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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화 〉 98화­파고드는 타이밍(8) (98/131)

〈 98화 〉 98화­파고드는 타이밍(8)

* * *

오늘은 여름방학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나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롯이 공부만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생각보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일은 역시나 스터디부 멤버들과 바다에 놀러갔던 일이지.

그 외에도 지아 누나와 발레 공연을 보러 간 일이라든가, 슬기와 함께 셋이서 재미나게 놀았던 것도 추억 거리라고 부를 만했다.

……그나저나 어째 지아 누나와 관련된 추억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인데.

누나의 성격 자체가 살가워서 친근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요새 들어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나아가도 괜찮을 것인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물음표.

나는 팔짱을 끼고 문제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2학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앞으로 두 달 후면 결과가 나온다. 처음 이사장님과 약조한 일이 이루어질지, 아닐지.

한성고로 편입하려는 결의는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터디부 활동을 즐겁게 여기고 있는 마음 또한 진짜배기다.

부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귀찮은 마음뿐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변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 너머, 어두운 밤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외로이 빛을 내리쬐는 가로등 하나.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스터디부 활동이 즐겁다. 하지만 내 목표는 스터디부를 넘어간 곳에 있다.

이 간극은 결코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저 멀리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과 나 사이의 거리처럼.

그렇다면 답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

나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한성고 편입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유종의 미를 잘 거둬야겠지.

자세를 바로 하고 몬아미 볼펜을 다시 손에 쥔 순간, 슬기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빠!”

“야, 노크 좀 하고 들어 와.”

고개를 홱 틀고 쏘아붙였다.

“아,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열린 문틈 사이에 얼굴을 끼운 슬기는 해맑기 그지없었다.

“내일 지아 언니 놀러 와?”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네.”

슬기가 붕붕 소리가 날 만큼 세차게 고개를 움직였다.

하긴 그럴 만하다.

매번 올 때마다 간식거리 챙겨오지, 재밌게 놀아주지,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고.

“아쉽게도 그런 계획은 없어.”

“오빠가 부르면 되잖아.”

“음.”

나는 볼펜으로 턱을 누르며 고민해 보았다.

“글쎄. 누나도 개학 준비하느라 바쁠 것 같아서.”

“히잉.”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슬기.

“얻어먹는 거 너무 좋아하지 마. 안 좋은 버릇이야.”

“그냥 언니가 좋은 건데…….”

“그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슬기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직후 볼펜 노크를 눌렀다.

그때 깨톡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지아 누나가 개인톡을 보낸 것이었댜.

자전거 안장에 앉아서 귓불 옆에 V자 사인을 붙인 사진 한 장을.

지아 누나 : 놀이터에 아무도 없당~ 기분좋아~ ㅎㅎ

이 누나 또 위험하게 혼자!

사진을 본 이상 얌전히 앉아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뒤 스마트폰만 챙겨서 방을 나섰다.

“응? 오빠 어디 가?”

TV를 보던 슬기가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산책하러!”

나는 놀이터를 향해 냅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

놀이터에 도착했다.

나는 무릎을 짚은 채 턱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간신히 호흡을 골랐을 때 세상 태평한 목소리가 귓전을 건드렸다.

“금방 왔네?”

고개를 홱 돌렸다. 다리를 꼰 채 벤치에 앉아있던 지아 누나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미니벨로 자전거는 등 뒤에 세워놓은 상태였다.

어휴.

한숨이 터져나왔다.

나는 온갖 걱정이란 걱정은 다 하면서 뛰쳐나왔는데 정작 당사자는 태평하게 손이나 흔들고 있고…….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것 아닌가.

“이 누난 또 오밤중에……. 위험하잖아요!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지아 누나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깨톡 보냈잖아.”

말을 말아야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보다 사진 어땠어? 제일 괜찮은 걸로 보냈는데.”

“완벽했지요.”

