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창밖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살짝 커튼을 걷은 순간이었다.
“주군, 저 왔습니다.”
때마침 서류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오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심복이자 대공저의 전속 마법사, 카일이었다.
“늦었다.”
“저 십 분 전까지만 해도 서부였습니다. 어떻게 이것보다 빨리 옵니까? 장거리 마법진 한 번 사용하는 데 힘이 얼마나 드는지 아세요?”
카일이 투덜거리며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다음 주까지만 정리하시면 되는 서류들입니다…만 오늘 전부 처리하고 주무실 거죠?”
징글징글하다는 말투와 함께 카일이 몸서리쳤다.
그를 힐끗 바라본 이안이 다시 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알면서 묻는군.”
“참… 어쩌다 제가 주군께 걸려서는.”
탄식이 섞인 중얼거림이었다.
이안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라도 하는 듯 깃펜을 집어 들다가, 천천히 멈췄다.
“…카일.”
“예에.”
“내가 너무하다고 생각하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
“항상 너무하시죠. 부관을 이 야심한 새벽까지 굴리는 상사가 어디 있답니까? 주군 덕분에 날이 갈수록 수면시간이 줄어든다고요. 이러다 일찍 죽으면 전하께서 책임지실 겁니까? 저 이래 봬도 엘제이어 가문의 귀한 외동아들입니다.”
진절머리 치는 카일의 말을 듣던 이안이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말고, 대공비 말이다.”
“…예?”
한순간 카일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대공비 전하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옵니까?”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멈춰 있던 이안이 천천히 손을 움직여 서류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뒷짐을 진 채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카일이 헙, 하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군, 혹시….”
“…….”
“죽을병 걸리셨습니까?”
“그 입은 좀 다무는 게 좋겠군.”
“아니, 갑자기 대공비 전하 이야기를 하시니까 그렇죠. 주군 입에서 그분 이야기가 나오는 건 처음 아닙니까.”
카일 대신 이안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남보다 못한 부부 사이를 유지해 온 지 벌써 2년째였다.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이안의 입에서 엘로이즈의 이야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이해관계가 맞아 결혼했고, 부부가 된 이후로는 당연히 저택에 머무는 여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유령 같은 부인이 며칠 사이 이상해졌다.
이혼을 입에 담질 않나, 말도 없이 조찬을 거르질 않나.
아까는 자신이 하는 만큼 돌려주겠다며 답지 않게 뻔뻔한 태도로 웃기까지 한 주제에, 방금 전에는….
“울더군.”
밤 산책을 하다 제자리에 서서 엘로이즈가 눈물을 닦는 모습을 이안은 분명히 보았다.
이안 클라우드는 그녀가 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엇보다도, 엘로이즈가 홀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부부 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언제부터 그런 일에 신경을 썼다고.’
한편 카일은 제 주군의 폭탄 발언에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대공비 전하께서 말입니까?”
“그래.”
“아니, 대공비 전하께서 눈물을….”
허, 기가 차다는 듯이 헛숨을 뱉던 카일이 우뚝 멈춰서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달래 주셨습니까?”
“왜 그래야 하지?”
“주군께서는 사람도 아니십니다.”
“칭찬 고맙군.”
카일이 탄식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눈물까지 흘리셨다면 그건 백 퍼센트 주군 탓입니다.”
“헛소리를.”
“그렇잖습니까.”
카일이 이때다 싶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집안끼리의 결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부부가 각방을 쓰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까놓고 말해 두 분이 열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누신 적이 있긴 하십니까?”
“…….”
“먼저 저택 안에서 쓸데없이 마주치는 일 없게 하자고 하신 것도 주군이시고요.”
“대공비로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은 부족함 없이 제공했다.”
“지금 사용인 관리 하십니까? 복지제도? 그런 건 저한테나 해 주십시오.”
“카일.”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대공비 전하의 생일은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이안이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다.
“…….”
“허이고, 이거 보십쇼.”
카일이 혀를 쯧쯧 찼다.
“9월 23일입니다. 저도 아는 걸 주군만 모르시잖습니까. 가을마다 성대하게 탄신회를 벌여 망정이지, 그게 아니면 기억도 못 하셨을 거 아닙니까?”
“가문 간의 결속이다. 사사로운 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어.”
“예, 예. 그래서 대공비 전하를 울리셨군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순간에 기가 죽었을 이안의 서늘한 아우라에도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튼, 제 말은 전부 주군의 잘못이라 이겁니다.”
이안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혼 얘기까지 꺼냈나.”
“예? 이혼이요?!”
카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혼? 그 인내심 많은 대공비 전하께서 이혼을 입에 담으셨다고요?”
“호들갑 떨지 마라, 카일. 어디까지나 만약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뿐이니.”
“호들갑을 안 떨게 생겼습니까?!”
카일이 새붉은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깜빡였다.
“그 대단하신 대공비 전하께서 이혼을 논하시고! 울기까지 하셨는데! 주군께선 느끼시는 게 조금도 없습니까?”
이안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카일이 속이 터진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어휴, 이러다 진짜 이혼당하신다니까요. 심각성을 모르시네.”
카일의 답답한 말투에도 이안은 평온하게 서류를 훑을 뿐이었다.
“이혼을 택한다면 그 역시 대공비의 자유겠지.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녀만 대공비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이고, 퍽이나요!”
카일의 빈정거림에 이안의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뭐?”
“아니 그렇잖습니까!”
이안의 살벌한 눈초리에도 카일은 아랑곳 않고 큰소리쳤다.
“사교계의 꽃이라는 엘로이즈 알피어스 후작 영애께서도 주군과 결혼하시고 평판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어떤 정신 나간 영애가 주군과 결혼해 준답니까? 본인 평판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
이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어째 대공비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군.’
그러나 카일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 두 분이 이혼하고 새 대공비를 맞이한다고 칩시다. 이 어마무시한 대공저의 업무를 엘로이즈 대공비 전하보다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아니, 존재하긴 하겠습니까?”
카일이 척, 손을 뻗어 한쪽에 쌓여 있는 엄청난 양의 대공저 운영 문서를 가리켰다.
“…….”
확실히 엘로이즈의 일 처리는 아주 깔끔했다. 그건 이안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엘로이즈가 대공비가 된 이후 그는 내부 행정에서 거의 손을 떼다시피 했으니까.
“예? 대공비 전하야 부족한 거 없는 분이시니 알피어스 후작가로 돌아가 새 사람을 만나면 그만이시겠지만요. 주군께서는요.”
“…….”
“당장 이혼하고 이 산더미처럼 쌓인 대공저 업무를 소화할 자신은 있으시고요?”
카일이 울화통 터진다는 듯 얼굴을 쓸었다.
“제에발! 대공저를 생각해서라도 좀 대공비 전하께 잘해 주시란 말입니다!”
이젠 거의 비는 듯한 말투였다.
카일이 저렇게 애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상 대공비의 자리가 공석이면 죽어나는 것은 그의 가까이에 있는 수족들이었으니까.
엘로이즈가 사라지고 나면 그 어마어마한 대공저 운영 업무가 누구에게 할당될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카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쳐다보았다.
“헉, 그러고 보니… 오늘 대공비 전하가 의상실에 들르셨다고 하던데.”
“의상실?”
“이름도 없는 의상실에 가서 드레스며 장신구를 전부 쓸어 담으셨다고 하던데요? 서점에서 연애 서적도 사시고.”
‘아까 나갔을 때의 일이군.’
짧게 추측한 이안과 달리, 카일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맙소사, 이제 알겠네. 주군, 이래도 위기감이 안 느껴지십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