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82화누구에게나 있는 그림자(2)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혹시나 하여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는데 시야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지아 누나는 그 앞에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레오타드를 입은 채로.
꿈이 아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어때? 잘 어울려?”
지아 누나가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멀리서 보아도 윤기 넘치는 베이지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날리 듯 찰랑거리더니 어깨에 사뿐히 착지.
연분홍빛 레오타드는 누나의 몸매를 더 늘씬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각선미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발레용 하얀 스타킹과 발을 살포시 감싸는 형태를 한 토슈즈.
“원래 내가 발레용 치마는 안 입는데 오늘은 왠지 민망해서…….”
누나가 면사포처럼 생긴 회색 치마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쑥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 모습조차도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역시 누나는 무슨 복장이든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재능이 있다.
“언니. 그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규원이의 음성에는 감격이 묻어나왔다.
“와아. 평소보다 더 예뻐요.”
웬만하면 감탄하지 않는 윤희조차도 이번에는 감탄사를 활용하며 누나를 칭찬했다.
“영재 넌?”
지아 누나의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너무 오랫동안 넋을 놓았구만.
“발레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최고입니다!”
말만으로는 부족하였기에 박수까지 곁들였다. 지아 누나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다들 어울린다고 해주니까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네.”
“어?”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규원이. 그러더니 지아 누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왜 그래 규원아?”
“잠시마안.”
규원이가 목울대를 울리며 레오타드를 이리저리 살폈다. 양손으로 누나의 옆구리를 쓰다듬고, 치마를 들춰보기도 했다.
“규, 규원아?”
지아 누나가 당황해도 규원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러운 녀석……, 이라는 생각이 솟아오르려는 것을 황급히 억눌렀다.
“언니, 이거 새로 산 거지? 저번에는 못 본 거 같아서.”
규원이가 고개를 들고서 발랄한 투로 물음표를 던졌다.
“맞긴 한데……. 그거 확인하려고 그랬던 거야?”
“응.”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고 지아 누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어휴. 갑자기 왜 이러나 했다니깐.”
“뭐 어때, 우리 사이에. 근데 언니, 나 좀 대단하지 않아? 바로 알아봤잖아.”
규원이가 팔짱을 낀 채 어깨를 폈다.
“넌 레오타드 많이 봤잖아. 그 정돈 당연하지.”
“후후, 그래도 내 눈썰미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런 걸 두고 자화자찬이라고 하는 거겠지?
“그래그래. 참 잘했어.”
지아 누나가 마지못해 규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규원이는 한층 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턱을 들고 나와 윤희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사진 찍고 싶은 사람은 지금이 기회야.”
“네, 그럼 감사히…….”
“잠깐!”
옆에서 윤희가 내 스마트폰을 붙잡았다.
아니, 이 중요한 순간에 방해 공작을 펼치다니.
나는 윤희를 흘겨보았다. 윤희도 지지 않고 이쪽을 쏘아보았다.
“윤희야 왜 그래. 영재가 찍고 싶어 하잖아.”
누나, 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윤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보기 드문 강한 표현이었다.
“영재가 어디에 쓸지 모르잖아요!”
“쓴다고? 어디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규원이.
“무슨 생각하는 거야?”
반문하면서 윤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아 누나는 턱을 손으로 받친 자세로 윤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거 있잖아. 그거……. 그…….”
나를 똑바로 응시하던 시선이 방황하기 시작하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누나가 입을 살짝 가린 채 눈썹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쪽도 눈치챘구만.
허리를 수그린 누나가 윤희의 관자놀이를 보았다.
“윤희야. 무슨 생각했어?”
그 목소리는 나긋하면서도 놀리는 느낌이 다분했다.
“…….”
자신의 배꼽으로 시선을 내리는 윤희.
“진짜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아무리 봐도 다 알고 있는 말투인데요.
그때 옆에서 규원이가 손뼉을 쳤다.
“아! 알았다! 자ㅇ, 읍읍.”
나는 얼른 규원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덕분에 위험한(?) 단어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쉿! 조용히.”
나는 반대쪽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규원이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여전히 일언반구도 하지 못하는 윤희. 그러자 지아 누나가 나에게로 눈길을 들었다.
