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화-열탕을 지나 냉탕(1)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슬기가 나를 향해 외쳤다.
“오빠! 오늘 저녁은 뭐야?”
“멸치볶음이랑 미역국!”
나 또한 외침으로 답해주었다.
나는 저녁상을 차린 뒤 밥상을 들고 거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옆으로 누워있던 슬기가 곧장 자세를 바로했다.
“네가 상전이야?”
“헤헤.”
우리는 마주 앉아서말없이 숟가락을 움직였다. 최근 들어 얘기할 만한 화제가 없어서 그렇다.
한참 밥그릇을 비워나가던 중 슬기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오빠. 요새 무슨 일 있어?”
“응?”
딱딱한 멸치를 우적우적 씹다 말고 슬기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 있어 보여서.”
“뜬금없게.”
나는 가벼운 실소를 흘렸고, 밥 덩어리를 삼킨 슬기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오빠 밥 먹을 때 이렇게 조용한 사람 아니잖아.”
“원래 말 많이 안 했는데?”
“아냐 아냐. 오빠가 얼마나 시끄러운데. 맨날 앵무새처럼 숙제, 숙제 노랠 불렀잖아.”
나는 엄지로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숙제 얘기라면, 굳이 밥 먹을 때가 아니어도 자주 했는데?”
나의 반박에 천장으로 시선을 던지는 슬기. 기억을 더듬어 보는 모양이었다.
“……그렇네?”
슬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오늘 숙제는?”
“오늘은 없지롱!”
슬기가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처음 공격은 방어. 하지만 과연 두 번째 공격은 받아낼 수 있을까?
“그럼, 중간고사 준비는 잘하고 있어?”
웃는 낯으로, 그리고 밝은 톤으로 질문.
“어, 어? 중간, 고사?”
슬기가 얼빠진 표정을 했다. 이윽고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는 눈동자.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슬기야. 너네 중간고사 언제부터야?”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우러나온 질문.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교 5학년씩이나 됐는데 기본적인 학사일정도 모르고 있을 리가.
“어……. 5월, 부터였나?”
슬기의 눈길이 다시금 천장에 매달렸다.
미안하다. 오빠가 너무 큰 기대를 했구나.
공부 현황은 안 봐도 비디오겠고.
“그 정돈 기억하고 있어야지. 내일이라도 친구한테 물어봐.”
“응.”
슬기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멈췄던 숟가락질을 재개하려는 찰나, 슬기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참! 오빠. 내 질문에도 대답해야지.”
“어떤 거?”
“요새 무슨 일 있냐구.”
잠깐 뜸을 들이다가 적당한 답안을 골랐다.
“아니. 별일 없어.”
그러고 나서 미역국을 후루룩 삼켰다.
“그럼 말구.”
슬기는 싱거운 반응을 내보이는 정도로 그쳤는데, 나에게는 그편이 오히려 더 좋았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기분이 언짢으니까.
남에게 떠벌리기 창피하기도 하고.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충전기에 연결해놓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액정을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나 메시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나는 키패드를 조작하여 규원이가 보낸 메시지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스터디부 그만둘게…….”
가라앉은 어조로 메시지의 내용을 한 글자씩 따라 읊었다.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메시지를 받은 지도 어느덧 3일째.
우리들은 여전히 냉전 상태였다.
* * * *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중간고사까지 앞으로 일주일 남짓 남아서 그런지 선생님들이 좀 더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게다가 수업 시간에 조는 애들 숫자도 부쩍 줄어들었고.
중간고사가 지닌 무게감이 그만큼이나 큰 것이다.
한참 칠판을 응시하고 있다가 규원이의 뒤퉁수를 힐끗 쳐다봤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마냥 위아래로 건들거리는 고개.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속담은 정말로 틀린 말이 없구만.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서 다시 칠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업이 끝나자 책상과 한 몸이 되어 잠에 빠져드는 애들이 많아졌다. 그런 와중에 규원이는 주변에 있는 애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마 애들은 모르겠지. 저번 주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규원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오버하고, 쓸데없이 기운 넘치고, 수다 떨며 놀기를 좋아하는 평소의 모습이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요 3일 내 단 한 번도 나와 윤희의 자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것.
