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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281/304)

돌아온 탕자

주환은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부모님과의 만남이 먼저였기에 주미와 수용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

“…….”

“제가 죽일 놈입니다. 욕심만 가득했고, 생각 없이 굴었습니다.”

“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어.”

주미가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기에 신 회장은 아들 소식에 깜깜했다.

“미국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비쩍 말랐어. 얼른 밥이라도 먹자. 응? 뭐 먹고 싶니. 우선 고기부터 좀….”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말에 또 울컥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하지만 이어진 아버지의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일전에 그 여자 데려와라. 내가 만나 보고 되도록 허락해 주마.”

“……!”

신 회장도 그간 많은 후회를 했다. 고작 여자 때문에 아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 결혼을 허락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과거가 무슨 상관이냐. 앞으로가 중요하지.”

“크흑. 흑. 아버지. 아버지….”

평생 고집을 꺾지 않을 줄 알았던 아버지가 고집스러운 마음을 돌려먹을 정도의 마음 아픈 시간이었다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죽일 놈입니다. 허으응.”

주환이 그 여자와 헤어졌음을 고백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등짝을 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너는!”

짝!

“그 여자랑 헤어졌으면!”

짝!

“당장 집으로 들어왔어야지!”

짝!

“…….”

주환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에 만나고 헤어진 제시에 관해서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다른 여자까지 만난 것은 부모님이 더 실망할 일이었다.

“…그럼 이제 나가지 않을 것이냐.”

“예. 아버지. 앞으로 평생 부모님과 살겠습니다. 물론…. 허락을 해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인이니까요.”

“…….”

“여보.”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밥부터 먹어라. 피골이 상접했구나.”

“…….”

“그래. 내가 너 좋아하는 소고기 구워 줄게. 나가서 밥 먹자. 응?”

용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용서였다.

주환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몸을 들썩이며 눈물을 떨궜다.

“가, 감사합니…. 크흐흥. 감사합니다. 허으응.”

겨우 눈물을 거두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주환은 여동생과 매제 그리고….

“…무셔워.”

“……!!”

여동생의 다리 뒤로 후다닥 숨는 작은 남자아이를 볼 수 있었다.

“오빠 조카야.”

“조카?”

남자아이는 엄마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가 얼른 다시 숨었다. 고사리 같은 손은 여전히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었다. 주환은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와아. 와아….”

“이름은 호원이야. 올해 3살.”

“…….”

주환은 시간의 흐름을 실감했다. 3년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호원아. 외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외삼촌?”

“응. 엄마한테는 오빠야. 할아버지 할머니의 아들.”

“…히잉.”

호원이는 아직 외삼촌이라는 존재가 어색하기만 했다.

“얼른 인사해야지?”

“…안녕.”

단 두 음절만 던지고 다시 엄마 뒤로 숨어 버리는 아이였지만, 주환도 주미도 나무라지 않았다.

“세 살치고는 괜찮지?”

“똘똘하게 말도 잘하네. 어쩜 저렇게 잘생겼어?”

세 살이 대화가 통하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다.

“날 닮았어.”

“그런 것 같다. 매제 얼굴이 안 보인다.”

3년 만에 만난 오빠였지만, 남매간에는 부모님과 같은 감정적 해우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주환은 평소와 같이 대해 주는 동생이 고마웠지만, 주미는 일부러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알고 있기에 묻지 않은 것이다.

“흠흠.”

수용은 괜히 헛기침했다.

“…매제도 잘 있었죠?”

“예. 형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대체 어디서 지내셨어요?”

“나야 뭐….”

주미는 수용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도 오빠의 사정을 물어야 함을 깨달았다. 오빠의 사정을 미리 확인한 건 수안 외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린 잘 살았는데, 오빠는?”

“나도 잘 있었다.”

주미는 오빠를 앞에 두고 거짓말하는 것이 불편해서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비쩍 말라서는…. 가방에 그건 뭐야?”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 소리가 신경 쓰였던 주미는 주환의 가방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휙 꺼냈다.

“야, 야. 그걸 왜….”

주환이 말리기도 전에 주미는 봉지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삼각 김밥? 밖에서 이런 걸 먹고 살았어?”

“…….”

아까 강 회장을 만나느라 편의점에서 샀던 저녁 식사를 그대로 가방에 넣어 둔 것이 이유였다.

“그러니까 몸이 그 모양이잖아. 엄마. 오빠가 뭐 먹고 살았나 보세요!”

