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80화방학에는 조금 색다른 자극을!(3)
* * *
그날 저녁, 슬기와 저녁을 먹고 있는 와중에 스마트폰이 울렸는데, 깨톡 알림음이었다.
윤희 : 이번 주 토요일에 다 같이 연극 보러 가요.
윤희 : 참고로 관람비는 제가 지불할 거니까 걱정 마시구요!
“오빠.”
“응?”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슬기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어?”
“아. 친구들하고 얘기하느라 그래.”
“뭔데? 나도 좀 보자.”
슬기가 나에게 팔을 뻗었다.
“야. 이거 프라이버시야. 프라이버시 몰라?”
“몰라! 영어는 어렵단 말야.”
당당하게 소리치더니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는 슬기.
“사생활이라고. 알겠어?”
“아하.”
그제야 슬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다시 액정을 시선을 내렸다. 그 사이 채팅이 몇 개 더 올라와 있었다.
지아 : 표가 얼만데?
윤희 : 학생은 1만원이면 볼 수 있어요.
규원 : 허러럴.. 영화랑 가격같은거 실화?
확실히 규원이의 지적대로였다. 영화표도 요새 1만원 정도 하니까.
나 : 나는 이미 간다고 얘기했어
지아 : 나랑 규원이 없는사이에 그런 얘길 했었구나?
지아 누나의 채팅이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윤희 : 음... 기왕이면 다 같이 관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윤희는 무난한 답변을 적었다.
지아 : 아항
나 : 누나도 갈 거죠?
지아 : 표값도 내준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ㅎㅎ
지아 누나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아직 대답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규원이뿐.
윤희 : 규원아. 너는?
규원 : 나는.... 못가 ㅜㅜㅜㅜㅜㅜㅜ 이번주 주말에 갑자기 1박2일로 경주 내려가자고 해서...
지아 : 아... 아쉽 ㅎㅎㅎ 잘 갔다와~
나 : 잘 놀다와~
그런 와중에 윤희는 갑자기 부러운 감정을 표출했다.
윤희 : 경주... 부럽다.
수학여행 설문조사 때 경주를 고집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아. 밥 식겠어.”
“처음부터 차가웠는데 뭘.”
“스마트폰……. 진짜 재밌나 보네.”
슬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깨톡 화면을 계속 응시했다.
규원 : 흐어엉~ 거기 놀것도 없는데 머하면서 시간보내ㅠㅠㅠㅠㅠㅠㅠ
윤희 : 아냐. 볼 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불국사에, 보문단지에, 박물관 등등. 막상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야.
지아 : 윤희 너 이참에 경주 홍보 담당 한 번 지원해봐ㅎㅎㅎ
지아 누나의 메신저를 보며 또 한 번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잠깐만 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었다. 앞으로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판을 두드렸다.
나 : 그럼 3명으로 확정이네 나는 이만 밥먹으러 ㅂㅂ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깨톡 알림음이 몇 차례 더 울렸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오빠. 나 그걸로 게임해도 돼?”
밥그릇을 다 비운 슬기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참고로 슬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게임은, 나도 이름을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앵그리 벌이다.
“내가 밥 다 먹을 때까지만이야. 그리고 깨톡 보지 말고.”
나는 주의사항과 함께 슬기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슬기는 활짝 웃음꽃이 핀 얼굴로 스마트폰을 받았다.
그러더니 만세 포즈를 한 채 거실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언젠가 슬기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친구들도 요새는 다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고.
내가 대학생이 되면 꼭 슬기에게 스마트폰을 마련해줘야지.
새로이 다짐하면서 나는 수저를 들었다.
* * * *
토요일.
연극을 보기로 약속한 날.
버스에서 하차한 뒤 약속장소인 소극장으로 향했다. 윤희와 지아 누나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내가 늦게 온 건가?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서 도착했는데.
대체 이 두 사람은 언제부터 기다렸던 걸까.
의문을 잠시 뒤로 미뤄놓고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둘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저 왔어요.”
정답게 인사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시간 딱 맞춰 나왔구나.”
윤희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영재 안녕? 오늘은 평소보다 멋 부리고 나왔네.”
“멋, 부렸다고요?”
나는 시선을 내려서 옷차림을 살폈다.