헛소문을 퍼뜨렸을 때도, 스터디부에 들어오고 싶어 했을 때도, 스터디부에 들어오고 나서도 수시로 우리들 자리에 찾아오곤 했었는데.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하긴, 그 정도로 크게 싸우고 뺨까지 맞았는데 웃는 얼굴로 마주하기는 어렵지. 부처나 예수라도 되지 않는 이상.
나와 윤희, 그리고 규원이 사이에 흐르는 이상 기류를 몇몇 애들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대놓고 호기심을 내비치는 애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고 느낀 걸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진 탓인지, 노트에 적힌 내용이 머리에 입력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고개를 들고 빈 칠판을 응시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잘못은 전적으로 저쪽에게 있으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대로 지내도, 괜찮은 걸까?
윤희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고개를 살짝 내리깐 채 시집을 보고 있던 윤희가 이쪽을 쳐다봤다.
“왜 그래?”
“아냐. 그냥…….”
윤희는 고개를 한 차례 갸웃거리고는 금세 나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지금 이 상태로 괜찮냐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윤희의 어조가 평온하고 담담했으니까.
쉽지 않겠군.
* * * *
점심시간이 찾아오자 급식실을 향해 뛰쳐나가는 애들. 그 무리 속에는 당연히 규원이도 섞여 있었다.
윤희는 시집을 보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교실 뒷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점심밥을 먹으러 가는 기색은 확실히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애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물어볼까?
윤희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보려는 와중에,
“영재야.”
도연이의 명랑한 음성이 내 이름을 호출했다. 그러고는 내 책상에 양손을 올렸다.
“웬일이야?”
밝게 응대하면서 펼쳐둔 노트를 덮었다.
도연이는 일부러 목을 길게 빼더니 교실 뒷문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아까 윤희의 뒷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데. 그렇게 좋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어라? 찔리나 봐?”
도연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윽한 눈길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괜찮아. 여기 우리 말곤 없으니까.”
교실을 둘러보니 진짜로 우리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윽하게 바라본 게 아니라, 그냥 어디 가나 궁금해서 쳐다본 거야.”
솔직히 내가 들어봐도 변명조에 가까웠지만 말하는 편이 좋다. 가능한 오해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지.
“일편단심이 좋기는 한데, 생채기 나는 사람도 있을 걸?”
“일편단심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어깨를 한 차례 움직였다.
도연이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진짜로 무슨 볼일이야?
물어보자 도연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영재야. 점심 아직 안 먹었지?”
“응. 그렇긴 한데.”
“잘됐네. 나도 아직 안 먹었거든. 같이 급식실 가자.”
나는 넌지시 물었다.
“……할 얘기가 있는 거지?”
“눈치 빠르네.”
싱긋 미소 짓는 도연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연이와 함께 교실 뒷문을 나섰다. 계단 앞에 도달했을 때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던 윤희와 마주쳤다.
도연이가 먼저 손을 들어서 인사했다. 윤희 역시 손을 들어 화답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냥. 잠깐 들를 곳이 있었어.”
도연이의 물음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윤희.
“윤희야. 이참에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윤희는 나와 도연이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지금은 밥 생각이 없어서.”
“그렇구나. 아쉽네.”
도연이가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둘이 얘기 잘해.”
윤희는 그 말을 남긴 채 교실로 돌아갔다.
우리는 급식실로 향했다. 애들이 거의 없어서 금방 배식을 받을 수 있었다.
“저기로 가자.”
도연이가 가리키는 곳은 애들이 없는 구석진 자리였다. 우리는 마주 보는 형태로 의자에 앉았다.
