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39화-You Only Live Once(8) (39/131)



〈 39화 〉39화-You Only Live Once(8)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이후 규원이는 평소보다 얌전해졌다.
나는 규원이가 가져온 문제집을 토대로 단원의 개념부터 다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규원이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덧 오후 4시가 되자 규원이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배고프니까 집중이 안 돼. 머리도 어지럽구.”
덕분에 나에게도 잊고 있던 허기가 찾아왔다.
하긴, 두 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떠들었으니.
윤희는 쥐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그래. 그러자.”
내 말에 우리 셋은 곧장 부실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생각이야?”
윤희가 질문을 던지고 나서 마스크를 착용했다.
“허얼. 윤희야. 그거 진짜 안 갑갑해?”
규원이의 오지랖이 발동되었다.
“괜찮다고 이미 말했잖아.”
 잘라 답한 윤희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보냈다.
“생각해 놓은 곳 있어?”
나는 아침부터 줄곧 생각하고 있던 곳을 입에 담았다.
“편의점!”
“편의점이 뭐야. 떡볶이 먹자, 떡볶이!”
곧바로 반대 의견이 비집고 들어왔다.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떡볶이는 컵라면보다 배로 비싸다. 절대로 밀려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강한 어필.
“편의점!”
“떡볶이!”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인 윤희에게로.
윤희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다가 입을 열었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그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렇게 되면  싸움이다.
나와 규원이는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편의점 VS 떡볶이 매치.
하지만 이 대결에서 나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쓸 수 있는 패가 있기 때문에.
“좋아. 그럼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
일단 숙이기. 규원이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대신, 과제를 세 배로 늘리겠어. 기한은 당연히 내일까지.”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그러자 규원이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잠깐만! 그거랑 떡복이랑 무슨 상관인데에!”
“나는 양보한 만큼 받아내는 주의거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으으.”
규원이가 입술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갈등에 휩싸였다.
어느 쪽이 손해가  적을지 저울질하고 있을 테지.
떡볶이로 먹는 즐거움을 채운 뒤 과제를 세 배로 하느냐.
아니면 먹는 즐거움은 없는 대신 과제를 원래 분량으로 하느냐.
그리고 규원이의 답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편의점에 가는 걸로…….”
나의 승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사람은 가진 패를 쓸  알아야 한다니까.
“쪼잔해.”
윤희의 평가가 매우 박했지만 상관없다. 지출을 아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편의점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부실로 돌아와서는 다시 공부 삼매경이었다. 나는 규원이를 가르치느라 내 공부에 손도 못 댔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는  8시가 되었을 때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아아, 드디어 끝!”
규원이가 환호했고, 윤희는 기지개를 켰다.
“과제 내준 건 무조건 열심히 풀어오도록.”
누구 씨를 위해 친절히 한 번 더 강조했다.
“걱정 마. 이번엔 진짜로 똑바로 할 거니깐.”
규원이가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윤희가 우리들을 바라보고는 마스크를 착용했다.
우리는 가방을 메고 부실을 나섰다.
어둠이 내리깔린 학교. 3학년 선배들 교실의 불도 모조리 다 꺼져 있었다.
간간히 잡담을 하면서 정문을 빠져나왔더니 늘 오가는 완만한 경사로가 펼쳐졌다.
“오늘 진짜 힘들었어어.”
규원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참고로 이 말만 5번째다.
“널 가르친 나는 어떻겠냐.”
“감사합니다, 스승님.”
규원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윤희가 풋, 하고 웃었다.
“오? 방금 웃었지?”
규원이가 윤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냐. 그냥.”
가로등 아래서 윤희의 눈매가 곡선을 그리는 게 보였다.
지난주에 윤희는 규원이에 대해 악평을 했다. 그때와는 확실히 온도 차이가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좋은 징조로 봐야 할까?
“너 웃는 모습 처음 봤어.”
윤희가 규원이를 향해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보기 좋아. 엄지 척!”
규원이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잡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경사로를 다 내려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내일도 모이는 거지?”
윤희의 질문.
“응. 내일도 1시까지 부실로 와.”
“알겠어.”
고개를 살짝 까딱이는 윤희.
“오케바리!”
규원이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 사인을 만들었다.
우리는 손을 흔들고 나서 헤어졌다.
여기서부터 집까지 혼자 가야 한다.
이전에는 혼자 가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약간 외롭다는 생각도 든다.
윤희와 규원이가 함께 돌아가는 모습을 계속 봐서 그런가.
둘이 친하냐, 고 물어본다면 그건 결코 아니지만.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중에 바지 주머니에 잠들어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문자 메시지 알림이었고, 액정에 발신자의 이름으로 윤희가 떠 있었다.

