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1화-You Only Live Once(10)
부실에 도착했을 때는 1시 15분이었다. 생각보단 많이 안 늦었네.
윤희는 문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미안. 좀 늦었지?”
“아냐. 나도 방금 왔어.”
나는 열쇠로 문을 열면서 규원이의 행방을 물었다. 윤희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답했다.
하긴, 이 자리에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안 그랬으면 지금쯤 이미 폭발했을 테니까.
부실 안으로 들어가자 윤희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뭘 하느라 늦은 거야?”
“잠깐 지아 누나랑 할 얘기가 있었어.”
윤희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얼굴에 내비쳤다. 역시 눈치백단.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윤희의 과제와 오답노트부터 확인했는데 완벽 그 자체였다.
그러고 나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규원이는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던 윤희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나 또한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신경 쓰이네.”
“너도 그렇구나.”
담담하게 내뱉자 윤희가 가느다란 한숨을 흘려보냈다.
“얘가 이렇게 늦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게 답하고 나서 윤희가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아, 선배랑은 무슨 얘길 했어?”
호칭에서 잠깐 고민을 한 모양이었다.
‘언니’라고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보니 적당히 ‘선배’라는 호칭을 고른 거겠지.
“그냥. 물어볼 게 있었거든.”
“좀 많이, 언짢아 보여서 그래.”
윤희의 지적에 나는 뺨을 더듬어 보았다.
얼굴에 대놓고 그걸 드러내진 않았을 텐데?
“맞구나.”
가만히 중얼거리는 윤희.
“티 났어?”
“원래 감정은 완전히 숨길 수 없으니까.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윤희가 드러낸 궁금증에 무어라 답해야 할까.
막 설명해 주려던 차에 문이 벌컥 열렸다.
“하이루!”
기운찬 인사말과 함께 규원이가 부실에 왔다.
나와 윤희 중 어느 누구도 그 인사에 화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벽시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계바늘이 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규원이도 우리들을 따라 시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엇! 좀 늦었네.”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고는 뒤통수를 문질러대는 걸 보니, 미안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안. 다음엔 절대로 안 늦을게.”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사과하는 꼴을 보면 말이지.
나는 잔말 말고 빨리 자리에 앉으라고 얘기했다.
“네에, 부장님! 그나저나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보기 좋더라.”
윤희는 규원에게서 고개를 홱 돌린 채 문제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예 투명인간 취급할 작정인 듯했다.
“아 맞다! 나 그래도 과제는 열심히 해왔어. 잠시만…….”
“아니. 지금 꺼내지 마.”
내가 제지하자 규원이가 가방 지퍼를 열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왜에? 이제 공부할 거 아냐?”
나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규원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
“왜 그러는데?”
역시 이번만큼은 그냥 못 넘어가.
나는 포문을 열었다.
“너. 이번 주 월요일에 지아 누나랑 뭐 했어?”
“오! 웬일? 혹시, 지아 언니한테 관심 있는…….”
“농담 따먹기 할 기분 아니니까 사실대로 대답해.”
목소리를 낮게 깔자 규원이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로 정색하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것이다.
“갑자기 왜 그래?”
규원이의 기세가 방금 전보다 가라앉았다.
나는 말 대신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규원이의 동공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
“대답해. 뭐 했어?”
계속해서 다그쳤다.
“월요일엔, 지아 언니랑 같이 백화점 가서 옷 구경했어…….”
“수요일에는?”
“지아 언니랑 카페 가서 놀고, 우리 집 와서…….”
나는 곧바로 말허리를 잘랐다.
“금요일에는?”
“카페 가서 같이 공부하고…….”
“됐어.”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서 단호하게 규원이의 입을 막았다.
“이규원. 내가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본다고 생각해?”
“어, 그건, 글쎄에…….”
말꼬리가 점차 흐려지다가 기어이 멎었다.
나의 매서운 눈빛을 견디다 못한 규원이가 고개를 슬쩍 내리깔았다.
“여기 오기 전에 지아 누나한테서 이미 얘기 다 들었어. 너 설마, 내가 뭐 아무것도 모를 거라 여긴 거야?”
그 말에 규원이의 낯빛이 굳어진 채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집에서 게임하느라 정신없었다고.”
나는 속에 든 말보따리를 멈추지 않고 풀어나갔다.