어디서나 볼 법한 까만색 반팔 티셔츠에 산 지 4년이 다 되어 가는 베이지색 면바지. 거기에 항상 신고 다니는 운동화.
“어디가요?”
“영재야.”
“네.”
“사실은, 그냥 네가 멋지게 보인다는 의미였어.”
“…….”
진지해 보이는 지아 누나의 표정.
나는 지아 누나를 계속 응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아 누나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역시나. 농담이었네요.”
“앗! 거의 속여 넘길 뻔했는데.”
지아 누나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누나. 사람은 깨우치는 동물이에요. 한두 번 속지, 그 다음은 절대로 안 속아요.”
“정말로?”
누나의 어투는 내가 허세를 부리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쪽에 가까웠다.
“다음에 속으면 손에 장 지질 거예요.”
“정말로? 내 귀에 녹음했어.”
지아 누나가 자신의 귀를 톡톡 건드렸다.
옆에서 윤희가 목을 가다듬는 소릴 내었다.
“좀 있으면 연극 시작하니까 안으로 들어가요.”
윤희가 소극장 출입구를 가리키더니 앞서 걸어갔다.
“진짜로 녹음했어.”
지아 누나가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인 뒤 윤희를 뒤따라갔다.
우리 셋은 소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소극장이라는 이름처럼 내부도 좁은 편이었다. 매표소도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윤희는 매표소 앞으로 다가가서 직원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고등학생 3명요.”
“학생증 보여 주세요.”
직원의 요구에 윤희가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학생증을 꺼내서 윤희에게 넘겨주었다.
“합 30,000원입니다.”
윤희가 지갑에서 만원권 3장을 꺼내서 직원에게 내밀었다.
나는 매표소 벽면에 붙어있는 요금표를 확인했다.
학생은 만원에 성인은 2만원이었다. 성인이 되면 연극은 못 볼지도 모르겠군…….
“다 됐어.”
윤희가 돌아서서 우리에게 학생증과 표를 건넸다.
“슬슬 자리 잡아야겠네. 들어가자.”
나와 누나는 앞장선 윤희를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관객석과 무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대에는 어둠이 내리깔려 있는 반면, 관객석은 밝았다. 그런데 등받이도 없는 좌석이라 좀 아쉬웠다.
“여기가 좋겠다.”
나는 두 번째 줄에 자리를 잡았다.
윤희와 지아 누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일순 멈칫했다. 그러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저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래?
둘은 무언가 합의를 나눴는지 서로를 마주본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영재야. 누난 왼쪽에 앉을게.”
“나는 오른쪽.”
그리하여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굳이 반응하지 않도록 하자.
다른 관객들도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 그래도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다.
뒤편에서 음향과 조명 테스트를 한다는 안내 멘트가 울리더니, 스피커에서 온갖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을 밝혔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흰색, 초록색, 파란색, 주황색 조명이 시야를 자극했다. 그때마다 어둠에 잠겨 있던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된다. 그치?”
주변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지아 누나의 나직한 목소리.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어둠을 몰아내는 주황빛 조명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밝게 빛나는 누나의 얼굴에는 기대에 들뜬 표정이 어려 있었다.
눈길을 슬쩍 내리 깔자 허벅지에 반듯하게 올려놓은 손이 보였다.
손등마저 새하얗다고 여기는 순간 조명이 꺼졌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누나.”
암전 속에서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윽고 흰색 조명이 무대를 비추었다.
마루 바닥을 디디는 발소리가 울리더니 이윽고 무대 위로 배우가 등장했다.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반갑습니다, 여러분!”
배우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 * * *
연극이 끝난 이후 우리들은 소극장 밖으로 나왔다.
“어땠어?”
윤희가 우리들의 감상을 물었다.
“완전 최고였어! 다음에 규원이랑 같이 와보고 싶은 걸?”
지아 누나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도 진짜 색다른 경험이었어. 재미도 있었고.”
“만족했다고 하니 다행이네.”
윤희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야 만족스러울 수밖에.
배우들의 연기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정말 대단했다. 손짓과 발짓,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무대를 가득 채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성량에서 뽑아내는 대사도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우스꽝스러운 대사에서는 모두가 하나 되어 배꼽을 잡았고.