“영재야. 내 사진 찍어서 어디에 쓸 거야?”
“저는 폰 배경 화면이나 아니면 깨톡 배경에 쓸 생각이었죠.”
그 외의 용도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떳떳했다. 그리고 사진보다는 역시 영상 쪽이……. 여기까지만 말하는 걸로.
지아 누나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난 사실 내 사진을 어떻게 쓰든 크게 신경 안 써. 초상권만 지켜준다면야.”
그러고 나서 턱을 살짝 들고 한 손은 가슴께에, 다른 한 손은 무언가를 떠받치는 모양새로 들어 올려 포즈를 잡았다.
“찍어도 돼.”
그 말에 윤희도 반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찰칵.
셔터음이 한 번 울리더니 지아 누나의 아름다운 모습이 화면 속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나는 뭐 자주 봐왔으니까.”
규원이는 깍지 낀 손을 머리에 올려놓은 채 여유를 부렸다.
나는 지아 누나의 사진을 한동안 감상한 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흘깃거리는 윤희의 시선이 어쩐지 따끔거렸다.
“그런데 누나. 무슨 일로 레오타드를 입은 거예요?”
“윤희가 울어서 그랬어.”
“네?”
윤희가 놀라서 반문했다.
“음?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규원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아 누나가 윤희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우리에게 다 얘기해 주었잖아. 그간 감춰왔던 속사정을. 그래서 나도 얘기하려고. 이게 공평하지 않겠어?”
“언니,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내가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윤희의 만류에도 누나의 태도는 완강했다.
“일단 다들 식탁에 앉자.”
우리는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에 착석한 누나가 숨을 한 번 고른 뒤 입술을 열었다.
“윤희 너는 내가 발레를 했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을 거야.”
윤희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처음부터 발레를 좋아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시작했었고, 그때는 그냥 부모님이 보내주니까 다닌다는 느낌이 더 컸거든. 발레를 시작한 계기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습다.”
지아 누나의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무엇 때문이었어요?”
“키 크라고. 내가 어릴 땐 또래들보다 키가 작았거든. 지금은 평균 키 정도 되니까 효과가 있기는 했나 봐.”
내 호기심을 해결해 준 누나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 나를 가르쳐주신 강사님께서 참 아름다웠는데. 항상 무슨 동작을 하든 우아했거든. 나는 어느 순간 그걸 동경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집에 돌아오면 항상 그 날 배운 동작을 열심히 연습했어.”
계속 연습을 하다 보니 동작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강사의 예쁨도 받았다고 뒷말을 덧붙였다.
“어느 순간을 지나니까 또래들 중에서 나보다 잘하는 애가 없을 정도가 되었어. 그렇게 되니 발레가 점점 더 좋아지게 되고, 더욱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 거야. 그 강사님도 엄마가 학원에 들를 때마다 나에게서 재능이 보인다고 치켜세워 주고.”
그때부터 지아 누나는 주말만 되면 부모님과 함께 발레 공연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당시에 겨우 초등학생 저학년이었지만 이미 발레 경력이 3년에 가까웠다고.
“정말 엄청 많이 보러 다녔는데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공연이 하나 있어. 아마 너희들도 제목을 들어봤을 거야. 라고.”
“어? 나도 어릴 때 같이 보러 갔던 거잖아.”
“응. 그거. 기억하고 있구나.”
“당연하지. 나도 우와, 우와 하면서 봤으니까.”
규원이의 표현이 재밌었는지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 공연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가 혼자 발레를 하는 부분이 있었거든. 그때 그 분이 보여준 동작은, 황홀했어.”
지아 누나의 눈이 잠시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 셋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지아 누나에게 집중했다.
“아무튼 그때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할까. 나도 저런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꿈꿨어.”
세계적인 발레리나를 목표로 삼은 이후로 지아 누나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발레에 매진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함께 발레를 배우던 친구들이 하나둘 학업을 위해 학원을 떠났다.
하지만 지아 누나에게는 학업보다 발레 우선이었다.
“이 문제로 부모님하고 몇 차례 다투곤 했어. 결국에는 내가 이기긴 했지만. 그때 강사님도 설득에 힘써주셨고. 그러면서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시더라. 대회에 나가서 실적을 만들어 보자고.”
