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14)화 (14/91)

14화.

결국 달콤한 말 건네기는 실패했고, 꽃을 보고 적당한 감상을 내놓는 것으로 타협했다.

다사다난했던 오리엔테이션 겸 첫 번째 수업을 얼추 마친 뒤.

이안을 잘생긴 병풍 삼아 차를 즐기던 내가 문득 말했다.

“아 맞다. 들으셨겠지만 백지 수표를 발행해서 썼어요.”

“알고 있습니다.”

“뭘 샀는지도 아시겠네요?”

“의상실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동안 너무 제게 소홀했던 것 같아서요. 앞으로는 사교계에 얼굴을 자주 비출 예정이에요. 대공께서도 이해하시죠?”

나중에 다이아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놔야 했다.

겸사겸사 제드 의상실의 이름을 알려 놓을 필요도 있었고.

그러나 내 가벼운 말투와 달리 이안의 표정은 아까보다 조금 더 썩어들어 갔다.

‘뭐야, 설마 백지 수표 한 번 썼다고 아까워하는 거야?’

물론 따지자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지만.

그래도 설마 이안 클라우드가 그렇게 쪼잔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이안이 물었다.

“사교계라. 결혼 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생각해 보니 여러 사람을 만나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서요. 언제까지 대공저에만 박혀 있을 순 없잖아요.”

“여러 사람이라….”

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고 삐딱하게 물었다.

“갑자기 사교계에 관심 돌릴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죠.”

“글쎄요, 그건 비밀인데요?”

내 대답에 이안이 미간을 확 좁혔다.

“…아, 그래서 새로 만날 사람이라도 구해 보실 생각입니까?”

“네. 천천히 찾아볼 예정이에요.”

다이아나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을 고르고 고르려면 신중해야 한다고.

나는 그를 향해 의연히 대답하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왜 묘하게 말투가 비꼬는 것 같지?’

착각인가.

“아무튼, 사교계에서 인물을 찾으려면 애석하게도 대공가의 이름이 좀 필요해서요. 대공께서도 협조해 주시기를 바라요.”

이름뿐인 대공비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없었다.

다이아나의 힘이 되어 주려면, 대공비로서의 권력을 알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내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이안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새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공비의 위치를 이용해 보시겠다는 겁니까?”

“뭐, 따지자면 그렇죠?”

가볍게 대답하고는 으쓱였다.

‘엘로이즈가 그동안 대공비로서 한 일이 얼만데 이 정도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지.’

반면, 한참이나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날 응시하던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배로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결혼하면서, 부인은 대공가에 흠이 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하셨죠.”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의아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여태까지 의무를 잘 수행했고요.”

엘로이즈가 대공비의 위치에 충실했다는 건, 2년간 단 한 번도 저택 내에서 큰 문제가 터지지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를 가만 바라보던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뱉었다.

“안 그래도 추문에 시달리시는 분이, 괜한 짓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말씀드렸다시피 부인께선 아직 대공가의 사람이니까요.”

누가 그걸 모르나?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이안의 목소리에는 서늘함이 뚝뚝 묻어났다.

“제가 부인께서 제시한 부부 생활에 협조하겠다 말씀드린 건 그 이유 때문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순간 스치는 생각에 ‘아.’ 하고 탄성을 삼켰다.

‘사람을 가려서 만나라는 건가?’

이안 클라우드는 대공의 위를 받았지만 황제의 동생인 데다 아직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어, 몇몇 황제파에게 견제를 받고 있었다.

만약 대공비인 내가 그런 이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고 다닌다면 이안의 입장이 퍽 곤란하겠지.

그의 말도 대충 납득이 갔다.

‘근데 그런 말을 무슨 저렇게 살벌한 얼굴로 해?’

누가 보면 내가 어디 가서 허튼짓이라도 하고 다니는 줄 알겠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놈의 위신이 떨어진 데 팔 할은 본인이 기여한 거 아니야.’

그렇게 위신에 예민한 인간이 부인을 그렇게 방치시켜서 추문에 시달리게 한 건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됐다.

탐탁지 않게 이안을 바라보다 얕은 한숨을 뱉었다.

‘뭐, 이것도 1년 후면 아무 상관 없어지겠지만.’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곧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 지금은 내가 참아 주기로 했다.

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끄덕였다.

“네, 대공가에 피해 끼치지 않도록 사람은 가려 만나도록 하죠.”

“…….”

“적어도 이혼 전까지는요.”

동시에 이안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

주말의 첫 티 파티는 아주 어정쩡하게 끝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를 마시는 내내 이안의 삐딱한 태도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이안은 다음 날에도 별말 없이 정원에 나와 나를 기다렸다.

협조해 줄 거면 좀 더 흔쾌히 협조해 주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가 얌전히 내 의도대로 따라와 준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두 번째 대면에서도 사실 그렇게 생산적인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안에게 원만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그때마다 이안은 속 터지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런 것까지 협조해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소모적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뒷목을 잡았는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다.

‘그 와중에 쓸데없는 질문은 금지라고 하니까 질문은 하나도 안 했어.’

그런 대화를 반복하고 있으니 내가 남자 주인공과 말을 하는 건지 시멘트벽에 대고 혼자 주절거리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내 팔자야….”

이른 오전, 방에 딸린 테라스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사람 고쳐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물론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니 순탄치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내 예상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래도 아예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주말 내내 그를 괴롭힌 탓인지, 둘째 날엔 직접 에스코트를 받아 본관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성공했다.

‘물론 내 반강요였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원작에서처럼 뒤에 사람을 버려두고 자기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는 짓은 이제 안 하겠지 싶었다.

“그래, 그거면 됐지.”

물론 이안 놈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삐딱하긴 하지만, 차근차근 해내다 보면 그게 버릇이 되고 버릇이 체화가 되는 법이다.

‘다이아나를 만날 즈음이면 사람 구실은 할 거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님, 마담 제드가 도착해 계세요.”

“아, 벌써 왔구나.”

비비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마담 제드가 약속한 드레스를 가지고 오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의상실에 다녀온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바로 메인 드레스룸으로 가시면 돼요. 이미 세팅까지 다 해 놓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준비성 하나는 참 마음에 들어.”

“마담 제드가 제 생각보다 훨씬 멋진 분이시더라고요. 핫, 그럼 오늘 마님이 드레스를 갈아입으시는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보겠네요!”

비비는 의상실에 처음 방문한 날 안절부절못하던 것을 벌써 잊었는지 만면에 설렘을 가득 품고 있었다.

드레스를 입어 보는 건 난데 왜 본인이 그렇게까지 들뜬 건지 모르겠지만.

복도 중앙에 위치한 메인 드레스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비비의 말대로 이미 도착해 마네킹을 늘어놓고 있는 마담 제드가 보였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돌린 그녀가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오셨습니까, 대공비 전하!”

그러다 허리 꺾이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