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주말은 빠르게 돌아왔다.
그사이 나는 대공저로 배송 온 책들을 열심히 읽고, 이따금 새벽 산책도 하면서 이안의 정신머리를 어떻게 뜯어고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끝내 내린 결론은….
‘음, 쓰잘데기 없어.’
그냥 부딪히는 게 최고라는 것이었다.
책을 아무리 읽고 완벽한 남편상을 연구해도 저 냉혈한 이안이 그대로 따라 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읽은 〈여자에게 사랑받는 남자!〉를 끝으로 모든 책은 대공저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서관 구석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정원 한가운데 마련된 티 테이블에 이안과 함께 앉아 있었다.
“뭘 하시나 했더니….”
그가 티 테이블 위의 다과들을 무심하게 훑었다.
“주말에 차나 마시자고 제 시간을 통째로 담보 잡으신 겁니까?”
“…오늘은 첫 시간이니 가볍게 담소나 나누어 볼까 하고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안은 내 일련의 행동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 뚫리겠다, 이놈아.
“다짜고짜 정신머리를 뜯… 아니, 행동을 고치기엔 대공도 저도,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게 많잖아요. 원래 교육의 첫걸음은 제자의 수준 파악이거든요.”
수준 파악이라는 말에 이안의 눈썹이 잠깐 찌푸려졌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이 자식에게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좀 알려 줄 예정이었다.
소설을 읽은 바로, 이 남자 주인공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줄 몰랐다.
그리고 당연히, 가장 큰 피해자는 가련한 다이아나였다.
다이아나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애써 주제를 꺼내고 이야기를 이어가려 해도 단답으로 멋쩍게 끝내 버리기 일쑤였으니까.
특히나 다이아나가 아카데미로 떠나기 직전에 나눴던 대화는, 작가의 이안 사랑에 찌든 편파적인 서술에서도 그녀의 비참함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곧 아카데미로 떠난다는 다이아나에게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내게 말해 줄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으니까.
그 회차에서만큼은 이안의 악개들도 다이아나가 불쌍하다고 댓글을 달았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 염치도 없는….’
다시 울컥 차오르는 분노를 내리누르고 잔잔하게 웃었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니 이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괜찮죠?”
한편 맞은편에 앉은 이후로 내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안이 한숨과 함께 끄덕였다.
“예.”
“1년 후에 저한테 고마운 마음이 생기실 거예요.”
“모르는 사이에 예지 능력이라도 생기셨나 봅니다.”
싸가지.
“뭐… 어느 정도 예상 가는 바가 있어서요?”
진짜다. 장담하는데 넌 1년 후에 나한테 울면서 고마워할 거다, 인마.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안이 마지못해 한숨을 쉬며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담소, 나눠 보죠.”
순순히 협조하면서도 말투는 묘하게 삐딱했다.
사실 아까부터 내내 심기가 불편한 듯이 앉아 있긴 했다.
“자, 그럼 첫 번째예요. 저희 가볍게 안부부터 주고받아 볼까요?”
“안부 말입니까?”
“네.”
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아침에도 얼굴을….”
“안부 인사.”
말을 뚝 끊고 웃는 내 모습에 이안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졌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어 봐라. 내가 넘어가나.
“보통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매일 아침 안부 인사를 나누거든요. 뭐, 간밤에 잘 잤냐든지, 오늘 유달리 날씨가 좋다든지. 많잖아요. 하인들한테 인사 안 받아 보셨어요?”
“잘 주무셨으니 오늘 조찬 때 얼굴을 뵌 것이겠고, 날씨는 부인께서도 좋다고 생각하셨으니 야외에 티 테이블을 만드신 것이겠지요.”
내 말을 하나하나 받아치는 이안을 보며 생각했다.
‘넌 소드마스터만 아니어도 지금쯤 한 대 맞았어.’
이렇게 매를 버는 인간이 남자 주인공이라니.
역시 이 소설 작가의 취향은 존중하려야 존중할 수가 없었다.
탄식이 밀려왔지만, 애써 의지를 다잡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전부 다이아나를 위한 일이니, 내가 참고 인내해야 한다.
“안부 인사는 유대감을 위해 묻는 거잖아요. 대공께선 제게 한 번도 이런 안부 인사를 건네주신 적 없고요.”
“소모적이니까요.”
“그냥 지금이라도 제 추문을 하나하나 읽는 편이 좋을까요?”
참다못한 내 말에 그의 견고한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하아.”
그가 피곤하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었다.
자기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좋군요.”
‘그걸 하란다고 또 있는 그대로 따라 하냐.’
성의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김이 샜다.
‘아니지, 이거라도 어디야.’
협조 같지 않은 협조지만, 그래도 따라와 준다는 게 감지덕지했다.
원작에서는 다이아나에게 이런 말조차 해 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 종이를 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 게 꽤나 잘 작용한 듯싶었다.
“네, 잠은 잘 잤고… 날씨는 참 좋네요. 꽃도 예쁘고요.”
그렇게 말하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화원은, 내가 처음 새벽 산책을 나간 날 들렀던 장미정원이었다.
그날은 바람 때문에 오래 산책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낮에 보니 온갖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 있어 보기만 해도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이아나도 대공저의 장미정원을 유달리 좋아했었지.
“꽃은 매일 보시지 않습니까.”
그런 나와 달리 이안의 표정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고는 하나, 이토록 메마른 감수성을 보자니 착잡해질 지경이었다.
“매일 보는 꽃이라도 감회가 새로울 수 있죠. 대공께서는 느끼는 점이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래도 뭐 하나라도 느끼는 점이 없으실까요?”
말해라.
내 형형한 기세에 이안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꽃이.”
꽃이?
“알록달록하군요.”
이쯤에서 나는 진한 회의감을 느껴야 했다.
정말 내가 1년 안에 이 인간을 갱생시킬 수 있을까?
이안 이 자식이 다이아나 앞에서 갱생하는 척이라도 했던 건 위대한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욕설을 애써 삼킨 채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었다.
“대공, 그거 아세요? 여자들은 대화가 통하는 남자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요.”
“저도 여자죠?”
“…그것 참 놀라운 사실이군요.”
이안이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큼! 그러니까 제 말은, 꽃을 보고 같이 감상을 나눌 수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대공처럼 꽃이 알록달록하고 말하는 남자가 아니라.”
“…….”
“적어도 꽃밭이 아름답다든가, 화창한 날에 함께 티타임을 가질 수 있어서 영광이라든가, 즐겁다든가. 그런 빈말 정도는 하실 수 있잖아요?”
“빈말까지 필요합니까?”
피차 즐거운 만남은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안을, 나는 정말로 한 대 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아무래도 수업의 규칙을 하나 추가해야겠어요.”
“…….”
“쓸데없는 질문은 금지예요.”
내 말에 이안은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여기서도 한 마디 했으면 정말 수업이고 뭐고 그만둘 뻔했어.
“그럼 이왕 하는 김에 더 해 보죠. 듣기 좋은 말을 해 보는 거예요. 세상에 달콤한 말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없거든요.”
조금 전 했던 안부 인사의 연장선이라고 설명을 덧붙인 내가 목을 가다듬었다.
“잘 보세요.”
최대한 스윗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제 앞에 계신 분만 하겠습니까.”
이안의 표정이 썩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