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40화-You Only Live Once(9) (40/131)



〈 40화 〉40화-You Only Live Once(9)

“뭐? 갑자기?”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미안! 말하려던 걸 까먹었어!”
규원이가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고 있던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부장님. 진짜 오늘만!”
필사적으로 애걸하는 규원이.
나는 불쾌한 기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토해냈다.
얘는 자기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는 하는 걸까?
스터디부의 부장으로서, 최대한 가르치겠다고 결심한 입장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 시킬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언제 약속한 건데?”
“어제 저녁에…….”
규원이가 눈을 살짝 들고 이쪽의 기색을 살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과제는 어떻게 하려고?”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윤희가 끼어들었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
규원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윤희가 냉랭한 목소리로 일침을 놓았다.
“너 참, 이기적인  알아?”
덕분에 아직 교실에 남아있던 애들의 이목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이기적이라니. 지금이라도 알려주고 있잖아.”
규원이가 반격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대번에 험악해졌다. 나는 일단 둘 사이에 껴서 중재하기로 했다.
“일단 진정해 봐. 릴렉스, 릴렉스.”
양손으로 가라앉히라는 사인을 보내자 두 사람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규원이를 쳐다보았다.
“이규원. 과제는 내일 것까지 해서 14페이지 분량 풀어 와. 알겠지?”
“오옷! 역시 영재는 대인배구나. 그럼 난 갈게!”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퇴장하는 규원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 험악했는데 놀아도 된다는 한 마디에 바로 풀리는  실화야?
교실에 남아있던 애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보았는데, 나는 별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혹시, 사랑 싸움?”
“아니라니까!”
내가 강하게 부정하자 애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이것들이 안 믿어주네.
하긴, 자기들도 그저 농담으로 한 얘기니까.
이제 애들과 헤어지고 평소와 다름없이 스터디부로 향할 줄 알았다. 윤희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농담도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싸늘한 한 마디에 모두들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왜?  정도 농담은 누구나   있는 거잖아?”
우리 반에서 성격이 까칠한 혜진이가 윤희에게 맞서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북극의 한파가 몰아친 것마냥 얼음장이 되고 말았다.
“듣는 입장도 생각해야지.”
차분한 목소리로 반박하는 윤희. 하지만 혜진이를 쳐다보는 눈빛만큼은 서슬퍼랬다.
“와,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달려드네. 너 진짜 인생 피곤하게 산다.”
팔짱을 낀 혜진이가 도발성 짙은 말을 내뱉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윤희야. 그만! 진정해!”
내가 황급히 윤희의 어깨를 붙들었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도연이도 혜진이를 막아 세웠다.
“도연아 놔! 쟤 진짜 첨부터 재수 없었어!”
“아잇! 혜진아, 진정해!”
그러자 다른 애들도 혜진이를 말리기 위해 도연이에게 가세했다. 윤희는 차가운 눈으로 혜진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뭘 봐! 뭘 쳐다보냐고!”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게 최우선!
나는 윤희의 손목을 붙잡은 채 재빨리 교실을 벗어났다.