그리하여 지아 누나는 발레와 무용 대회가 나오는 족족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첫 대회에서 은상.
두 번째는 금상.
세 번째는 최우수상.
한 마디로 정리해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아 누나의 부모님도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지. 발레에 대한 자신감도 넘쳤고. 그래도 우쭐해져서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아 누나가 입술을 굳게 다물자 이마에 드리운 그늘이 보였다. 누나는 짤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는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땐 전국구 대회를 앞둔 때였어. 목표는 뭐, 당연히 최우수상이었고. 그래서 학교 갔다 오면 곧장 학원으로 달려가서 밤늦게까지 연습했거든. 근데 내가 욕심을 좀 부린 거야. 고난도 턴을 성공해서 가산점을 더 따고 싶어진 거지. 그 동작을 할 때 착지는 항상 왼발로 하고…….”
그것이 화근이었다.
무리한 연습을 계속하다가 누나는 결국 발목 인대를 크게 다친 것이다.
그날 밤 곧장 부모님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결과, 인대 외에도 발목 관절 자체도 좋지 않다는 진단을 들었다.
“무리한 동작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하지만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꿈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깁스를 풀고 다시 발레 연습으로 복귀했어. 근데 이전처럼 고난도 동작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반년이나 걸렸고…….”
입가에 쓴 웃음이 걸렸다.
지아 누나는 그렇게 발레리나의 꿈을 접게 되었다는 말을 이어 붙였다.
“그로부터 1년 넘게 좀 방황하고 있었어. 일탈은 하지 않았지만, 공부가 손에 안 잡혔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발레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아있었거든. 그래서 규원이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고, 스터디부에 들어갔다고 얘기했을 때는 솔직히 꽤 놀랐어. 왜냐면 규원이는 나보다도 더 공부랑 거리가 먼 애였으니까.”
누나의 눈길이 규원이를 향했다.
규원이가 웬일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너희들끼리 싸웠을 때 말야……. 아, 이런 얘기 꺼내도 괜찮을까?”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이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윤희가 옆에서 고갯짓을 했다.
“그게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어. 물론 너희에겐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을 테지만. 아무튼, 너희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까, 너희들처럼 무언가에 다시 매진해보고 싶어졌거든. 이번에는 그게 공부였고 그래서 스터디부에 들어온 거야. 덕분에 지금은 방황하던 마음도 어느 정도 갈무리되었고.”
누나의 눈길이 이번에는 나에게로 옮겨왔다.
“난 스터디드림이 무척 좋아. 마음에 들어.”
“누나에게는 다행, 인 거죠?”
조심스레 묻자,
“물론.”
시원스런 긍정이 되돌아왔다.
“저도 스터디드림이 좋아요. 우리들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나도 좋아! 여기서만큼 공부가 잘되는 곳이 없거든!”
윤희와 규원이도 덩달아 한 마디씩 던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스터디부가 좋아.”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얘기가 너무 길었지?”
“아뇨. 큰 맘 먹고 얘기하신 건데, 열심히 들어야죠.”
윤희가 선수를 쳤다.
“저는 정말 흥미롭게 들었어요.”
“내 아픈 과거인데?”
“아앗, 그게…….”
할 말이 없어서 볼을 긁적이자 누나가 풉, 하고 웃었다.
“아냐. 그냥 한 말이야. 진지하게 들어줘서 고마워.”
지아 누나가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느 때보다도 후련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기분 탓만이 아닐 것이다.
* * * *
얘기를 마친 뒤 우리는 과자와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아 누나는 레오타드를 계속 착용하고 있는 게 부끄럽다면서 도중에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컴퓨터로 배탈그라운드를 즐겼더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오늘 즐거웠어! 조심히들 들어가!”
“바이바이!”
규원이와 지아 누나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 로비를 나섰다.
우리는 한동안 묵묵히 발을 맞추어 걸었다. 그러다가 윤희가 도중에 발걸음을 멈췄다.
“영재야.”
“응?”
나 또한 그 자리에 서서 윤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윤희의 눈빛이 평소보다도 진중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