엄지를 치켜세우자 누나가 샐쭉한 얼굴을 했다.

“그게 다야?”

“어엄청 원더풀했어요.”

다소 과장스런 어투로 말하자 지아 누나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옆으로 약간 이동했다.

“앉아. 조금 전까지 뛰었잖아.”

한여름 밤에 뜀박질을 한 탓에 옷이며 이마며 땀으로 젖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네. 그럴게요.”

나는 벤치에 앉았다.

누나와는 불과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핫팬츠 아래로 뻗어있는 늘씬한 다리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고 말았다.

“지금 어디 보는 거야?”

야릇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보니 누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자전거 보고 있었어요.”

“아닌데. 내 다리 보고 있었는데.”

“에이, 저 그런 변태 아니에요.”

“영재야. 내가 페이지북에서 본 게 하나 있는데.”

누나의 눈빛이 돌연 진지해졌다.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거지?

“남자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믿을 수 없는 말이, 자기는 변태 아니다래.”

“…….”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맞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입맛을 다시며 긍정했다. 확신에 차 있는 눈길을 마주한 상태로 거짓말을 할 성격은 못 되니까.

누나가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시 물어볼게. 내 다리 봤지?”

“……네.”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누나가 내 등짝을 가볍게 터치했다.

“이럴 때만 솔직하게 구네. 아무튼 그 다음엔 무얼 해야 할까?”

마치 스무고개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그거 말구!”

누나가 목청을 약간 올렸다.

“어땠는지 얘기해야지.”

이건 또 무슨 흐름이지?

“보통 사과해야 하는 거 아녜요?”

“너니까 괜찮아. 어서 말해.”

누나는 이제 엄청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대는 경지에 올라선 것이 틀림없다.

“최고죠.”

그리고 그걸 태연하게 받아내는 나도 만만치 않은 것 같고.

누나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나저나 이 먼 데까지 오는 거 안 힘들어요?”

“이 정돈 익숙하니까 괜찮아. 우리 집에서 30분이면 충분히 되거든.”

자전거를 타고도 그 정도면 엄청 멀지 않나.

더 얘기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걸로 입씨름 벌여봤자 내 입만 피곤할 테니까.

누나가 양손으로 벤치를 짚고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후텁지근한 밤공기 사이로 흘려보내는 가벼운 한숨.

“이 놀이터 오랜만에 온 것 같아.”

누나의 중얼거림에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5월 말에 우연히 왔었죠. 거의 3개월 만이네요.”

“그런 것도 기억해 주는구나.”

지아 누나의 눈길이 나에게 닿았다. 나는 뒷머리를 문질렀다.

“아니, 뭐……. 제가 원래 한 기억력하잖아요.”

지아 누나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머쓱해진 나는 정면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런데 누난 어쩐 일로 여기에 온 거예요?”

가장 궁금했던 사항을 이제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

예상과는 반대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누나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의아함을 품은 채 고개를 돌렸다.

우연이었을까. 누나도 이쪽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맞닿은 시선.

우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새하얀 가로등 불빛.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왜일 것 같아?”

밝은 목소리. 거기에 은근한 미소가 더해졌다.

어렴풋이, 지금 떠오르는 문장이 정답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확답을 내놓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이럴 때만 눈치가 없네.”

누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나는 어색한 웃음 소릴 냈다.

“너 보고 싶어서.”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발언이었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떠올린 정답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쑥스러움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쏟아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시간에 그 먼 데서 자전거를 타고 오면 위험하잖아요…….”

“걱정해주는 거야?”

즐거워하는 어조처럼 들렸다.

“…….”

불과 저번 달까지만 해도 당연하죠, 이랬을 텐데.

누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지금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요새 들어 좀 변한 것 같아.”

“제가요?”

검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누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응. 약간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야.”

“누나가 그렇게 말해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긴. 이런 건 본인은 느끼기 어려운 법이니까.”