“너 스터디부 처음 왔을 때 평균 90점 노린다고 했잖아. 누누이 말했지만 그건 단시간에 이룰 수 없는 목표야. 그래도 나는 최대한 도와주려고 마음먹었어. 왜인지 알아?”
규원이의 눈길이 바닥에서 올라올 줄을 몰랐다.
“믿었거든. 믿고 도와주면 조금씩 변할 거라고. 근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난번 일요일에는 갑자기 약속을 취소해버리고. 그것도 전날 밤에는 된다고 해놓고 갑자기 그랬잖아.”
사실 이 건은 그때 윤희와 한 번 넘어가 주기로 정했다. 한 가지 잘못만 가지고 트집을 잡는 건 너무 매정한 처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감정이 폭발해 버리자 결국 이 화제가 튀어나왔다.
윤희의 말마따나 나는 단 한 번도 규원이를 용서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땐 정말로 갑자기 잡힌 약속이어서…….”
변명을 시도하는 규원이. 하지만 내 대꾸가 규원이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그 약속이 내가 보낸 제안보다 먼저 잡힌 거였어?”
규원이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사실대로 말해.”
“……아니.”
뜸을 들인 끝에 간신히 새어 나온 대답.
망설이는 시점에서부터 예상은 했지만.
나는 입김을 길게 내뿜었다. 입김의 끝자락이 규원이의 얼굴에 닿았다.
“그래. 공부보다 노는 게 당연히 더 좋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너니까. 수업 시간에 맨날 곯아떨어지고 올 7등급이나 받는 너니까.”
차갑게 조소했다.
“지난번 일요일에 나도 선약 있었어. 진짜 몇 년 만에 엄마랑 동생이랑 나들이 가려고 했거든. 근데 그거 취소했어. 왜겠어? 공부해야 하니까. 나나 윤희가 아니라 바로 네가.”
검지를 들어서 규원이를 지목했다. 그럴수록 규원이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네 공부 봐줘야 하니까 취소했다고. 물론 이런 건 다 개인적인 사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간고사 시즌인데 공부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 아냐?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저번 일요일에 뭐 했어?”
“게임…….”
대답하는 목소리가 개미만 했다.
“게임하느라 답안지 보고 과제한 거네? 답안지 못 보게 했더니 냅다 찍어서 내고.”
“…….”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솟았다.
“내가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주면 뭐 해. 네가 과제할 때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데. 내 가르침이 아무 소용없었나 봐?”
“그, 그치만…… 그 자리에서는 다 이해한 것 같아도 막상 집에 오면 기억이 잘…….”
변명하기에 급급한 모습이 무척이나 꼴사나웠다.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될 일 아냐? 휴대폰도 있고, 교실도 같고, 부 활동도 같이 하는데. 복습한다 생각하고 문제집 개념 설명부터 다시 읽어보는 것도 할 수 있잖아.”
정론으로 받아치자 규원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게임이 그렇게 중요하던? 평균 90점 받고 신형 스마트폰 갖겠다고 큰소리치더니, 게임이나 하고. 그러고 잘도 스마트폰 갖겠다. 과제를 냈더니 눈 가리고 아옹이나 하고. 내가 그런 거 하나 눈치 못 챌 줄 알았어? 대체 얼마나 나를 얕봤으면.”
“그, 그런 건 아니고…….”
“뭐가 아닌데? 그간 해온 짓들이 다 그랬는데.”
“…….”
규원이가 무릎 위에 양손을 그러모았다.
“이규원. 내가 왜 너를 부원으로 받아들였는지 알아?”
“그건, 내기에서 져서…….”
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냐. 계속 거절해도 끈질기게 매달리는 모습 보고 받아들인 거라고. 지금은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저런 끈기가 있으면 점차 잘하게 될 거라고. 그래서 기대를 걸었고, 변할 거라고 믿었거든. 근데 내가 진짜 사람을 잘못 봤나 봐. 이렇게까지 실망을 안겨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이제부턴 진짜로 안 그럴게! 믿어줘!”
규원이가 고개를 들고 합장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그만 조소를 터뜨렸다.
“이제까지 실컷 지아 누나 팔아가며 거짓말해 놓고, 믿어 달라?”
그러자 규원이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몇 번이나 기회를 줬다고 생각해? 근데 너 한 번이라도 믿음을 준 적이 있기는 해? 지아 누나는 널 뭐라고 생각할까?”
“…….”
기껏 정면을 향했던 규원이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영재야. 이쯤 해.”
