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100화개학식과 역풍
* * *
월요일이자 개학식 날이 밝았다.
개학식.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든 치를 떨며 질색할 그런 날.
아직도 8월인 탓에 더위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부 활동을 하러 다닐 때처럼 버스를 이용했다.
다른 학교 개학식과 출퇴근 시간이 맞물리면서 버스 안이 무척 혼잡했다. 덕분에 여기저기 치여서 죽을 뻔했지.
이럴 바에는 차라리 40분 동안 걸어 다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2반 교실에 들어서자 도연이가 활짝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영재야. 오랜만이네. 방학 때 어떻게 지냈어?”
“나야 당연히 공부했지.”
어깨를 펴고 말하자 도연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혹시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스터디부 활동도 계속 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그랬어.”
나는 대충 뭉뚱그려서 들려주었다.
“나름 알차게 보냈구나.”
“그러는 너는 어땠어?”
곧바로 도연이에게 되물었다.
“나는, 가족들하고 해외여행 다녀왔어.”
“재밌었겠네.”
그때 다른 여자애들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재야아. 우리한테도 얼굴 비춰야지.”
나는 도연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른 무리로 향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후. 아침부터 정신없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을 훔쳐내던 중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윤희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살짝 야속하게 여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인사를 못 나눴구만.
“안녕?”
선수를 친 윤희의 눈빛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아주 그냥 인기남 다 됐네.”
“음. 뭐, 애들이 얼굴 비춰달라고 하니까.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나는 뒷머릴 긁적이며 입을 움직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면 좀 난감한데.
“저기, 윤희야? 갑자기 왜…….”
뚫어져라 직시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서 두뇌를 풀가동하고 있는 와중에 윤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런 거엔 항상 약하더라?”
그러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놀리려고 한 거였냐!
나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연기력 아주 좋았다네. 10점 만점에 9점.”
점잔을 떨기 위해 팔짱도 꼈지만, 윤희는 아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들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9점이야?”
“심사위원을 놀린 죗값이지.”
우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피식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렇게 교실에서 만나니까 무척 반가웠다. 불과 3일 전에도 같이 부 활동을 했으면서 말이다.
“어엇! 영재야아아!”
그때 왼편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쓸데없이 밝기만 한 음성.
“또 오버한다.”
나는 대놓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규원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뇨옹!”
규원이가 내 목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컥!”
“딴 애들이랑 얘기한다고 못 봤지 뭐야.”
“괜찮아?”
옆에서 윤희가 걱정하길래,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사인을 그렸다.
“금요일에 봤는데도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니까.”
규원이가 이제는 아예 내 상체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그만하라고 했다.
“재밌었지?”
“응. 주먹이 울 정도로.”
상쾌한 미소로 답하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규원이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아침부터 기운이 펄펄 넘치는구만.
“그나저나 너희 둘은 인사했어?”
“당연하지이!”
규원이가 과장스레 고개를 움직였다.
“우리가 너보단 빨리 도착하잖아.”
윤희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재회한 기쁨은 누리는 가운데 HR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교실 여기저기에 퍼져 있던 애들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책상 위에 교과서를 펼쳤다.
하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젯밤, 지아 누나에게 저질렀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로 경솔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앞서 나가버린 감정을 어떻게 제어할 수도 없었다.
좀 더 듣기 좋게 얘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와서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지아 누나와 계속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만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스터디부를 위해서라도.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지아 누나와 다시 대화를 나누어봐야 할 것 같다.
* * * *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면서 개학식이 시작되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애국가 제창. TV방송을 통한 이사장님 말씀. 마무리는 교가 제창.
“오늘부터 바로 정상 수업하니까 그리들 알아.”
선생님의 전파 사항에 다들 소리 높여 개탄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수업 열심히 들으라는 말을 남겼다.
이윽고 교과목 담당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거의 한 달 만에 듣는 수업.
나의 집중력은 언제나와 같이 최상위 수준을 유지했다. 옆자리에 있던 윤희도 마찬가지였고.
규원이는 아쉽게도 3교시 이후 버티지 못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규원이는 종이 울리자마자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교실에는 나와 윤희만 남게 되었다.
나는 읽고 있던 필기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재야.”
돌아보자 윤희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읽고 있던 시집은 책상에 뒤집어놓은 상태였다.
“어디 가려고 그래?”
“아. 배고파서 밥 먹으러.”
“…….”
윤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안색을 살폈다.
이윽고 윤희가 덤덤한 표정으로 콧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
저 맑은 눈망울 앞에서 얄팍한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 지아 누나와 있었던 일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별일 아냐.”
“그렇구나. 알았어.”
둘러대는 말이었는데도 윤희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나중에 봐.”
나는 윤희를 뒤로 한 채 교실 밖으로 나왔다.
* * * *
지아 누나가 속해 있는 2학년 6반 교실에 도착했다.
참고로 주현 선배도 지아 누나와 같은 반이다.
열려 있는 교실 문을 통해 내부 동태를 살폈다. 지아 누나가 주현 선배와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나는 손나팔을 만들어 지아 누나를 호출했다.
“지아 누나!”
목소리가 우렁찼는지 교실에 있던 선배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들이 어째 묘한데.
아니나 다를까 선배들이 휘파람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열렬히 반응했다. 다들 머릿속에 꽃밭만 들었나.
