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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22)화 (22/91)

22화.

‘갑자기 빙의한 게 확 실감이 난다, 얘들아.’

늘 소설 속에서 읽기만 하던 사교계 기 싸움을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다니.

역시 클리셰는 괜히 클리셰가 아닌가 보다.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내 눈치를 살핀 한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근데, 대공 전하는 그대로 가신 건가요?”

“그러게요. 전 두 분이 함께 파티에 참석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어머, 부인. 설마요. 두 분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인가요.”

“하긴….”

“대공 부부의 명성을 모르는 제국민도 있나요?”

그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사벨라는 부채로 자신의 입을 교묘하게 가린 채 그 사이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것들 봐라.’

지금 꼴랑 후작 영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공비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아무리 하워드 후작가가 힘이 있는 가문이라고 해도,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그러나 이 온실에 있는 누구도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만 봐도 엘로이즈의 평판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안 이 자식 진짜….’

이 지경까지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이안이 얄밉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가면 모르는 척 발 걸어서 넘어뜨려야지.

그 와중에도 이 인간들은 비꼬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대답 한마디 하고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문 앞까지의 에스코트라니… 저라면 부끄러워서 바로 돌아가 버렸을 텐데 말이에요.”

“어머, 말이 심하시네요. 대공비께서 이렇게 뵙기 어려운 얼굴을 비춰 주셨는데!”

“말이 그렇다는 얘기죠. 그렇죠, 대공비 전하?”

키득키득 웃던 여자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하긴… 대공 전하께서는 전에도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소꿉친구에게도 눈길 한번 주시지 않으셨잖아요.”

“아, 맞아요.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 영애는 수치를 알아 유학이라도 갔는데 말이에요.”

“저런… 대공비 전하께서는 그런 당당하신 모습이 보기 좋긴 하지만요.”

‘허, 이것들 봐라.’

내내 평온하던 내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사실 이 인간들이 나한테만 이러는 거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야 1년 후면 이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멋지게 싱글 라이프의 행복을 찾아 떠날 테니까.

문제는, 이 인간들이 나를 까내리기 위해 은근히 다이아나를 들먹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못 참지.’

날 욕하는 건 참아도 내 새끼 욕하는 건 못 참는다.

키보드 워리어가 가장 열 받을 때가 언제인 줄 아는가?

내게 온갖 욕을 퍼부을 때? 우리 부모님 안부를 물을 때?

아니다.

바로 ‘내 새끼’를 건드릴 때다.

그들을 훑어보던 내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방긋 웃었다.

“어머.”

내 꽃밭 탄성에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들 나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군. 다정하기도 하지.”

“…네?”

“어쩜 다들 이렇게 세심하신가? 나와 대공께 많은 관심을 주실 줄 알았다면 일찍이 한 번씩 만나 볼 걸 그랬어.”

“…대공비 전하?”

“자네들 말대로 내가 대공저 내부의 일을 신경 쓰느라 여러모로 바빴지 뭔가. 대공께서 워낙 공사가 다망하시니 나도 덩달아 바쁘더군.”

내 해맑은 웃음에 그들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반응하는 내 모습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물론 보통의 귀부인이었다면 이 상황 자체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겠지만.

알 바인가?

내가 지난 몇 년간 남주 팬덤한테 댓글로 두들겨 맞은 연륜이 있지.

고작 이 정도에 흔들리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비껴 내리고 멋쩍은 듯 한 손을 들어 뺨을 감쌌다.

“…사실, 아까 그 상황은 조금 부끄럽긴 했지. 자네들도 보았다시피.”

내 말에 묘하게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보던 여자들의 눈동자가 일순 빛났다. 흡사 먹이를 찾은 하이에나 같았다.

“하,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시는 모양이네요. 저라면….”

“그러니까 말일세. 이런 파티에 에스코트까지 받는 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 혼자 갈 테니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꼭 동행을 하겠다고 하지 뭔가.”

“…예?”

“이이도 참, 내가 남 앞에선 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얼어 버린 여자들을 둘러보며 수줍게 볼을 붉혔다.