「나중에 전화해도 될까?」

* * * *

방에서 공부를 하는데, 자꾸만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최근에는 필요한 메시지를 주고 받은  말고 특별히 연락을 한 적이 없어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뭐 때문이지…….”
가만히 중얼거리면서 생각하다가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렸다.
낮에 규원이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듣고 싶은 모양이로군.
그나저나 내가 먼저 걸어야 할지, 윤희가 걸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고민되었다. 나는 혀를 찬 다음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니 공부에 집중이 안 되잖아.
메시지를 받은 지도 벌써 1시간이나 지났는데.
통화를 하려고 전화번호부를 뒤지던 그때, 윤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지금 통화 괜찮아?]
“물론이지.”
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내가 왜 전화하자고 했는지는 알지?]
넌지시 물어보는 윤희. 나는 예상하고 있던 내용을 입에 담았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 보려는 거지?
[맞아. 좀 신경 쓰였거든.]
하긴 그럴 만하다.
갑자기 문제집 3권의 똑같은 단원을 풀게 하고, 그런 뒤에 따로 불러내어 나갔으니까.
별로 안 친하다고 해도 같은 부원이니까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일의 전말을 알려주었다.
사실 이번 일은 쉽사리 눈치채기 어려웠다. 요 며칠 동안 규원이의 정답률이 엇비슷하게 나왔으니까.
“앞선 단원에서 나온 내용이 뒤에서도 자주 등장하거든. 그런데 어떤 문제에서는 그걸 맞춰놓고 뒤에서는 틀리고. 그런 게 여러 개 눈에 보여서 알아차렸어. 과제를 대충 찍어서 풀고 있다는 사실을 말야.”
윤희는  얘기를 묵묵히 경청해 주었다.
[꼼꼼하게 봤구나.]
“사실 완전히 확신했던  아냐.  90% 정도. 그래도 얘기해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한 번 찔러봤지. 곧바로 시인하더라고.”
[그래서, 이번에도 걔를 용서해준 거야? 내 느낌에는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
반문해 보았다. 최대한 평이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심술을 부리려는 속셈은 아니다.
그저 윤희의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출처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너희 둘이 부실로 돌아온 뒤로, 규원이가 고분고분했던 거랑 네가 평소처럼 가르치는 걸 봤을  네가 규원이를 용서했다고 생각했어.]
윤희의 말마따나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닌  같더라. 저번 주 일요일에 규원이가 갑자기 약속을 깬 일에 대해서도 네가 일언반구도  했잖아. 사실 난 네가 어느 시점에서는  얘길 꺼낼 거라고 예상했거든.]
웬일로 길어지는 윤희의 발언.
그만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던 중에 오늘 또 일이 터졌고. 따로 불러냈을 정도면 따끔하게 혼을 냈겠지. 규원이는 아마도 기세에 눌려서 사과했을 거고.]
“결론은?”
[영재 너는 규원이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야.]
“…….”
말문이 막혔다. 이보다  적확한 설명은 아마 없을 테니까.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분명한데 용서를 할 리가 없으니까.]
윤희의 말대로다.
나는 규원이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연히 용서도 하지 않았다.
“윤희야.  심리상담가 할래?”
[무슨.]
스피커 너머로 윤희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 진지하게 권하는 건데.”
[사실 이번 건도 쭉 지켜본 이규원과 너의 행동 패턴에서 유추한 것에 불과해.]
“너무 정확해서 소름 돋았어.”
[그거 칭찬이지?]
“응.”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애도 슬슬 눈치챘으면 좋겠는데.]
“걱정되어서?”
[너무 눈치 없이 굴면 남한테 민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깨우쳤으면 해서.]
윤희의 어조가 아까와는 다르게 쌀쌀맞았다.
나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오늘  역시도 꽤 인내심을 발휘한 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가르쳐 줬는데 과제를 찍기 신공으로 풀어오면, 내 노력은 뭐가 되는 건지.
“그러고 보니 윤희야. 저번에 사람이 변할 수 있냐고 물어봤잖아.”
[아, 그때.]
“네 생각은 어때?”
윤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아주 힘들겠지만 변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변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
“중립이구나.”
[소피스트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지. 인간의 인식이 만들어낸 것은 모두 불완전하다는 생각. 그러니까, 거기에 정답이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아.]
“소피스트?”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지식인 집단을 일컬어. 웅변술에 능했던 사람들인데,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과 윤리는 모두 불완전하다는 주장을 펼쳤어. 이 때문에 같은 시대에 살았던 소크라테스와 대립하기도 했고.]
사람이 책을 봐야 하는 이유를 몸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너는 규원이를 어느 쪽으로 봐?”
[변할 수 없는 사람.]
딱 잘라서 단언하는 윤희.
“나는 반대야.”
여기서 우리 둘의 의견이 나뉘었다.
“변할 거라고 믿어주면, 시간이 걸리더라고 변하게  있어.”
[음. 그래서 이번에도 참아준 거구나.]
담담한 어조.
그리고 윤희답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과제는?”
[반 정도 남았어.]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을 보았다.
벌써 40분 넘게 통화 중이라니. 내 생애 이렇게 길게 통화해 본 적이 없는데.
“이만 끊을까? 슬슬 공부도 해야 하고.”
윤희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얘기해 줘서 고마워.]
윤희가 전화를 먼저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내가 규원이를 믿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 역시도 누군가의 믿음 덕분에 공부를 잘할  있게 되었으니까.
애들한테 지지 않겠다는 오기와 더불어, 엄마의 믿음이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규원이를 믿어볼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이제  이상 장담할 수 없었다.