* * * *

스터디부 부실 앞에 도착했을 때에야 나는 윤희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세게 잡았던 모양인지 윤희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목을 문질렀다.
“미안…….”
윤희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잠깐 어찌 됐나 봐. 감정이, 너무 앞서버렸어.”
나는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았다.
윤희 스스로가 인지하는 대로 방금 보였던 언행은 무척 감정적이었다. 지난번 가면 소동이 있었던 다음 날에도 궁금하게 여기는 애들을 향해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다고 하고.
그러니 여기서 무조건 괜찮다고 답하는  안이한 짓이다.
“아까 혜진이가 한 말은, 그냥 흘려들어도 됐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으니까. 걘, 널 좀 오해한 것 같아.”
“오해라…….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걸 풀  있을지 잘 모르겠어.
윤희의 얼굴에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무작정 터놓고 얘기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조언하는 건, 너무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난번에 무신경한 발언으로 윤희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고.
“규원이 하는 짓 때문에 화가 났었는데, 애들이 쓸데없이 호기심을 가져서 그만…….”
“그런 것 같더라.”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일 사과해야겠어.”
윤희가 한숨을 내쉬고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표정.
나에게 털어놓으면서 감정을 추스른 모양이었다. 자신의 잘못도 인정했고.
부실에 들어간 우리는 항상 앉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서 스터디부 활동을 하는 게 거의 3주만이로군. 시끌벅적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부실에서 개인 공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윤희가 해온 과제를 검사한 뒤 우리는 각자 해야  공부를 했다.
석양의 그림자가 부실 안을 기웃거리다가 어느덧 땅거미에게 쫓겨났다. 그렇게 저녁 7시 반이 되어 스터디부 활동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희가 샤프를 멈추고는 팔을 앞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규원이를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았어?”
갑자기 불쑥 날아온 질문.
나는 가방을 메려다 말고 책상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아니면, 이번에도 참아준 거야?”
“그건 왜?”
되묻자 윤희가 이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궁금해서. 나처럼 화가 났는지, 아니면 다른 걸 느꼈는지.”
나는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안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어. 화가 나기도 했고. 하지만 이미 해놓은 약속에 초를 칠 수는 없으니까.”
윤희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게다가 부 활동 자체가 자율성에 맡기는 거잖아. 일개 부장인 내가 이래라저래라 강제할 수는 없지.”
“이성적이구나.”
윤희의 단언에 나는 더 이상  말이 없어졌다.
“그럼 지금도 규원이를 믿어?”
두 번째 질문. 마치 인중을 노리고 들어오는 훅(Hook) 같았다.
“음…….”
쉽게 나오지 않는 대답.
변할 거라는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자는 생각이 언어의 형태로 나오지 않았다.
“알겠어.”
윤희가 가방을 메고 돌아섰다. 나는 그런 윤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더 이상 대답을 구사하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내비쳤던 망설임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으니까.

* * * *

이후로도 규원이는 이번 주 내내 이틀 간격으로 스터디부 활동을 빠졌다.
수요일에는 지아 언니와 백화점에 간다는 이유를 내세웠고, 금요일인 오늘은 지아 언니와 카페에서 같이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서.
“영재야. 진짜로 공부하러 가는 거야. 놀러 가는 거 아니라구.  엄지  수 있어!”
종례 시간이 끝나자마자 스터디 모임 불참 통보를 하러 온 규원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아예 내 팔을 붙든 채 애원하기 시작했다.
“난 먼저 가 있을게.”
냉랭한 음성으로 내뱉은 윤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교실을 나섰다.
짜증을  바에야 아예 자신이 피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새였다.
“윤희야 잘 가.”
 와중에 태평스레 손이나 흔드는 규원이. 아이고 골이야.
“진짜로, 공부하러 가는 거냐?”
“당근이지! 이렇게 문제집도 챙겨 왔다구.”
나는 규원이가 가방 지퍼를 개봉하려는 걸 말렸다.
“너. 중간고사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규원이가 턱에 손가락을 갖다 댄  침음을 냈다.
“음……. 열흘! 열흘 남았어. 암튼 오늘 언니랑 진짜 열심히 할게. 응?”
규원이가 기대에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알겠다고 답했다.
“오오! 우리 부장님 짱!”
규원이가 양쪽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일 1시까지 부실로 모여. 내일은 진짜로 빠지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부장님!”
규원이가 왼손으로 경례를 하고는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이쪽 나름대로 수를 써야 할 성 싶었다.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로 아무 가망도 없어질 테니까.

* * * *

저녁 8시를 조금 넘은 시간.
슬기와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곧장 방에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은  그대로 10시가 넘을 때까지 공부에 몰두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규원이도 집으로 들어갔겠지.
나는 책상 구석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쥐었다.
액정을 열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번호부에 들어갔다.
스크롤을 내리자 지아 누나의 이름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나는 메시지 작성 버튼을 눌렀다.