윤희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얹었고, 나는 오랫동안 묵은 것만 같은 한숨을 훅 불었다. 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들을 모조리 토로한 탓인지 분노가 다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이규원. 진짜 마지막이야. 이제 더는 기회 없어.”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문제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오른편에서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할 말만 하면 다야?”
나는 다시 규원이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할 말이 있어? 여태 네가 해온 짓을 생각한다면 할 말 없어야 정상 아냐?”
“…….”
묵묵부답.
더 이상 상대해 봤자 시간 낭비다.
곁눈질해 보니 규원이는 입술을 앙 다문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뭐, 본인 업보니까 위로해줄 생각은 내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없지만.
지금은 그냥 내버려두자.
다시 문제집에 집중하려는데 옆에서 쿵,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나 갈 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규원이가 가방을 손에 들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야! 어디 가!”
재빨리 일어나서 쫓아갔다. 덕분에 문 앞에서 규원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어떻게 하든, 잘못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하자 규원이가 홱 돌아섰다. 양손을 힘껏 말아쥐고 있었다.
“그치만, 나도 힘들었다구! 평소에 하지도 않던 걸 하려니까 안 맞는 옷을 입는 기분이었단 말야!”
“네가 그만한 목표치를 원했잖아. 참고로 나는 어려울 거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어.”
“그래! 맨날 어려울 거다, 할 수 없다 그런 말만 하고. 왜 한 번도 응원해 주지 않는데!”
지금 규원이는 생떼를 부리고 있다. 어린아이마냥.
“안 될 걸 아니까. 괜히 응원해 봤자 희망 고문밖에 안 되니까.”
“나 힘든 건 하나도 안 알아주고. 이제 더는 못하겠어!”
“스마트폰은 어쩌려고?”
소리쳤더니 규원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몰라. 이제 몰라. 공부는 지겹고 힘들기만 하고……. 역시 나 같은 욜로(YOLO)한테는 안 어울리는 짓이었어. 내 기분 같은 건 알아주려고도 안 하잖아. 공부에만 미친 새끼들아!”
“야 이규원! 그만해.”
윤희마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과해도 모자를 마당에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윤희의 서릿발 같은 호통을 치면서 문 앞으로 다가왔다.
“이때까지 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끼어드는 건 무슨 심보야?”
날카롭게 내지르는 규원이.
윤희가 묵직한 한숨을 토해내더니 연보랏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적어도 이번 건에 대해서 너는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마땅했어. 근데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네?”
“지각한 건 사과했잖아.”
“그런 장난스런 태도가 사과라고? 기가 찰 노릇이네.”
윤희가 코웃음을 쳤다.
“여태까지 네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저번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도 받지 못했고.”
“무슨 일?”
“기억 안 나니? 영재가 나한테 고백했다고 헛소문 냈던 일.”
그러고 보니 저번 달에 그런 일이 있었지.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규원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재도 소문 부풀리기에 한몫했잖아.”
“그래도 영재는 다음날 나에게 사과했어. 누구 씨처럼 까맣게 잊지 않고.”
서슬 퍼런 목소리였다.
무언가 반박을 하려는 듯한 규원이. 하지만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너, 욜로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
“인생은 한 번뿐이다, 잖아.”
“아니.”
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 정확한 뜻은 이거야. 근데 그거 알아? 그간 네가 해온 짓거리들 전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어. 그걸 네 행복으로 연결 짓는 건 쓰레기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쓰레기’라는 단어에 윤희가 악센트를 넣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규원이가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너 그간 그래왔어.”
내가 옆에서 쐐기를 박았다. 규원이가 어깨를 씩씩거리면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이 눈가에 맺혀있었다.
“둘이서 몰아붙이는 짓거리도 쓰레기나 다름없잖아!”
목청껏 외친 규원이가 윤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윤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이 당황했는지 윤희가 눈을 치떴다.
“이거 놔!”
윤희의 외침.
나는 안간힘을 써서 두 사람을 간신히 떼어놓았다. 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짝!
규원이의 고개가 확 꺾였다.
앞으로 나아가 있는 윤희의 손.
규원이가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의 볼을 감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윤희가 규원이를 매섭게 노려보자 규원이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홱 돌아선 규원이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윤희가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서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미안……. 오늘은 더 이상 공부 못하겠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윤희는 가방을 챙겨 들고 부실을 나섰다.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 규원이가 메시지 한 건을 보냈다.
「스터디부 그만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