* * * *

일요일 스터디 모임을 무사히 보내고 나서 맞이한 월요일.
규원이는 교실에서 무척 활발한 활동량을 선보였다. 수업 시간에도 졸지 않고 최대한 버텼고.
반면 윤희는 쉬는 시간마다 책을 보는 대신 가만히 앉은 채로 휴식을 취했다.
계속 공부를 해서 그런지 피곤한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노트에 필기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윤희는 책상 위에 문제집을 펼쳐놓은 채 눈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도연이가 내 자리로 달려왔다. 품에 수학 문제집을 안은 채로.
“영재야.  이것 좀 가르쳐 줘!”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도연이가 문제집을 다이빙시켰다. 그 여파로 책상에서 콰앙 소리가 울렸다.
“깜짝이야!”
“앗, 미안. 나도 모르게.”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솔직히 규원이가 했으면 짜증부터 냈을 것이다.
나는 보고 있던 필기 노트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도연이가 어려워하는 문제를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했다.
“와! 덕분에 이해가 잘 됐어. 진짜 고마워.”
도연이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미소였다.
규원이의 공부를 봐주다 보니 나도 모르게 훈련이  걸지도 모르겠네.
나는 다시 필기 노트를 읽으려고 했는데, 윤희가 내 왼쪽 어깨를  찔렀다.
“무슨 일 있어?”
“나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윤희가 펼쳐놓은 문제집을 내밀었다. 도연이와 마찬가지로 수학 문제집이었다.
“물어보는 거 되게 오랜만인 것 같은데?”
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웬만한  혼자  수 있거든.”
“하긴.  혼자서도 잘하니까. 어디 보자…….”
윤희에게도 역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줬다.
“고마워.”
윤희의 눈썹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 * *

종례가 끝나자 나와 윤희는 부실로 이동하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 그때 규원이가 우리들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영재야, 영재야!”
“왜 그래?”
그러자 규원이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말했다.
“지아 언니랑 약속이 잡혔는데, 오늘 하루만 빠져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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