔 사내가 있는가?”
이사벨라가 말문이 막힌 듯 허, 허, 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온실에 있는 귀족 중에서 이사벨라 하워드가 이안 클라우드를 오래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단 한 명. 엘로이즈를 빼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인생은 아방수가 이기는 세계관이라고.
‘다이아나 얘기를 꺼낸 순간 너의 패배다, 이 인간아.’
나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또랑또랑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상대가 이미 짝이 있다면 곤란하겠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하워드 영애께서 임자 있는 사내나, 이미 가정이 있는 사내를 마음에 두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렇지?”
“…….”
“우리 대공 내외의 애정전선까지 살펴 줄 정도라면, 하워드 영애께서는 이미 상대에게 영애의 마음을 전달했을 거라 믿지마는….”
내 말에 이사벨라는 물론 주변에 있는 귀족들까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다 티 난다, 이것들아.’
주변 반응을 살피곤 웃음을 삼켰다.
“혹시나 해서 말일세. 내가 도울 것이 있다면 물심양면으로 돕고 싶네. 자네의 다정에 보답하는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이사벨라도 참 난감할 것이다.
자신의 오랜 짝사랑 상대의 부인이 그 마음을 응원한다느니, 임자 있는 사람을 좋아할 리 없다느니 하는데 얼마나 본인의 꼴이 우습겠는가?
그렇다고 내 앞에서 이안을 짝사랑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 무덤을 제가 판 거지, 뭐.’
결국 주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이사벨라가 홍당무가 된 얼굴로 내 손을 내치듯 뿌리쳤다.
“마,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워드 영애?”
“제 일에 너무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대공비 전하. 제 혼인은 대공비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하나 이건 그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내 방법일 뿐인데. 사양 말게.”
“되었다니까요! 기껍지 않으니 관심 끄셨으면 합니다!”
이사벨라가 나를 노려보며 카랑카랑하게 따져 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다가 허공에 두었던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내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딱 걸렸다, 요 녀석.
“그래, 영애도 잘 아는군?”
“…뭐라고요?”
“남의 일에 주제넘게 관심을 갖는 게 얼마나 실례되는 일인지, 영애가 직접 말을 하지 않았나?”
방금 전까지 만면에 가득하던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우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제야 이사벨라 하워드는 아차, 한 얼굴로 입술을 꾹 물었다.
“아, 물론 나는 이 일련의 일들이 영애의 다정이라는 걸 알지만. 혹여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오해는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렇다네.”
“…하.”
건조한 낯으로 싱긋 웃자 이사벨라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해하게, 하워드 영애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나 역시 영애를 걱정하는 것이니.”
내가 다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알지?
피식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자 이사벨라 하워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흐음….”
비스듬한 미소를 남긴 채 시선을 이사벨라의 어깨 너머로 던졌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귀부인들과 몇몇 영애들이 있는 쪽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몇몇 부인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참, 이것들은 가오도 없나.’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것들아.
후작 영애 하나 앞세워서 조잘거리다가 조금 밀린다 싶으니까 시치미 뚝 떼는 오합지졸들이라니.
그 깡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 응?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며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훑었다.
“이건 자네들한테도 마찬가지인 소리야.”
“저, 전하…?”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깨를 파르르 떤 여자들이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결혼 전의 엘로이즈 알피어스가 사교계의 얼음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건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와 버석한 성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
그녀가 감정 하나 담기지 않는 청록색 눈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 그 모습이 꼭 한 겨울의 얼어붙은 호수처럼 서늘하다고 하여 지어진 별명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살벌할 것이다.
“난데없이 타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아붓는 것이 실례라는 것 정도는 자네들도 알지 않나?”
“…….”
“에드워드 백작 부인.”
“네, 네?”
“내가 백작가의 차남이 아카데미에서 망나니처럼 굴다가 정학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구태여 묻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라네.”
고저 없는 목소리로 꺼낸 말에 내게 지목당한 에드워드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쯧, 혀를 차곤 바로 옆에 있는 남색 머리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해리슨 자작 부인? 내가 자네의 부군 되시는 해리스 자작이 이번에도 출장을 핑계로 주야장천 카지노에 눌러앉아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도 함구한 이유도 그러하고.”
곧바로 지목당한 해리슨 자작 부인 역시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그러니까 왜 촌스럽게 굴어.
여기서 먼지 하나 털어서 안 나오는 귀족이 어디 있다고.
번화가에서 귀족들의 추문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평민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어디, 다른 부인들께도 내가 ‘안부’를 물어야겠나?”
낮은 온도의 목소리로 묻자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들이 저마다 시선을 피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내게 대답한 건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이사벨라 하워드였다.
그녀는 이 상황이 적잖이 분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물고 있었다.
“제가 실례가 많았네요. 반가운 마음에 대공비 전하께 무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아니, 꼭 무례라기보단. 그대의 다정함이 누군가에겐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앞으로 조심하라, 부족하나마 조언한 것뿐이네.”
“…네.”
표정 봐라.
분함을 꾹꾹 눌러 담으려는 듯 목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꼴이 볼만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벌써 가는가?”
그녀와 상반된 낯빛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하워드 영애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 다음에 꼭 대공저로 초대하겠네. 대공비가 되어서 손님을 초대할 생각도 하지 못했군.”
네가 아무리 발악해 봐야 지금은 내가 대공비다.
미래에는 다이아나가 대공비고.
“…….”
내 말에 얼굴은 물론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사벨라는, 입을 꾹 문 채로 그대로 도망치듯이 퇴장했다.
돌아서는 눈가에 살짝 눈물이 고인 것 같기도 했다.
“하, 하워드 영애!”
“그럼 저희도 이만.”
“…대화 즐거웠습니다, 대공비 전하.”
이어서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부인들을 보며 손바닥을 탁탁 쳤다.
“흥.”
쯧,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고 있어.
이렇게 자근자근 눌러 주었으니 또 같은 레퍼토리로 다이아나에게 시비 걸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저 오합지졸이 다른 방식으로 다이아나의 속을 긁을지 아닐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안심이었다.
그들이 뒤꽁무니 뺀 쪽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을 때였다.
“푸흡.”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은 온실 안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응?’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이 보였다.
키는 내 가슴쯤 될까, 얼핏 보아도 앳된 소녀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바들바들 떨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폭소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진짜 웃겨.”
모두가 숨죽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한껏 웃어젖힌 소녀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태양이 내린 것 같은 백금발과 보라색에 가까운 자청색 눈동자. 앙증맞은 키나 새초롬한 얼굴과 달리 묘하게 흐르는 오만하고 고고한 분위기까지.
저 특징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면 이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안의 이복동생이자 황실의 적통인 레반트 제국의 1순위 계승자.
루이사 황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