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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화 〉 81화­누구에게나 있는 그림자(1) (81/131)

〈 81화 〉 81화­누구에게나 있는 그림자(1)

* * *

“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반문하고 말았다. 누나의 제안이 그만큼 뜻밖이었으니까.

“올 거야, 말 거야?”

지아 누나가 입꼬리를 슬며시 당겼다. 그런 뒤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릇에 음식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먹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와 윤희를 번갈아 바라보는 누나의 시선.

이렇게나 기쁜 권유를 두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꼭 가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원에서 고자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안 간다고 하리.

기회는 언제 또 올지 모르니 항상 붙잡아야 한다고 선현들이 누누이 강조하기도 했고.

“저도요!”

윤희의 우렁찬 대답.

지아 누나가 의외라는 듯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나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여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희가 벌렸던 입술을 서서히 닫고는 나와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의외였어?”

아까보다 한결 기세가 죽은 음성.

지아 누나가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네가 목청껏 대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말야.”

“아…….”

윤희가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지아 누나가 깍지를 풀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입술 사이로 입김을 흘려보냈다.

뭔가 분위기가 좀 묘해진 것 같은 느낌인데?

“뭐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네가 속을 좀 감추고 있다고 느꼈거든. 할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별로 안 하는 듯한? 그게 언제부터인가 깨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감추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어.”

윤희가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였다. 나는 다시 눈길을 돌려서 누나의 입술을 주시했다.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누구든 비밀 한두 가지쯤은 있는 법이잖아?”

“그렇죠…….”

윤희는 수년 간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상태다.

대관람차에서 나에게 변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부터 정말로 많이 변모했지만, 분명히 감추는 부분은 있었다.

내가 느꼈듯이 지아 누나도 느낀 것이다.

“아까 의외라고 여긴 건 다른 게 아냐. 네가 그 정도로 기대에 부푼 목소리를 내니까. 그간 봐온 너는 아무리 기대한다고 해도 강하게 대답하지 않았거든.”

“…….”

“우리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 주니까, 기뻐. 정말로.”

“언니…….”

말을 잇지 못하는 윤희.

“아이 참. 기쁘다고 한 마디 하려고 한 걸 이렇게 빙빙 돌아갈 줄은 몰랐는데…….”

지아 누나가 말괄량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쑥스러워하고 있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게 다가왔다.

“미안해 윤희야. 내가 말재간이 없어서. 아무튼 지금 기쁘다구. 알겠지?”

“물론이죠.”

윤희가 함박미소를 머금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그렸다.

“흐음. 우리 영재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뭐가요?”

갑자기 활시위를 나에게 조준하는 누나.

“언니, 감이 좋으시네요.”

윤희마저 나를 정조준했다.

“둘이서 갑자기 왜 그러시나.”

웃음으로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들어봐도 웃음소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래. 누구든 감추고 싶은 건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죠.”

다행히 두 사람은 금세 물러섰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다음 주 화요일 어때? 월수금 중에서 잡으면 영재가 언짢아할 것 같아서 일부러 피했어.”

지아 누나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저 그렇게까지 엄격한 사람은 아닌데요.”

“그럼 월요일에 볼까?”

“월요일이라…….”

나는 엄지로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스터디부 활동은 그만큼 중요하니까.

“언니. 이렇게 고민하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윤희가 고개를 가로젓는 기척이 느껴졌다.

“영재야. 그냥 싫다고 그래. 괜히 고민하는 척하지 말고.”

“음. 그럼 화요일에 가는 걸로 할게요.”

아무래도 유들유들한 부장이 되기에는 글른 모양이로군.

“어휴, 역시 공부벌레 아니랄까봐.”

지아 누나가 과장스레 한숨을 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저는 어느 때라도 좋으니까.”

“오늘따라 네가 천사 같아 보여.”

“기대하고 있어요. 정말로.”

두 사람은 눈웃음을 교환했다.

부쩍 줄어든 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 또한 마음이 편안해졌다.

“슬슬 일어날까? 나머지 사항은 깨톡으로 하면 되니까. 규원이한테도 얘기하고. 아마 좋아할 거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정리했다. 계산대 앞에서 누나가 지갑을 꺼냈다.

세종대왕님과 작별할 때가 되었구나.

나는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지갑에서 만원권 지폐를 꺼내들었다.