그 사이 지아 누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옆에 주현 선배도 이끌고서.
그러자 선배들의 분위기가 최고조가 되었다.
“고백해! 고백해!”
“한영재 파이팅!”
지아 누나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웬일로 찾아왔어?”
누나의 음성은 평소와 다름없이 발랄했다. 그 점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 저, 할 얘기가 좀…….”
나를 바라보는 지아 누나의 눈빛이 순간 진지해졌다. 하지만 변화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그보다 주현이랑 인사해야지. 오랜만에 보잖아.”
“아! 그렇죠.”
바다에 합숙을 간 이후로 처음 보는 주현 선배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선배. 방학 내내 수고 많았어요.”
“으, 응. 너도…….”
여전히 쭈뼛거렸지만 이제는 익숙해서 괜찮았다.
“주현아. 나 이제 영재랑 따로 얘기 좀 나누려고. 나중에 스터디부에서 애들하고 인사하자.”
“응. 그, 그러자.”
주현 선배가 후다닥 교실로 돌아갔다.
지아 누나는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할 얘기 아니지?”
그 말속에는 이미 내 목적을 파악했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침묵을 지킨 채 구름다리로 향했다. 나는 중간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나 어젯밤에.”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미안해!”
누나가 먼저 사과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누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저번 주에 있었던 일들 말야, 밤새 되돌아봤거든. 내가 정말 큰 민폐를 끼친 것 같더라구. 그래서…….”
입술을 깨무는 누나. 그동안 지아 누나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너무, 내 감정만을 생각했어. 내 감정을, 진심을 말과 행동으로 보이면 아마 너도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마냥 그렇게만 여겨왔어. 정말 이기적이었지 뭐야. 좋아한다고 해놓고서 내 생각만 한 꼴이잖아.”
자책 끝에 누나가 기어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아 누나.”
나는 나직한 음성으로 누나를 불렀다.
지금 고개를 떨구어야 할 사람은 누나가 아니다. 바로 나다.
“고개 들어요.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저니까.”
그러자 누나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난 정말로, 동정 같은 거, 아녔으니까…….”
누나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그 자리에서 흘리지 못한 눈물이 지금에서야 쏟아지려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누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나. 울지 마세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고백을 찬 당사자가 위로하려는 꼴이라니.
“고백했을 때는 차 놓고, 이제 와서 다정하게 구는 거야?”
지아 누나가 콧물을 삼키며 그 점을 지적했다.
“지금은, 위로를 해야 될 상황이라서요.”
내 대답에 누나가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해야 할 말을 목구멍 밖으로 밀어냈다.
“누나. 고백을 듣고도 못 들은 척했던 거 정말로 죄송해요. 누나는 엄청 큰 용기를 짜내서 했을 고백인데……. 제가 한 짓거리는 누나의 진심을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요.”
내던지고 나니 내가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누나는 눈두덩을 문지르면서 내 얘기를 경청했다.
“그러니까 다시 제대로 답할게요.”
누나의 붉어진 눈시울을 정확히 마주했다.
어제는 하지 못했던 행동.
“응.”
살며시 고개를 움직이는 누나. 양손이 힘껏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목소릴 냈다.
“미안해요. 저는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래.”
뜸을 들인 끝에서야 누나가 입을 열었다. 쓸쓸한 눈빛이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저,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누나가 검지로 내 입술을 막았다.
“나 포기 안 할 거니까. 다음엔 네가 나한테 고백하도록 만들어 줄 거야. 기대해.”
누나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검지를 뗐다.
“네.”
다행이었다.
지아 누나처럼 멋진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누나의 미소에 무척 안심이 되었다.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기대할게요.”
나도 누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잘 풀려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 * * *
방과 후에 나와 윤희, 규원이는 곧장 스터디드림으로 향했다.
나는 오늘 오후에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두 사람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오늘 주현 선배가 돌아왔으니까 기념으로 단합회 같은 거 하면 어떨까?”
“크으. 우리 부장님 뭘 좀 아는구만!”
“좋아.”
둘은 대찬성이었다.
규원이가 스터디부 깨톡방에도 이 소식을 알렸다.
지아 누나도 무척 반색을 표했다. 정작 주현 선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지만.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현 선배는 원래 이런 성격이니까.
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5분쯤 기다리자 지아 누나도 부실에 왔다.
“어라? 주현이 언니는?”
규원이가 의문을 표했다.
평소 같았으면 지아 누나와 함께 왔을 텐데.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온대.”
지아 누나의 어조에는 아쉬움이 배어있었다.
“이런. 주인공이 빠지다니.”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규원이.
윤희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주현 선배 없이 하기에는 모양 빠지는데.”
하지만 중얼거려봤자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단합회를 내일로 미루는 방법 말고는.
“오늘은 그냥 하던 대로 공부하는 걸로 하자.”
나는 부원들을 둘러보며 내뱉었다.
윤희와 지아 누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합회애…….”
그 누구보다도 노는 걸 좋아하는 규원이는 실망감을 1그램도 감추지 않았다.
“오늘은 열심히 공부하고 내일 단합회 하자. 알았지?”
다독이자 규원이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문제집을 꺼냈다.
그때 깨톡 알림음이 울렸다. 내 것만이 아니라 모두의 스마트폰에서.
우리는 일제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스터디부 깨톡방에 깨톡 한 건이 있었다.
주현 : 미안....스터디부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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