“엄마!”

주미가 봉지를 들고 주방으로 달려갔고, 조카도 그런 엄마를 쫓아 달려갔다.

“에효.”

“몸보신 좀 하셔야겠습니다.”

“…….”

못 본 사이에 더 불어 버린 근육을 자랑하는 매제의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대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매제님. 강 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수용은 뜬금없이 형이 거론되어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강 회장님이 저를 집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집에 올 용기가 나질 않았는데, 경호원들을 시켜서 억지로 집으로 보내 주시네요. 하하.”

“그랬습니까?”

“덕분에 보고 싶었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강 회장님께 꼭 감사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예. 형님.”

그사이 주방으로 달려가 삼각 김밥을 고자질한 주미가 나와 말했다.

“오빠는 밥이나 먹어. 엄마가 오빠 몇 그릇 먹나 지켜보겠다니까.”

“다니까!”

호원이는 엄마의 뒷말을 따라 하며 엄마가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모습까지 따라 하고 있었다.

“…그래. 갈게.”

어머니 손맛이 아니라 주방 아주머니의 손맛이겠지만, 그래도 집에서 먹는 밥이다. 주환은 가족들의 감시 속에서 저녁을 들어야 했다. 특히 어머니는 숟가락이 주환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잘 씹고 있는지 입까지 벌려 확인할 태세였다.

“…저 체하겠어요. 같이 드세요.”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노골적으로 보진 않았지만, 곁눈질로 아들의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흠흠. 우리도 먹지.”

“쟤 얼굴 좀 보라고요. 대체 삼각 김밥은 뭐니? 그런 걸 먹으니까 몸이 그 모양이잖아.”

어머니는 괜히 잔소리를 추가했다가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그만해. 주환이 편히 밥 먹게 놔두고 우리도 먹자고.”

주환은 부모님의 깊은 사랑이 순간순간 감정을 자극했다.

지금도 입안에 들어온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밥을 먹다 말아버리면 후환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만 푹 숙이고 밥만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또 잔소리를 이어 가려고 했지만, 주미가 말렸다.

“너 반찬은 왜 손도 안 대고….”

“…오빠 좀 가만 놔둬. 엄마.”

그제야 어머니도 아들이 고개를 숙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씩 들썩거리는 어깨를 보니 아까 다 흘리지 못한 눈물이 남았던 모양이었다.

“어, 엄마는 화장실에 좀….”

어머니도 아들의 모습에 울컥해서 자리를 피했다.

“에효.”

주미의 한숨에 호원이가 식탁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외삼촌 울보야? 왜 울어?”

“아….”

세 살 호원이는 아직 눈치가 생길 나이가 아니었다.

유아 의자에서 내려간 호원이가 주환 옆으로 가서 닿지 않는 등 대신 팔을 토닥거렸다.

“뚝 하자? 착하지?”

항상 호원이 듣던 말이다.

“뚝 하면 까까 주께.”

주미는 후다닥 아들을 안아 자리에 다시 앉혔다.

“호, 호원아 외삼촌은 그냥 두고 우린 밥 먹자. 응?”

“산타 선물은?”

울면 산타 선물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다.

“외삼촌은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호원이만 엄마 아빠 말 잘 들으면 되는 거야.”

“엄마 아빠 최고.”

조카의 참견으로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던 주환은 이어진 호원의 말에 또 탄식과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어렸을 때…. 나도 그때는….’

눈물의 저녁 식사였지만, 호원이가 분위기를 살려 줘서 그나마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주환은 수용과 마주하고 있었다.

“매제는 언제 집에 들어왔어요?”

“…형님 소식 듣고 아내가 우리가 들어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두 분 생각하면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고요.”

수용의 입에서 본가에서 처가살이로 바뀐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임신하고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주환의 일로 크게 상심한 부모님을 보살폈고, 호원이가 태어난 다음에는 손주를 보는 기쁨을 안겨 드렸다.

이후의 일은 주환도 기사로 확인한 내용이었다. 교본 생명 보험에서 자리 잡은 여동생과 교본 증권 부사장까지 오른 수용의 일이다.

“…매제도 날 이해하기 어렵죠?”

재벌가에 하나뿐인 아들이면서 작은 불만으로 집까지 나간 못난 사람이었다.

“…이미 지난 일입니다.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됐습니다.”

“…….”

“이제 집으로 들어와서 사십시오.”

똑똑.

“나 들어간다.”

