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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12)화 (12/91)

12화.

“…무슨 위기감 말이지?”

“새 옷! 연애 서적! 이게 다 뭐겠습니까!”

카일이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

“대공비 전하께 심경의 변화가 생기신 거잖습니까. 혹시 압니까? 이미 마음 주신 다른 신사분이 있을지!”

답지 않게 드레스 쇼핑에, 손에 들고 온 연애 서적.

‘다른 남자라고?’

그 말에 이상하게 일순 불쾌함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인 감정이었지만.

금세 갈무리한 이안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카일이 속 터지는 표정으로 주먹을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실 게 아니라니까요. 사실 당장 대공비 전하께 다른 연인이 있다고 해도 주군께서는 할 말 없으십니다!”

카일이 맹렬하게 이안을 비난했다.

“아무튼 전 이 이상 일 못 합니다. 대공비 전하랑 이혼하시면 저도 콱! 그만둬 버릴 겁니다.”

하극상과 건방짐을 오가는 이안의 눈빛이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카일.”

“또 뭡니까!”

“이번 분기 봉급이 아직 지급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

“그렇게 그만두고 싶다면야. 당장 짐 싸들고 나가게 해 주지.”

이안의 싸늘한 표정에 카일이 아차, 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제가 무슨 말을 했던가요? 한 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시끄러우니 나가 봐라.”

“옙! 충성!”

경고에 가까운 주군의 말에, 눈치 빠른 카일이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섰다.

가만히 그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던 이안이 산더미처럼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제에발! 대공저를 생각해서라도 좀 대공비 전하께 잘해 주시란 말입니다!”

“그동안은 황제 폐하와 제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 참아 왔지만, 이젠 안 되겠어요.”

“…성가시군.”

한참의 정적 끝에 펜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한밤중에 산책까지 한 탓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평소 기상 시간을 훨씬 넘긴 아침이었다.

“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눈을 깜빡였다.

“진짜 죽은 듯이 잤네.”

심지어 꿈도 안 꿨어.

어제 하루가 고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지금 준비해도 조찬에 늦겠는걸.”

조찬은 아홉 시부터 시작인데 지금은 여덟 시 반을 지나는 중이었다.

서둘러 준비한다고 해도 아홉 시 반을 넘길 게 분명했다.

시계를 멀뚱멀뚱 보던 내가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그냥 천천히 준비해야겠다.”

어차피 이안도 식사가 끝나면 칼같이 다이닝 홀을 나가 버리는데.

나라고 그놈이랑 식사 시간을 맞추라는 법이 있나.

어차피 어제 대차게 싸운 마당에, 얼굴 안 보면 서로 좋지.

“흐아암, 졸려.”

굶는 건 싫으니까, 느지막이 내려가서 간단하게 샐러드나 먹고 와야지.

다시 뭉그적뭉그적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음, 역시 침대가 최고야.”

이 세계에 온 뒤로 가장 만족스러운 건, 머리만 대면 곧장 잠들 수 있는 최고급 침구였다.

안에 들어간 게 그냥 솜이 아닌 건지, 보들보들하고 포근포근했다.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대공비일 때 이런 게으름을 피워보지, 또 언제 피워보겠어.”

그렇게 시트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뒹굴뒹굴하던 나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설렁줄을 당겨 하녀들을 불렀다.

아주 여유롭게 씻고 옷까지 챙겨 입으니 예상대로 열 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좋아, 이쯤이면 이안 놈은 사라지고 없겠군.’

오늘은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좋아.”

그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다이닝 홀에 내려간 나는, 예상 밖의 광경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응?”

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드넓은 다이닝 홀에는 이안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것도 신문을 펼쳐 든 채로.

‘쟤가 왜 아직 여기 있어?’

혹시 시계를 잘못 봤나 싶어 빼꼼 고개를 내밀어 복도의 시계를 확인했다.

분명히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평소 그의 식사 시간이 30분 내외인 것을 생각했을 때, 자리를 뜨고도 한참이나 남을 무렵인데.

‘늦잠 잤나?’

고개를 기울이며 유심히 살폈으나, 늦잠을 잤다고 하기엔 이미 식사를 마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의 앞엔 김조차 나지 않는 커피 한 잔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인기척을 느낀 건지, 읽고 있던 신문을 내리며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늦으셨군요.”

“…네. …네?”

얼마나 당황했는지 삑사리가 절로 터졌다.

얼굴이 확 달아올라 헛기침을 했지만, 그사이 이안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져 신문에 고정된 지 오래였다.

“…크, 흠.”

나는 미적미적 걸어가 이안의 오른편에 앉았다.

‘아니, 평소엔 칼같이 나가면서 오늘은 왜 한 시간 가까이 커피를 마시고 있담.’

심지어 다 식어 빠진 커피는 마신 흔적조차 없었다.

애써 당혹을 숨기고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왜 아직도 여기 계세요?”

“그러면 안 됩니까.”

여전히 싸가지는 밥 말아먹은 대답이 돌아왔다.

‘포크로 찍을까?’

잠깐 폭력성이 고개를 들었다.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그의 옆에 있는 나이프도 칼이라는 생각에 조용히 접었다.

소드마스터라 봐 주는 거다.

나는 그를 불만스럽게 훑었다.

“그래서 왜 여기 계시는데요?”

“보다시피 식사를 했습니다만.”

설마 사과라도 하려고 기다린 건가 싶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이 냉혈한이 말다툼 한번 했다고 하루 사이에 사람이 될 리 없지 않은가.

“큼.”

괜히 멋쩍음에 헛기침만 여러 번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들이 내 몫의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슬쩍 식기를 집어 든 순간이었다.

“부인.”

“네?”

내내 신문에 고정되어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대비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친 나는 식기를 들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이 와중에 재수 없게 잘생겼네.’

다이닝 홀 전체에 햇살이 눈부시게 들이쳐서 그런지, 아침에 보는 이안의 외모는 유독 빛이 났다.

시선을 마주치던 것도 한참,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신문을 접었다.

“말씀하신 그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아, 네.”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보아하니 첫 주부터 펑크를 낼 심산인 것 같았다.

‘어떤 핑계로 안 된다고 하려나. 황성? 아니면 사업 미팅?’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어림도 없었다.

난 이안이 뭐라고 하든 의견을 꺾지 않을 생각으로 포크를 쥔 손에 슬쩍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안의 입에서 나온 건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처음 권하신 대로 주말 전부로 하죠.”

“그건 안 되겠… 네?”

준비한 거절 멘트를 말하려던 내가 멈칫했다.

이어서 귀를 의심했다.

“주말 이틀을 다… 말씀이세요?”

“처음에 부인께서 제게 제시한 조건이 그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고 두 배로 뻥튀기해서 부른 건데.

내 당황스러운 반응에도 이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응시할 뿐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러는 건지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어디 머리라도 맞았나?’

심각하게 이안을 살폈으나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다.

“싫으면 관두셔도 괜찮고요.”

“아뇨, 그건 아닌데.”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셔츠 차림이 아닌 정복 차림이었다.

잠깐, 그럼 여태 황궁에 가는 것도 미루고 이 말 하나를 하려 여태껏 기다렸단 말이야?

‘시간이 남는다며?’

황당함에 들고 있던 포크가 미끄러졌다.

다행히 접시에 부딪히기 전에 재빨리 바로잡았지만.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이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부인.”

“네?”

“해 보죠, 그 ‘노력’이라는 거.”

“…네, 네?”

“말씀하신 기브 앤 테이크.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가 답지 않게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가 보겠습니다.”

새침하게 다이닝 홀을 나서는 이안을 보다,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왜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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