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3화-열탕을 지나 냉탕(2)
“네? 규원이요?”
놀라서 바보처럼 되물었더니 지아 누나가 머리로 긍정의 제스처를 보였다.
“응. 마침 저번에 나한테 스터디부에 들어와 달라고도 했잖아. 잘된 일 아냐?”
누나의 말대로다.
지아 누나가 입부하면서 규원이가 되돌아온다면 부원이 4명으로 늘어나니까.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소식.
그러나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현재 나와 규원이의 관계는 냉전을 방불케 하는 상태에 있으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어느 한쪽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먼저 숙이고 싶지 않았다.
혹자는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알량한 자존심이나 내세우는 한심한 놈이라고 하면서.
그래도 상관없다.
나와 규원이 중에서 어느 쪽의 잘못이 더 큰가?
경중을 따져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내가 먼저 숙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게 그렇게까지 고민할 일이야?”
내 침묵이 조금 길었던 모양이다.
“그날 밤에는 날 그렇게 열렬히 원하더니……. 어쩜 이리 차가워질 수가 있니?”
“아니! 원하는 거 말해보래서 스터디부에 입부해달라고 한 걸 그렇게 왜곡하면 어떡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지금 나 말고도 청자가 한 명 더 있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하지만 지아 누나는 나를 놀려먹을 생각이 가득한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릴 따름이었다.
“영재 당황했네?”
“네, 조금은…….”
멋쩍게 대답하자 지아 누나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농담 좀 해봤어.”
“복잡한 생각은 아니고요…….”
“그럼?”
질문이 옆구리를 찔러왔다,
“어,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화해는 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건 없으니 먼저 사과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감정이 양립하고 있는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리송했다.
“그럼 좀 다르게 물어볼게. 앞으로 규원이랑 어쩌고 싶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
정황상 지아 누나가 사정을 대강 들었겠구나 짐작했다.
스터디부에 오자마자 규원이와 같이 들어오는 것을 입부 조건으로 내세웠으니까.
나는 뜸을 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역시 화해하고 싶어요.”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지아 누나가 납득했다는 의미로 머리를 움직였다. 그러고는 턱을 약간 치켜들고,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희에게 시선을 보냈다.
“잠깐만.”
지아 누나가 내 어깨를 슬쩍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전진하는 발걸음.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아 누나는 윤희의 책상 앞에서 멈췄다.
“네가 심윤희구나? 저번에 인사도 했었지?”
“아, 네…….”
어색한 음성으로 답하는 윤희.
나는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규원이 뺨 때렸다면서? 그렇게 할 인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 말에 윤희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나도 덩달아 숨을 삼켰다.
윤희는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아, 저, 그게…….”
드물게 말끝을 삼키는 모습.
지아 누나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냐! 따지는 거 아니니까!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너무 마음 쓰지는 마. 나도 규원이가 많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든.”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 누나와 규원이는 친한 사이니까 윤희를 책망할 줄 알았는데.
윤희가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을 내보냈다.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서…….”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안심했어.”
지아 누나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누나. 이규원은 어쩌고 있나요?”
“규원이는…….”
지아 누나가 음, 소릴 내며 나와 윤희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침울해하고 있어. 좀, 많이.”
뜻밖의 발언.
“교실에서는 그런 모습 보인 적 없었는데.”
우리와는 관계가 틀어졌으니 말 한 마디 안 섞는다고 쳐도, 다른 애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아 누나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규원이라고 해도 남한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 정도는 있으니까. 그래서, 너희도 화해할 마음은 분명히 있는 거지?”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윤희를 응시했다.
“적어도 때린 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확고한 눈빛.
너도 나처럼 화해하고 싶었구나.
“너희의 마음은 잘 알았어. 규원이에게 알려줄게. 아마 너희들끼리 해결하게 놔두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지아 누나가 아예 중재자역을 자처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하면 되는 거죠?”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지아 누나가 내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생각보다 아팠다.
분명 살살 때린 것 같았는데.
내가 이마를 문지르자 누나가 혀를 차며 검지를 흔들었다.
“이런 일은 질질 끌어봤자 좋을 거 없어, 바보야. 시간이 갈수록 말하기 더 힘들어질 뿐이라구.”
“그래도 중간고사는 중요한 시험인데…….”
“부원을 소중히 하는 부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분명 부드러운 어조인데, 묘하게 박력이 느껴졌다.
“그, 렇죠.”
나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지아 누나가 눈웃음을 지었다.
“서로 잘 화해하면 내가 부원으로 들어갈 거니까. 그땐 꼭 받아줘?”
말꼬리에서 누나가 가벼운 윙크를 날렸다.
그래. 누나의 윙크까지 받아놓고 부원으로 삼지 않으면 천하의 나쁜 놈이지.
“꼭 그렇게 할게요!”
“조만간 내가 자리 만들어 볼게.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네.”
지아 누나가 시선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벽시계를 확인해 보니 6시를 약간 넘은 참이었다.
따로 부 활동을 하지 않는 학생이라면 한참 전에 귀가했을 시간.
“참! 온 김에 나도 무언가 얻어가야겠어.”
그러면서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윤희에게 내밀었다.
“네 번호 알려 줘.”
누나의 밝은 목소리에 윤희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지아 누나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머금었다.
“어서.”
“아, 네.”
그제야 윤희가 스마트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여기 있어요.”
윤희가 내민 스마트폰을 얼른 챙기는 누나.
“고마워. 나중에 문자 보낼게.”
