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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24)화 (24/91)

24화.

‘이렇게 등장할 줄은 몰랐는데.’

일순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설책으로 읽기만 한 인사법인데도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러운 자세가 흘러나왔다.

“레반트 제국의 고귀하신 두 번째 태양, 루이사 에브게니아 셀리스 레반트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 그래. 인사는 되었어, 대공비.”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황녀가 손을 휘휘 저었다.

조금 전 나와 이사벨라의 기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귀족들은, 내 대화 상대가 황녀로 바뀌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기 바빴다.

‘역시 걸어 다니는 폭탄.’

다이아나에게 사사건건 시비와 딴지를 걸던 14살짜리 황녀가 공식적으로 ‘악역’ 타이틀을 꿰차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 황녀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부 똑같이 꼬장을 부려 댔기 때문이다.

황녀의 피해자 중엔 나이 지긋한 공작부터 귀부인, 영애나 영식, 시종들까지 있었다.

‘다이아나도 그중 하나였지….’

쉽게 말해 공평한 또라이랄까.

그 증거로 황녀가 입을 열기 무섭게 주변에 구름떼처럼 몰려 있던 인파가 썰물처럼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사이 웃음을 멈춘 황녀가 내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를 올려다보는 자청색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반짝 빛났다.

“오랜만이야, 대공비. 황후 폐하의 탄신연 이후로는 처음인가?”

“네, 그렇습니다. 황녀님께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뭐, 언제나 그렇듯 재미없었지. 방금 전에 대공비가 폭탄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황녀가 다시 깔깔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웃음 한번 우렁차네.’

방금 전 이사벨라를 대할 때와는 달리 은근한 긴장이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녀는 저 오합지졸이랑은 다른 요주의 인물이었으니까.

‘오늘 여기 온 것도 사실 황녀 때문이고.’

한동안 폭소를 이어 가던 황녀가 겨우 웃음을 그쳤다.

“소란스럽기에 와 봤더니. 여기서 대공비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무슨 바람이 분 건가?”

“사교 행사에 얼굴을 비치는 것이 뭐 특별한 일인가요.”

“보통은 그렇지 않지만 대공비한테는 특별한 일이지. 황실의 공식 행사 외에는 얼굴을 비춘 적이 없잖아? 오죽하면 황족보다 비싼 얼굴이라고 하겠어.”

황녀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방금 전 이사벨라가 한 말과 같았지만, 황녀는 날 비꼬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점이 달랐다.

‘악의 하나 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지.’

으쓱이며 가볍게 답했다.

“언제까지 대공저에 칩거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공비 된 도리로서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아하~ 그래?”

흐음, 콧소리를 흘린 황녀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꼭 다른 사람 같네? 대공비.”

황녀의 간드러진 음성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너무 쓸데없이 예리한 거 아냐?’

원작을 읽을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황녀는 마음을 함부로 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다이아나에게도 이런 식으로 불쑥불쑥 나타나 이렇게 예리하게 난감한 부분만 쿡 찌르고 가곤 했으니까.

나는 금세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니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세상에 대공비 같은 사람이 또 있겠어?”

파하하 웃으면서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모습이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저 같은 사람이라 하시면….”

“재미없고 고지식하기로는 대공비가 레반트 제국 1등이잖아. 아, 대공도 있었구나. 정정하지, 둘이 공동 1등이야.”

황녀가 키득키득 웃으며 찡긋 눈웃음을 쳤다.

욕인지 칭찬인지 대관절 알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다시 봤어. 대공비가 남한테 대놓고 망신을 줄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태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내 행동이 이 어린 망나니 황녀에게 꽤나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준 듯했다.

‘…시작이 나쁘지 않은데?’

황녀는 어떻게 보면 아주 번거로운 인물이었고, 또 다르게 보면 단순하고 쉬운 인물이었다.

여기저기 말도 안 되는 패악을 부려 남들을 골탕 먹이면서도 자신이 흥미를 느끼거나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한없이 너그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본의 아니게 지금 황녀의 흥미를 끌지 않았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여유가 생겼다.

나는 그녀를 보며 선선히 웃었다.

“딱히 망신을 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황녀님이 보기에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아니긴.”

루이사 황녀가 나를 흘겨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당치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고작 14살짜리 같지 않다니까.’

물론 이 정도 성정이 되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다이아나에게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대며 방해 공작을 한 거겠지만.

“아무튼, 아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고리타분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

그녀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신선했어! 마음에 들어, 대공비.”

“감사합니다.”

내가 알기로 이사벨라의 가문인 하워드 후작가는 황실과 꽤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사벨라 하워드가 고작 후작 영애인 주제에 대공비인 나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시비를 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앞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통쾌해하는 황녀를 보니 새삼스럽게 그녀의 무데뽀 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히려 좋아.’

이유야 어쨌든, 황녀가 나한테 관심을 가진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내가 황녀만 잘 잡아 놓으면 우리 다이아나의 앞길에 뿌려질 압정이 최소 반 이상은 줄어든다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황녀를 향해 방긋방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황녀님께선 눈부시게 아름다우시네요. 그 드레스도 직접 재단사에게 지시해서 제작하신 건가요?”

“응? 대공비, 눈썰미가 꽤 좋네?”

내 칭찬에 황녀는 예상대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드레스 치맛자락을 들어 보였다.

황녀의 드레스는 얇은 천이 여러 겹 겹쳐져 있는 형태였는데, 가장 위쪽은 흰색으로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푸른색을 띠었다.

“황성에 새 재단사를 들였거든. 이 치마를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황녀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그리고 나서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내 대답을 가늠하려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치맛자락을 쳐다보다가 손뼉을 짝, 쳤다.

“정말 아름답네요. 꼭 물결치는 바다 같아요.”

“응? 뭐야, 어떻게 알았어?”

황녀의 자청색 눈동자가 별을 쏟아부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모를 리가 있나. 이거 못 맞혔다고 다이아나를 그렇게 갈궈 댔으니.’

원작에서 마감 제드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황녀는 무엇보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황녀가 입은 드레스는 그녀가 마담 제드를 만나기 전에 가장 아끼던 드레스였는데, 황궁의 재단사를 불러 파도를 형상화한 드레스를 만들어 놓으라고 들들 볶아 탄생시킨 작품이었다.

그리고 원작에서 이 드레스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온갖 패악을 부려 댔다.

우리 불쌍하고 가엾고 애처로운 다이아나도 그 희생양 중 하나였고.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만….’

울컥 차오르는 분노를 잘 달래어 넣어 놓고 황녀를 향해 선선히 웃었다.

“네, 드레스 자락이 꼭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 같아요. 남부 절벽에서 이런 바다를 본 적이 있었는데, 새록새록 생각나네요.”

“세상에, 대공비! 어떻게 알았어? 이 드레스, 내가 남부 에티엔 영지의 절벽에 다녀와서 영감을 받은 거거든!”

황녀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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