도연이는 수저를 들기도 전에 도입부를 꺼냈다.
“최근에 너네들 무슨 일 있었지?”
확신에 차 있는 말투.
도연이가 말하는 ‘너네’는 당연히 우리 스터디그룹.
나는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번 주 들어서 규원이가 네 자리로 가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전에는 안 그랬으니까. 싸우기라도 한 거야?”
“역시 티가 나는구나.”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자조할 때 튀어나오는 쓴웃음과 같았다.
“다들 눈치야 진즉에 챘지만……. 윤희도 얽혀있는 것 같으니까 조심스러워하고 있었거든.”
윤희야. 넌 이제 반에서 어엿한 요주의 인물이 되었구나.
하긴 차가운 태도를 애들을 상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만.
“반장으로서 이런 나쁜 기류는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말야.”
나는 도연이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말 반장으로서만 그런 거야?”
조금 더 들어가는 질문.
보통 이런 일에 끼어드는 건 오지랖이다. 원래 당사자들 간의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는 게 맞는 거니까.
내 시선을 받아내던 도연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꼭 반장이기 때문만은 아냐. 친구들 간의 불화가 생기면 괜히 나서서 도와주고 싶거든.”
“그렇구나.”
이상하게도 도연이가 그리 말하니까 오지랖처럼 들리지 않았다.
“의외로, 당사자들끼리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도 많아. 서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한 발짝을 내딛기 어려워한단 말야. 나는 그 한 걸음을 디딜 수 있게 밀어주고 싶어.”
그 눈빛을 통해서 빈말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말야…….”
첫 운을 떼고 나서 주말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도연이는 이따금 고개를 움직이면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도연이가 손으로 턱을 받쳐 든 채 침음했다.
“음……. 규원이가 잘못을 많이 하긴 했는데, 너네도 꼭 잘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네.”
“그땐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나라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윤희가 뺨을 때렸다는 건 엄청 의외지만.”
“그땐 좀, 많이 놀라긴 했어.”
도연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냥 좋게 사과하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다시 생각에 골몰하는 도연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밥이 차게 식었지만, 개의치 않고 도연이에게 집중했다.
“영재야.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나는 깍지를 낀 채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것뿐이야?”
“화해하고……. 다시 스터디부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래. 그게 제일이지.”
도연이가 이해한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럴 마음이 있으면 분명히 화해할 수 있을 거야.”
“아직은 시간이 좀 필요해.”
이렇게 대판 싸웠는데 금세 화해하는 건 솔직히 무리일 테니까.
“의외로 금방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
도연이가 생글생글 웃었다.
“내가 만능 해결사는 아니라서 직접 도와주지는 못하겠지만. 미안해.”
“앗, 뭐야. 아까 전까지 감동하고 있었는데.”
“후후. 그 정도였어?”
“그래도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도연이에게 털어놓은 덕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행이다. 이제야 얼굴이 좀 볼만해졌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 * * *
수업이 끝나자 나는 윤희와 함께 스터디부로 향했다.
중간고사까지 앞으로 일주일 남짓.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
우리는 자리를 잡자마자 문제집을 꺼내서 묵묵히 공부를 시작했다.
그간 부실에서는 규원이의 공부를 봐주느라 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온전히 내 공부를 할 시간이 돌아온 것은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이지만……. 왼쪽이 허전했다.
“조용하네.”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윤희.
“그러게.”
왼쪽 자리를 곁눈질하면서 맞장구쳤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가요!”
나는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문을 열었더니 지아 누나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뭐긴. 입부하려고 왔어.”
“진짜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안 그래도 두 자리를 더 채워야 하는 상황이니까.
지아 누나가 내 눈앞에 대고 검지를 펼쳐보였다.
“단, 조건이 있어.”
“어떤 거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지아 누나의 입술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지아 누나가 입술이 벌어졌다.
“규원이와 같이 입부하는 것.”
무척이나 어려운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