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 99화­파고드는 타이밍(9) (99/131)

〈 99화 〉 99화­파고드는 타이밍(9)

* * *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코인노래방이었다.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우리는 운 좋게 넓은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동전 지갑에서 천원권 지폐 한 장을, 누나는 세 장을 꺼냈다.

“물 필요해?”

“없어도 돼요.”

슬기도 옆에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목나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한 누나가 천원짜리 지폐 네 장을 지폐 투입구에 집어넣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못 부르니까.”

나는 마이크가 정상인지 확인하고자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울리는 소리가 제법 큰 걸 보니 걱정 안 해도 되겠구만.

“나는 물 사 올 거니까 너네 먼저 해도 돼.”

발랄한 음성으로 내뱉은 뒤 누나가 카운터로 향했다.

“오빠! 나 최신곡 하나 알고 있어.”

한껏 들뜬 얼굴을 하고 있는 슬기.

“뭔데?”

질문하자 슬기가 곧바로 제목을 불렀는데 영어 제목이었다.

영어 공부는 잘 못하면서 이런 건 잘 아네.

“팝송이야?”

“아냐. 방실소년단 노래라구!”

슬기가 양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 그때 지아 누나가 생수병을 든 채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직도 예약 안 했어?”

“슬기가 먼저 한대요.”

“엥? 나?”

당황했는지 슬기의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올라갔다.

누나가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참. 얘들아. 우리 내기할까?”

“내기요?”

“응.”

되묻자 지아 누나가 선선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런 뒤 내기 내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세 곡씩 부른 점수를 합산해서 가장 낮은 사람이 커피값을 내는 거야. 어때?”

“잠깐. 슬기는 돈이 없어요.”

손을 들고 문제 제기를 했더니 누나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해답을 내놓았다.

“너랑 슬기는 한 팀으로 하면 되지. 대신 점수는 합산에서 나누기 2 하는 걸로. 됐지?”

“명쾌하네요.”

“난 좋아!”

슬기가 물개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나는 동전 지갑에 들어있는 액수를 생각해보았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로군.

그리하여 나는 내기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먼저 마이크를 쥔 선수는 슬기.

“으으. 내기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긴장돼.”

반주가 나오는 동안 슬기가 과장스레 숨을 들이마셨다.

“내 동생 파이팅!”

양팔을 들고 외쳤다.

이 오빠가 음치라 너에게 기댈 수밖에 없구나.

누나는 템버린을 흔들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럴수록 긴장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슬기.

하지만 막상 노래가 시작되자 최선을 다해 열창했다. 고음에서 삑사리가 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점수는 95점. 생각보다 괜찮은 출발이었다.

다음은 지아 누나의 차례.

누나는 작년에 나온 발라드를 선곡했다.

“노래방 오랜만인데 잘 되려나.”

혼잣말에 이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반주가 끝나고 가사로 돌입.

산뜻한 음색으로 시작하는 노래. 중반부부터 이어지는 고음 파트에서는 청량감이 느껴질 만큼 질러댔다.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팬티에 지릴 만큼 잘 부른다고 해야 할까.

노래방 기계도 그 사실을 인정하듯이 화면에 큼직하게 100점을 띄웠다.

나는 시험에서 말고는 100점을 맞아본 적이 없는데…….

“휴우. 다행히 목이 금세 풀렸네.”

누나가 손부채질을 하고 나서 생수로 목을 적셨다.

이대로면, 우리 남매가 진다!

“누나. 저도 주세요.”

나는 비장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누나의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간접키스?”

“아녜요! 입 안 대고 마실 거라구요!”

문득 옆을 보니 슬기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알았어. 농담이야. 자.”

누나가 내민 생수병을 기울여 목구멍을 적셨다.

반주 시작.

마이크의 상태를 한 번 더 점검한 뒤 복부에 숨을 모았다.

이윽고 가사가 나왔다.

나는 최대한 음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고음 구간에서는 힘이 달려 음정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결과는 88점.

“하아. 무슨 서울올림픽도 아니고 90점을 못 넘기네…….”

내 한탄 소리에 누나가 반응을 보였다.

“오. 그 드립은 신박한데.”

“누나. 응원 한 마디만 부탁해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이기고 나서.”

역시 내기 앞에서는 장사 없구만.