클라이막스에서 치닫는 감정선에 몰입하는 경험도 색달랐다.
영화를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
윤희가 소개해 주지 않았더라면 평생 해보지 못했을 경험, 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그게 제일 웃겼어. 무대에 관객들이 불려 나와서 막춤 췄을 때.”
지아 누나가 그러면서 나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아, 언니도요?”
윤희는 아예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 얘긴 좀…….”
하지만 두 여자는 끈질겼다.
“3명 중에서 네가 제일 잘 추더라.”
“차라리 놀리세요…….”
그러자 지아 누나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어젖혔다. 윤희도 웃음 바이러스에 전염된 마냥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무대로 나가 막춤을 추게 된 사연은 이렇다.
우스꽝스런 대사와 몸짓에서 자지러지게 웃다가 배우의 눈에 들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하필 무대로 올라올 때 배우가 나를 이상하게 소개했다.
“여기 학생은 오늘 여자 친구 두 명과 함께 왔습니다! 남자들의 적이에요, 적!”
관객석에서 쏟아지는 야유.
그런 와중에 지아 누나는 두 팔을 흔들어대고…….
정신을 차려보니 흥겨운 노래에 맞춰 막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 웃는 거 아녜요?”
따지자 두 사람이 그제야 웃음을 거두었다.
“그래도 사은품 하나 받았잖아. 부끄러움을 무릎 쓴 보람은 있었을 것 같아.”
윤희가 검지로 하얀 종이백을 가리켰다.
나는 종이백을 벌려서 안에 든 것을 확인해 보았다.
“과자세트네.”
“어디 보자.”
지아 누나가 바투 다가왔고 뒤이어 윤희도 구경하러 왔다.
“괜찮네, 뭘.”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해요.”
아마 슬기에게 갖다 주면 신나서 방방 뛸 것이다.
다시 나란히 선 우리.
옆에서 윤희가 짤막한 한숨을 길바닥에 내던졌다.
“아깝다. 촬영 금지만 아니었어도 막춤 추는 장면 찍었을 텐데.”
“야.”
눈을 흘겼지만 윤희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게 말야. 찍어서 톡방에 공유하고 싶었는데.”
“누나!”
소리쳐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두 여자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웃음을 터뜨렸으니까.
“벌써 점심 시간 지났네요.”
웃음을 그친 윤희가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출출하던 참인데, 밥 먹으러 가자.”
지아 누나의 말에 우리는 동의를 표했다.
“표는 네가 샀으니까 이번엔 나랑 영재가 살게.”
어깨에 힘이 빠지게 하는 소리였다.
* * * *
우리들은 근처에 있는 중식당에 들어갔다. 점심때를 넘긴 탓인지 가게 안이 한산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빠르게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메뉴판에서 보았던 가격들을 상기하며 머릿속으로 암산해 보았다.
현재 가진 돈은 14,750원. 방금 주문한 음식의 총합은 2만원.
지아 누나와 내가 만원씩 내면 되는군.
그래도 예산을 초과하지 않아서 속으로 안도했다.
먹음직스런 음식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다들 허기가 진 탓에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했다.
“음. 괜찮네.”
지아 누나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컵을 쥐었다.
“뭔가 너네랑 다른 것도 더 해보고 싶은데 말이지. 답례를 하고픈 마음도 있고.”
“답례라뇨?”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되물었다.
“너희들하고 같이 공부하거나 어디 놀러가거나 하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거기에 대한 답례라고 할까…….”
머쓱했는지 누나가 귀밑머리를 매만졌다.
“아녜요. 이걸로도 충분한 걸요.”
윤희가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아 누나는 그러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뭐가 좋을까…….”
“우선 다 먹고 생각하는 게 어때요? 면 불겠어요.”
윤희가 지적해도 누나의 손은 젓가락을 잡지 않았다.
“음…….”
누나가 물컵을 쥐었다. 그리고 컵 표면에 맺힌 이슬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좀처럼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얼굴.
윤희가 어떡할 거냐면서 시선을 보내왔다. 그렇게 한들, 나도 뾰족한 수가 없는데…….
묵묵히 음식을 넘기자니 그건 아닌 듯하고.
“아!”
지아 누나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하자.”
누나의 표정은 마치 득도한 신도와 같았다.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잘 대접해 줄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