지아 누나가 문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 내일 보자.”
손 대신 스마트폰을 흔들고 나서 부실을 나갔다.
이윽고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활짝 열린 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폭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거짓말처럼 고요함이 내리깔렸다.
* * * *
초저녁이 되어 스터디부 활동을 마쳤다.
별관 건물을 빠져나온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하늘에 유독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보였다.
“개밥바라기네.”
완만한 경사로를 천천히 내려가면서 윤희가 중얼거렸다.
개밥바라기는 금성의 다른 이름이다.
지구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행성.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척 멀게만 느껴지는 별.
그것은 지금 우리와 규원이 사이의 거리처럼 여겨졌다.
“밝네.”
무심하게 감상을 입에 담았다.
“지아 선배. 거침없더라.”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아.”
나는 윤희의 의견에 동조했다. 오늘만 해도 무척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원래 내가 번호 쉽게 안 주는데.”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응.”
윤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고요한 분위기. 우리들이 내는 발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마냥 좋지는 않았다. 여기서 조금 더 시끌벅적해도 상관없는데.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던 중 윤희가 가로등 아래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오늘 할아버지한테 갔어.”
“점심시간 때지? 무슨 이유로?”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이 회복된 모양이다.
“사이가 틀어진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회복해야 할지, 물었어,”
윤희가 쑥스러운지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뭐라고 대답하셨어?”
“시간을 들여서 자리를 만들고, 차분히 얘기해서 그간 쌓인 회포를 풀라고.”
“회포라니, 우리한테 살짝 안 맞는 단어 같은데…….”
뭔가 어른들의 세계에서나 어울릴 법하달까.
“맞는 말이긴 해. 너무 원론적이라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윤희의 말마따나 이사장님의 조언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도 들리는 말.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우리에게는 조력자가 있다는 것.
“지금은 누나를 믿는 수밖에 없겠지.”
“만약 지아 선배가 실패한다면?”
윤희가 반론을 제기했다.
“아무리 규원이와 친하다고 해도 마냥 성공할 거라고 믿기는 어려워.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고민에 휩싸였다. 그 점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윤희가 나직한 한숨을 흘려보냈다.
“초를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만약의 가능성도 고려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때는, 우리가 행동에 나서야지.”
물론 이건 최후의 최후에 쓸 방법이다. 나는 여전히 저울을 달고 있으니까.
“지금은 지아 누나가 잘해 주길 바라자.”
윤희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어. 그냥,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터져 나왔다고밖에…….”
중얼거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후회에 젖어있었다.
“가끔은, 정말 가끔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윤희를 응시했다. 불안감이 서린 얼굴과 눈빛.
“사람은 다면적이니까. 평소에는 차분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감정에 휩쓸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
너무 부정적인 생각으로 빠지지 않도록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알아.”
윤희의 단답.
“알지만……. 그럼에도 미처 몰랐던 일면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게 두려워. 그 순간에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런 나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윤희는 힘겹게 진심을 토로하고 있었다.
“규원이와 화해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인 거지?”
윤희는 지금 갈피를 못 잡는 것이리라. 지아 누나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발언을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윤희가 천천히,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이것은 누굴 위한 화해일까.
나를 위한?
윤희를 위한?
규원이를 위한?
우리 셋을 위한?
스터디부를 위한?
나는 머릿속을 말끔하게 털어냈다.
“화해하고픈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나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윤희가 고개를 신발코로 떨궜다.
“미안해. 이상한 소리해서. 털어놓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거든.”
이럴 때는 한 마디면 된다.
“괜찮아.”
나는 솔직히 꽤 놀란 상태였다.
윤희가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었으니까.
나를 신뢰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고 그 신뢰에 보답할 수는 없겠지.
경사로의 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 * *
그날 밤, 슬기와 저녁을 먹고 난 뒤 방으로 들어와서 공부에 전념했다. 한참 동안 같은 자세로 문제집을 내려다본 탓인지 목 주변이 뻐근했다.
잠깐 볼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아예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딱 5분만 이러고 있자.
곳곳에 물자국과 곰팡이가 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중간고사 대비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자부할 수 있다.
예습과 복습을 매일 같이 반복하다 보니 배운 내용들이 전부 기억에 남아있다.
문제 풀이를 계속하면서 문제 다루는 감각을 유지해 나가면 이번 중간고사는 큰 문제없 이 잘 치를 수 있다.
“…….”
멍한 상태로 있는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몸을 일으켜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형준이였다.
가출 소동 이후로 거의 한 달만의 연락이네.
[여보세요?]
언제 들어도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래. 웬일이야?”
[친구가 전화하는데 웬일은.]
나는 피식, 웃음소릴 냈다.
“중간고사 준비는 잘 하고 있고?”
[잘하고 뭐고가 어딨냐. 그냥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하기야, 공부를 던진 게 아니라면 다들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근데, 너 지금 바빠?]
“공부하다가 잠깐 쉬는 중.”
[혹시, 잠깐 나올 수 있어?]
“설마 또 가출했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아니! 저번에 한 번 했으면 됐지, 뭘 또. 그냥 잠깐 편의점에서 수다나 떨자고.]
아직 공부할 거 남아있는데…….
[안 되면 말고.]
“아냐. 나갈게.”
그래도 꽤 진도를 빼놓았으니까 잠깐 짬 내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나는 대충 옷을 걸친 다음, 엄마에게 형준이를 만나고 오겠다고 알렸다. 그런 뒤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