대결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 남매는 지아 누나의 3연속 100점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맛있겠다아. 영재가 사주는 커피.”

누나가 말괄량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겨 먹을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런 결과가 더 나았다.

그간 누나에게 받기만 해왔으니까 이렇게라도 보답을 해야지.

누나에게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행동을 하지 못한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옆에서 슬기가 내 옷자락을 살며시 쥐었다.

“오빠아. 나도 커피.”

졌다는 아쉬움보다는 먹을 생각으로 들떠 있구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렇게 우리는 스타박스로 향했다.

* * * *

스타박스에서 음료를 주문한 뒤 우리는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2시를 넘겨서야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왔다.

오늘의 선택은 돈까스 전문점.

가게 앞에서 지아 누나가 말했다.

“점심은 내가 살게. 너 아까 스타박스에서 많이 썼잖아.”

“안 그러셔도 되는…….”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거절을 얼른 삼켰다. 실제로 돈이 모자란 상태였다.

“여기 비쌀 것 같은데 싼 데로 가요.”

“이 정도는 괜찮은데.”

“제가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막도날드 어때요?”

“음…….”

누나가 고민에 빠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슬기가 오빠아, 하면서 칭얼거렸다.

“나 돈까스 먹고 싶어어.”

“슬기는 돈까스가 좋아?”

고민에 갇혀 있었던 지아 누나가 순식간에 탈출했다.

“네에.”

슬기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저걸 알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누나. 그냥 돈까스로 해요.”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때를 넘긴 탓인지 한산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돈까스 치고는 좀 비싼 편인데.

슬쩍 누나의 기색을 곁눈질했는데, 행복한 고민에 빠진 눈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슬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가장 저렴한 일반 돈까스를, 슬기와 지아 누나는 치즈돈까스를 골랐다.

“우리 입맛도 짝짜꿍이네?”

누나의 한 마디에 슬기가 헤헤 웃으며 좋아라 했다.

점심 식사를 끝낸 뒤 나는 당구장으로 가자고 의견을 냈다.

“나 당구는 잘 못 치는데.”

웬일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누나.

항상 활력 넘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래놓고 엄청 잘 치는 거 아닌가요?”

“아냐. 진짜 못 쳐.”

……저렇게까지 말하면 믿을 만할지도 모르겠군.

“오빠. 난 당구해 본 적이 없어.”

“이참에 나한테 배울래?”

슬기가 머리를 위아래로 여러 번 움직였다.

“오오. 영재 네가 공부 말고 잘하는 게 있었다니.”

누나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든 채 감탄했다.

“저도 그리 잘하는 건 아니지만요.”

우리는 당구장으로 향했다. 종목은 물론 초보자도 할 수 있는 포켓볼.

누나가 큐대와 초크를 챙겨서 당구대 앞에 섰다.

“한 수 봐줘.”

나는 누나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화답했다.

“싫어요.”

“쳇.”

누나의 혀 차는 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큐대를 쥔 채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슬기에게 다가가 자세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고 나서 게임 시작.

우리 남매 대 지아 누나의 대결이었다.

지아 누나의 당구 실력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헛발질 그 자체였다. 덕분에 우리 남매는 노래방에서 겪은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다.

슬기도 누나와 비슷한 실력이었던 탓에 내가 다 해야 했지만.

그래도 한때 형준이와 자주 당구를 치러 다닌 덕분에 두 사람보단 훨씬 나았다.

“아아아. 나 진짜 못하겠어.”

누나가 약한 소리를 내뱉을수록 내 입꼬리가 귓불을 향해 올라갔다.

당구장을 나온 이후 우리는 양궁장과 게임센터에도 들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음속에 똬리를 튼 돌덩이의 존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끝이 머지않았다.

* * * *

신나게 놀다 보니 어느덧 해질녁이 되었다.

지아 누나는 슬기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며 우리 집까지 따라왔다.

슬기는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누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기 위해서 현관에 서 있었다.

누나가 슬기와 시선을 마주한 채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기야. 내일부터 개학이라서 앞으로는 자주 오기 힘들 거야.”

“우리는 9월 1일에 개학하는데…….”

슬기도 섭섭한 표정을 내비쳤다. 누나는 그런 슬기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언니도 그랬음 좋았을 텐데 말야. 고등학생이니 어쩔 수 없나 봐.”