누나가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 목표도 달성했으니 슬슬 돌아가 볼까.”

“금방 일어나네요?”

“그야, 누구 씨가 자꾸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하니까 말 들어야지.”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 누구 씨가 엄청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군요.”

“헐.”

누나가 실소하자 나도 따라서 픽 웃었다.

“그럼 이만 갈게.”

누나가 손을 살짝 흔들고 나서 자전거 핸들을 쥐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너도 조심해.”

누나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영재야. 내일 놀러 갈게.”

“내일도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하지만 누나는 대답 대신 자전거 페달을 굴려서 그대로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 * * *

일요일이 밝았다. 누나는 어젯밤에 예고한 대로 우리 집에 오겠다는 깨톡을 남겼다.

이 사실을 슬기에게 전해주었더니, 만세를 연발하며 방방 뛰어다녔다.

“와아! 또 언니랑 논다아!”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알았지?”

“응!”

슬기가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집 밖으로 나왔다. 아직 골목 지리가 익숙하지 않을 누나를 위한 맞춤 서비스였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누나의 모습을 목격했다. 양손에 불룩한 비닐봉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지아 누나!”

나는 얼른 다가가서 손을 거들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이게 다 뭐예요?”

질문을 던지면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과자, 페트병 등이 눈에 들어왔다.

“슬기가 좋아할 만한 것들.”

누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요 며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녜요?”

“전혀. 따로 모아둔 돈도 있으니까.”

누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표정이 왜 그래?”

그 지적에 나는 손으로 뺨을 만져보았는데 표정이 굳어있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얼른 얼굴을 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내가 해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네.”

그래도 여전히 내키지는 않았다.

우리가 집에 도착하자 슬기가 현관 앞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와아아. 언니!”

“슬기야아!”

누나가 봉투를 내려놓고 양팔을 벌렸다. 슬기는 얼른 누나에게 안겨들었다.

누가 보면 자매 상봉회인 줄 알겠군.

“우왕. 이게 다 뭐야?”

누나와의 포옹을 푼 슬기가 봉투 안을 들여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니가 힘 좀 썼지. 맘에 들어?”

“응!”

슬기가 고개를 아주 크게 움직였다. 그만큼 누나의 어깨가 위로 솟구쳤다.

찬밥 신세가 된 나는 봉투를 조용히 부엌으로 옮겼다.

“언니. 오늘은 뭐 하고 놀 거예요?”

아직도 현관 앞에서 저러고 있네.

“슬기야. 손님 계속 세워둘 거야?”

“아.”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양 슬기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언니, 미안해요…….”

슬기가 그제야 옆으로 비켜섰다. 누나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동생 너무 기 죽이면 못 써.”

누나가 이쪽을 바라보며 한 마디 쏘았다.

물론 가만히 듣고 있을 내가 아니지.

“그러다 버릇 잘못 들면 큰일 나요.”

“음. 그것도 그렇기는 한데…….”

누나가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무언가 반박은 하고 싶은데 그럴싸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슬기가 나를 향해 눈을 흘기더니 지아 누나의 팔에 매달렸다.

“언니, 언니. 울 오빠가 평소에 저한테 잔소리 엄청 많이 해요.”

“어머 그러니?”

“네.”

“야 너. 왜 갑자기 고자질해?”

따지고 들었지만 둘의 귀에는 조금도 닿지 못했다.

지아 누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슬기는 좋다고 머리를 맡기고 있었고.

내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누나.”

바투 다가가서 부르자 누나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집에서 놀 거예요?”

누나가 검지로 입술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음……. 오늘은 밖에서 놀까? 슬기랑 같이.”

“완전 좋아요!”

슬기가 곧장 호응했다.

“저도 찬성.”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나와 슬기가 앞다퉈 신발을 신었다.

나는 두 사람보다 느긋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미처 정리하지 못한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그것을 부엌으로 옮겼다.

가슴 속에 돌덩어리 하나가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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