* * * *

약속 당일인 화요일이 찾아왔다.

우리는 지아 누나의 집으로 가기에 앞서 대형마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젯밤 누나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 때문이었다.

지아 :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하려고 햇는데 집에 재료가 없더라구.. 그래서 일단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사오려구 이참에 같이가서 살것도 고르자!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트로 향했다. 세 사람은 이미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왔어어.”

“오오 부장! 오랜만!”

규원이가 만개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원래라면 어제 스터디부에 왔어야 했지만, 다른 일 때문에 오지 못했다.

4일만에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윤희와 지아 누나도 정다운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좀, 까매진 것 같다?”

내 지적에 규원이는 곧장 침울한 눈을 했다.

“영재가 보기보다 예리하단 말야.”

지아 누나가 중얼거리듯이 툭 던졌다.

“으으. 안 그래도 피부색 진해서 고민이었는데……. 그놈의 햇볕이 문제야.”

“선크림 바르지 그랬어.”

옆에서 끼어든 윤희가 규원이의 팔뚝을 들어올렸다.

“금방 가라앉을 거야.”

“윤희야.”

규원이가 고개를 돌려 윤희와 마주보았다.

“응?”

“우리 피부색 바꾸자.”

규원이가 윤희의 양 손을 덥석 잡았다.

“얘는 갑자기 뭔 소리래.”

윤희가 스르륵 손을 빼냈다.

“아아아! 내 주변에는 왜 하얀 애들밖에 없는 거야. 지아 언니도 그렇고, 윤희 너랑, 도연이도 그렇고…….”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절규하던 규원이가 문득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 하얗지는, 않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틀어버리는 규원이.

“그래 내가 좀 까맣다. 됐냐?”

따져보았지만, 규원이는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모음 발성을 했다.

나는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엄마가 그랬다. 아빠도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었다고. 이건 100% 유전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지아 누나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영재야 괜찮아. 그만큼 햇볕에 강할 거 아냐.”

“누나. 그건 위로가 아녜요…….”

괜히 더 우울해졌다.

“저기, 이제 슬슬 안으로 들어가죠. 언니도 요리하려면 시간 많이 걸릴 텐데.”

“아냐.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스파게티할 거거든.”

지아 누나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규원아. 그만 하고 이리 와.”

불러보았지만 규원이는 여전히 귀를 막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 나서 규원이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왔다. 우리는 그제야 마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쇼핑카트 챙겨야겠네.”

“아, 윤희야. 내가 할게.”

동전지갑에서 기분 좋게 100원짜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럼 부탁할게.”

“크으. 영재가 엄청 오랜만에 남자다운 일을 하네.”

규원이는 감명 받은 얼굴을 한 채 양쪽 엄지를 들어올렸다.

“금방 올 테니까 기다려.”

계산대 옆쪽에 쇼핑카트가 모여 있었다. 그 중 하나를 빼낸 뒤 멤버들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쇼핑카트를 미는 내가 선두에 서고, 바로 옆에 윤희가 섰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는 바투 뒤따라오고.

지하로 내려가는 무빙워크에 올라섰다.

“언니, 언니. 스파게티 소스도 직접 만드는 거야?”

기대에 부푼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한테 그 정도 요리 실력은 없어. 너도 알면서.”

“난 또 언니가 나 몰래 연습이라도 한 줄 알았지.”

“아니면 제가 소스 만들까요?”

윤희가 둘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누나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할 줄 알아?”

“시간은 좀 걸리지만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윤희.

하긴 수제 쿠키도 만들 수 있는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윤희라면 확실히 가능하겠네.”

규원이도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아, 아냐. 초대 받은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

“그 정돈 괜찮은데…….”

“오늘 하루는 집 주인에게 맡겨둬! 맛은 좀 거시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누나가 해준 거라면 뭐든 잘 먹습니다!”

누나가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복 돋아 주었다.

“영재가 실망하지 않도록 오늘은 제대로 팔 걷어 붙여야겠네.”

지하층에 도착했다. 나는 쇼핑카트를 천천히 밀면서 식품 코너로 향했다.

“우왓! 메론 시식! 후딱 갔다 올게.”

규원이가 쌩하고 시식 코너로 달려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메론 두 조각을 삼켰다.

“쟨 나중에 밥도 먹을 거면서.”