“오늘 여기까지 데려다주면서도 어찌 그리 안절부절못하는지. 지난 2년 내내 나를 대공저 울타리 안에 두고 싸고도는 것으로 모자랐던 건가 싶기도 하고.”

“…….”

“이것 차암, 직접 말하고 나니 더 민망하군….”

새색시처럼 붉히며 양 뺨을 감싸고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자 주변에 어정쩡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날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니, 저희가 말한 건 그런 뜻이….”

“하지만 이이가 바쁜 와중에도 여기까지 데려다주겠다는데 부인 된 도리로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이제 밖에서 티 내지 않는 것도 한계라는 사람한테.”

뻔뻔하게 웃으며 한술 더 떴다.

‘부인’에 악센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나사 빠진 반응에 날 둘러싼 여자들은 ‘이게 아닌데…?’ 하는 눈으로 얼떨떨하게 날 보고 있었다.

‘으이구, 인간들아. 누가 요새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 촌스럽게.’

사실, 애당초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다.

난 이들처럼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교계 입지가 탄탄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인간들이 다이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냅다 와인을 쏟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물론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 내 이미지가 나락까지 떨어질 테니까.

이쯤에서 난 이름 모를 누군가 했던 명언을 떠올렸다.

인생은 아방수가 이기는 세계관이라고.

아무리 돌려 까 봐라, 내가 너희한테 말려드나.

내가 마이너 외길 인생을 걸어오면서 획득한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상대의 속을 박박 긁는 기술이었다.

쌍욕 한 마디 없이 욕하기.

상냥하게 기분 역관광시키기.

우아하게 엿 먹이기.

전부 다 고소각을 피하기 위해 연마한 기술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일련의 것들은 귀족 영애들의 화법과 아주 닮아 있었다.

‘너희들이 먼저 시작한 거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이럴 게 아니라 다들 대공저에 한번 오겠나? 내 초대장을 발송하도록 하지.”

“네, 네?”

“우리 부부한테 관심이 많으니,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직접 방문해서 담소라도 나누는 건 어떤가? 마침 부인들도 많이 있으니… 아.”

조잘조잘 말을 하던 내가 이사벨라와 눈을 마주하곤 헙, 숨을 들이쉬며 입을 막았다.

“하워드 영애께서는 아직 오가는 혼담이 없다지?”

내 순진무구한 태도에 이사벨라의 표정이 멍해졌다가,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대, 대공비 전하.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서.”

참고로 이사벨라 하워드는 못 먹는 감인 이안을 내내 짝사랑하며 오가는 혼담을 죄다 뻥뻥 차 대다가 낙동강 오리알이 된 사실이 있었다.

‘뭐, 결혼이야 자기 자유지만.’

남자 주인공한테 쓸데없이 매달리면서 여기저기 시비나 걸고 다니는 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결혼을 한 이안한테 미련을 못 버린 꼴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백날 그래 봐라.

우리 공.주께서는 곧 원앤온리 여주인공 다이아나한테 빠져서 허우적댈 예정이니까.

“이런,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그러고 보니 하워드 영애께서 어떤 사내를 오래 좋아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크흠.”

“아무래도 묻는 건 실례겠지?”

눈치는 개나 준 내 행동에 날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이 저마다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그사이에 이사벨라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너도 이안 놈 뒤꽁무니 쫓아다니던 건 마찬가지면서, 감히 다이아나 얘기를 꺼내?’

나는 조용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 물론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하, 대공비 전하. 지금….”

“아, 설마!”

싹둑 이사벨라의 말허리를 자리고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이사벨라는 이번엔 무슨 헛소리를 할 생각이냐는 듯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내가 방긋 웃었다. 그리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워드 영애께서는 실연을 슬픔을 겪었으니, 다른 사람의 결혼생활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가?”

“뭐, 뭐라고요?!”

“최근에 읽은 책이 있는데, 통계에 따르면 본인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하던데.”

“무, 무슨!”

이사벨라가 얼굴을 붉히며 퍼드득 몸을 떨었다.

동시에 주변 귀족들의 눈이 흥미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너만 쪽 줄 수 있는 줄 아냐?

나도 쪽 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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