「누나 혹시 중간고사가 끝날때까지 규원이랑 약속  잡으면 안될까여?? 얘가 공부를 해야하는데 자꾸만 부활동을 빠지면 곤란하거든여..」

하필 지아 누나에게 하는 첫 연락이 이런 부탁이라니…….
하지만 어쩔  없었다.  그러면 규원이가 자꾸 이 핑계,  핑계를 대며 빠지려고  테니까.
그리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갑자기 뭔 말이얌???」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너무 간추려서 보냈나?
나는 다시 메시지를 작성했다.

「누나 그게.. 이번주 월요일부터 규원이가 이틀 간격으로 누나랑 약속있다고 하면서 스터디부 활동을 빠졌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곤란해서 한동안만 약속을 잡지 말아달라 이런 얘기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영재야?]
듣기 좋은 미성이 고막을 건드렸다.
“네, 누나. 갑자기 문자 보내서 놀랐죠?”
[놀랐다기보다는……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어떤 게요?”
[내가 이번 주 월요일에 규원이 만난 이후로 따로 약속 잡은 적이 없거든. 그래서.]
나는 놀라서 눈을 치떴다.
“네? 진짜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근데 나도 좀 당황스럽다. 너한테는 규원이가 나랑 약속이 있다고 했다고?]
“네! 그랬어요.”
강한 어조로 긍정했다.
[영재야. 혹시 깨톡 안 되니? 전에 번호를 받았는데 깨톡 친구 목록에 네 이름이  나오더라고.]
“저 사실, 2G폰 쓰고 있어서요…….”
왠지 흑역사를 고백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그럼 내일 잠깐 나 좀 볼래? 아무래도 이번 일은 나도 좀 자세히 알아둬야 할  같아서.]
“네, 그럴게요.”
나 또한 마찬가지로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으니까.
지아 누나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준 뒤 통화를 마쳤다.
이규원……. 여러모로 골 때리게 하는구만.

* * * *

다음날.
약속했던 12시 정각에 컴퍼스 커피에 도착했다.
윤희와 규원이에게는 약간 늦을 수도 있다고 미리 메시지를 보내뒀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지아 누나는 이미 자리를 잡아두고 있었다.
“영재야. 이리 와.”
누나가 손짓을 했다. 맞은편에 앉았더니 누나가 나에게 무얼 주문할 거냐고 물었다.
메뉴판을 구경해 보았다.
스타박스보다 저렴하긴 했지만, 내 지갑에는 부담스러운 가격대였다.
“음…….”
“그냥 나랑 같은 거 할래? 돈은 내가  테니까.”
고민이 길어질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안 그러셔도…….”
“이럴 땐 그냥 감사히 먹겠다고 하는 거야. 저번에  구해준 적도 있고.”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지.
“그럴게요.”
지아 누나가 주문한 것은 아이스 카페 모카였다.
우리는 각자의 음료를 손에 쥔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너한테는 정말로 나랑 약속이 있다고 한 거지?”
“네. 그랬어요.”
“흐음…….”
지아 누나는 신음성을 내며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저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깨톡 대화 확인해 볼래?”
“봐도 되나요?”
“응.”
지아 누나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인 뒤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나는 잔을 놓고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했다.
“여기 봐봐. 수요일에 나랑 얘기한 내용인데…….”
지아 누나가 검지로 스크롤을 슥슥 밀어 올렸다.

뀨원 : 언니이~  드뎌 치킨 먹었닭!

채팅 바로 아래에 배탈그라운드 사진 한 컷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여기 금요일에도…….”
수요일과 마찬가지로 배탈그라운드를 했다는 내용의 채팅이 있었다.
“깨톡이 됐으면 바로 보여줬을 텐데…….”
나는 스마트폰에서 눈길을  수가 없었다.
“근데 너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그러게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는 혀를 내둘렀고, 지아 누나도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깨톡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 지아 누나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번 일은 내가 규원이한테 따로 얘기해 볼게.”
“아녜요. 이건 제가 하는  맞는 것 같아요.”
어느덧 학교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지아 누나를 배웅하고 나서 학교로 향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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