윤희가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괜찮아. 저러고도 잘 먹어.”

지아 누나는 가볍게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우리는 스파게티에 필요한 재료 외에도 후식으로 먹을 간식도 쇼핑 카트에 담았다.

규원이는 시식 코너가 보일 때마다 달려가기 바빴고. 누가 보면 걸신들린 줄 알겠네.

윤희는 진즉에 포기했는지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누나는 재밌다는 듯이 웃기만 했고.

쇼핑을 마친 우리는 1층 계산대로 다시 올라왔다.

“저, 언니. 잠깐만 2층에 갔다 와도 되나요?”

“왜?”

지아 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 좋아하는 작가분의 신간이 나왔다고 했는데 확인만 해보려고요. 먼저 계산하고 있으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윤희가 무빙워크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갔다.

“아! 나는 이어폰 사야 하는데. 언니이. 나도 빨리 돌아올게.”

“그래. 알았어.”

누나가 어서 올라가보라고 손짓하자 규원이도 윤희의 뒤를 쫓아 달렸다.

“윤희야아! 같이 가아!”

윤희가 꽤 민망하겠구만.

누나는 규원이의 뒷모습에 눈길을 고정한 채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규원이 보는 맛에 산다니깐.”

“그 맘 알 것 같아요.”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 누나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카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런 것도 좋네.”

“그러게요.”

우리는 대기 줄이 가장 짧은 곳으로 카트를 밀었다.

* * * *

“여기야.”

누나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참고로 짐은 가위바위보에서 진 나와 규원이가 옮겼다. 더운 날에 무거운 걸 들고 다니려니 정말 죽을 맛이다.

“다들 덥지? 에어컨 켤게.”

“언니이. 짐은 싱크대 앞에 놓을게.”

“부탁할게.”

지아 누나가 에어컨을 켜는 사이, 나와 규원이는 부엌으로 향했다. 우리는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간신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낼 수 있었다.

“어우, 이제야 좀 살겠다.”

그러면서 규원이가 자신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좀 두드려 줘?”

내가 주먹을 들어 올렸더니 규원이가 도리질을 했다. 그러고는 후다닥 다른 방으로 피신했다.

나는 피식거리며 웃다가 거실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윤희가 거실 한가운데서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네 집만큼 좋지는 않아.”

지아 누나의 말에 윤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맘에 들어요.”

그때 윤희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유, 윤희야?”

지아 누나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고, 나도 당황하여 후다닥 뛰어갔다.

“아, 아니. 이건 그…….”

윤희가 더 이상 문장을 이어가지 못하고 코를 훌쩍였다.

“뭐야? 무슨 일 있어?”

규원이가 방에서 나왔다.

“윤희야. 이리 와.”

지아 누나가 팔을 벌려 품을 내어 주자 윤희가 몸을 기댔다.

“사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친구 집에 와본 적이 없어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음을 삼키느라 윤희는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지아 누나는 말없이 윤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울지 마! 울지 마!”

규원이는 규원이 나름대로 윤희를 달래느라 애를 썼다.

“이제 우리가 있으니까.”

나도 조심스럽게 윤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응.”

윤희가 소매로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자주 놀러 와.”

“네.”

지아 누나가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지아 누나와 규원이도 윤희의 사정이 어땠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윤희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을 열어젖힌 것일지도 모른다.

3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윤희는 그렇게 착실히 자신의 껍질을 깨부수어 나갔다.

* * * *

일련의 소동은 윤희가 세수를 하러 가면서 간신히 일단락되었다.

지아 누나는 곧바로 스파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우리 셋은 규원이가 가져온 게임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스파게티가 완성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언니!”

“맛있게들 먹어. 소스는 비록 산 거지만.”

포크에 면을 둘둘 말아서 입 속에 넣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이 상당히 좋았다.

“누나. 진짜 맛있어요!”

“고마워.”

지아 누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모두들 스파게티 접시를 말끔하게 비웠을 때 지아 누나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아! 나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내가 제일 먼저 흥미를 보였다.

“기대되네요.”

“오오? 뭐길래?”

윤희와 규원이도 기대감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잠깐만 기다려 줘.”

지아 누나는 그 길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략 5분 정도가 지났을 쯤 문이 서서히 열렸다.

“짠!”

지아 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타드를 입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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