그런 뒤 지아 누나는 슬기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만 갈게.”

“언니. 다음에도 꼭 놀러와요!”

“그럼. 기회가 되면 우리 집으로도 초대할게.”

나는 슬기에게 집 잘 보고 있으라고 당부한 뒤 누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항상 고마워.”

“뭘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밤이 주변의 풍경을 서서히 짙은 푸른색으로 색칠해 나갔다. 슬쩍 눈을 들어 올리자 희끄무레한 구름 뒤에 가려진 보름달이 보였다.

“오늘 진짜로 즐거웠어.”

누나가 나직한 음성을 냈다.

“저도요.”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겨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마치 아주 잘 준비된 무대 같았다.

41번 버스가 오려면 좀 기다려야했기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벤치에 앉았다.

“내일이면 개학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죠.”

“그러게.”

누나가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짚고 한숨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즐거웠던 여름방학은 처음이야. 그 전에는 발레 연습하느라 많이 놀지도 못했거든.”

거기까지 말한 누나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다 네 덕분이야.”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니에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근처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거렸다.

“누나.”

어렵사리 한 마디를 떼었다.

“응?”

“저……. 솔직하게 하나 얘기해도 될까요?”

“뭔데?”

내 목소리가 진지해서 그런지 누나가 허리를 폈다. 한동안 뜸을 들인 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요 며칠, 누나가 우리 집에 계속 놀러 왔잖아요.”

나는 누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솔직히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시선을 마주한 채로는 할 수 없는 얘기들이니까.

“그, 랬어?”

무척 조심스레 운을 떼는 누나.

나는 묵직하게 고개를 한 번 움직였다.

“아……. 그렇게 많이 불편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어.”

“그냥 놀러 오기만 한 거면 괜찮았어요.”

아직 이야기가 겉돌고 있다. 나는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누나.

그럴 수밖에. 이건 오로지 나만이 하고 있는 생각이고, 느끼고 있는 감정일 테니까.

“미안. 진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몰라서.”

누나가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미 결심한 일이었는데, 막상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말해야만 한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항상 많이 썼잖아요. 돈…….”

“아. 그거?”

평소보다 낮은 음정으로 누나가 반문했다. 나는 실타래를 푸는 양 말을 이어나갔다.

“누나는 부담 갖지 말라고 말해도 받는 입장에서는 그게 안 되거든요. 슬기야 마냥 좋아했지만, 저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마치 빚을 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서.”

“…….”

말문이 막힌 듯 누나는 목소릴 내지 않았다. 하지만 누나를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좀 삐뚤어진 놈이라서요.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그런데 계속 받기만 하고 돌려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동정받는 듯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요.”

매끄럽지 못하고 이리저리 튀는 문장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누가 이런 얘기를 매끄럽게 꺼낼 수 있을까.

“아냐. 절대로 그런 마음은 없었어. 호의야, 호의.”

“누나가 호의였다고 해도……. 저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영재야.”

맥이 빠진 부름.

“나는 언제나 진심이야.”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심이 항상 통하는 법은 아니다.

결국 나는 누나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까.

“누나.”

“이쪽 보고 얘기해.”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저번에 같이 발레 공연 보러 갔을 때.”

“영재야.”

누나가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지만 나는 묵묵히 내 할 말을 했다.

“저, 누나가 무슨 얘길 꺼냈는지 똑똑히 들었어요. 좋아한다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미안해요. 그땐 마음을 정할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해버렸거든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누나의 목소리.

여백을 채우려는 듯 어디선가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마주 보고 얘기해 줘.”

나는 그제야 누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끝까지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밀려오는 후회감.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렸다.

“미안해요. 이런 마음으로 누나랑은…….”

더 이상 문장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누나가 고개를 떨군 채 벌떡 일어섰다. 앙다문 입술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41번 버스가 정류장 앞에서 정차했다.

“……갈게.”

간신히 들릴 만큼 작게 말한 누나가 버스에 올랐다. 나는 누나에게 어떠한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윽고 버스가 앞으로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의 뒤꽁무니에 눈길을 고정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후우우.”

몸 안의 모든 산소를 그러모은 듯 깊고도 긴 한숨을 흘려보냈다.

선을 그었다.

긋고 말았다.

너무나도 달갑지 않은 성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