주미는 호원이를 어머니께 맡기고 둘이 대화하는 서재로 불쑥 들어왔다.

“자기야. 엉뚱한 소리 안 했지?”

“…내가 뭘.”

수용은 발뺌했지만, 주환이 고자질하듯이 말했다.

“매제가 나보고 얼른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던데? 지금까지 너희 부부가 부모님께 잘해 줬는데,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도 되겠어?”

집에 들어오기 전에 그간 집에서 부모님을 보살펴 준 동생 내외에 허락을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당한 이력이 있는 동생이라면 쉽게 허락할 일이 아니었다.

‘이젠 집에 들어오고 싶어도 허락을 받아야지….’

“당연하지. 그래야 내가 호원이랑 남편이랑 독립해서 편하게 살지 않겠어? 이제 두 분은 오빠가 모셔.”

“…….”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다.

“평생 모시라는 얘긴 아냐. 오빠도 나중에 결혼할 거잖아. 그때까지만 같이 살아.”

“나 결혼 안 한다. 평생 두 분과 같이….”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는 소리를 또 하네? 오빠 정신 못 차렸어?”

“…….”

“특히 엄마는 오빠가 빨리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아야 좋아하실 텐데? 지금 오빠 나이가 몇인지는 기억해? 35살이야. 여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아무도 안 만나준다고!”

“나 없는 동안 넌 입심만 세졌네.”

“아버지 어머니는 말도 못 꺼내실 테니까 오빠가 먼저 꺼내.”

“결혼?”

“그래! 빨리 선보게 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지금부터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주란 말이야.”

“…그래. 알았다. 내가 따로 말씀드리마.”

주환은 문득 제시가 떠올랐지만, 이미 흘러간 인연이었다.

‘미안. 제시. 아무래도 1년을 기다리기도 어렵겠다.’

“그리고 쉴 만큼 쉬고 회사로 복귀해. 아버지는 오빠가 눈앞에 있어야 좋아하실 거야. 내가 전략실로 넣어 달라고 말씀드릴게.”

“어디든 상관없지만, 전략실은 좀….”

예전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여동생이 상급자라도 상관없지만, 다른 직원들에게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기존에 일하던 곳이면 부담이 덜하리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원부서로 갈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 사람은 교본 생명 보험이 아니라 교본 증권에 있을 테니 오빠랑 마주칠 일도 없을 거고, 오빠가 전략실로 가도 나랑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난 본사에서 한동안 자리를 비울 테니까.”

“…나 때문에 네가 그럴 것까지는 없어.”

“나 이번에 잠깐 휴직하고 호원이 키우고 싶어. 그리고 둘째도 올해 말이면 나오거든? 누가 오빠 때문에 쉬는 줄 알아?”

둘째가 생긴 덕분에 아예 휴직을 하고 아이에게 집중할 생각이었다. 오빠가 회사에 들어와도 자신의 위치를 걱정할 이유가 없으니 이런 선택도 가능했다.

“내 조카가 또 생겨?”

“오빠가 결혼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늘었지?”

“…….”

‘제시. 안녕….’

여동생은 둘째를 낳는다는데, 아들이 결혼할 사람도 없으면?

‘부모님은 함부로 말도 못 하고 걱정만 늘겠지.’

이래저래 외통수였다.

“임신 축하한다. 주미야. 그리고 항상 고맙다.”

“…어색하게 왜 그래? 오빠가 언제부터 그런 소리 했다고.”

주미는 오빠가 생전 안 하던 말을 들어서 그랬지만, 수용은 주미의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신은 왜 그래? 형님이 임신 축하하신다는데….”

“…에휴. 알았어. 고마워 오빠.”

“아니야. 네가 그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언제 너한테 고맙다는 말이나 축하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야지.”

“…쉬어. 오빠. 호원이 이제 잘 시간이라 우리 가 봐야 해.”

“그래. 그래. 내일 보자.”

두 사람이 나가고 주환은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을 둘러봤다. 자신의 방은 예전에 집에서 나갔던 당시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청소만 하고 집기를 비롯한 잡동사니는 치우지 않은 모양이다.

“진짜 돌아왔네.”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집을 나갔던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나날들이 주르륵 기억을 스쳐 지나간다.

“너무 오래 걸렸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던 처음 그 여자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오래 함께했던 제시만을 추억하게 된다.

“너도 미국에서 잘살고 있겠지?”

.

.

.

제시는 이후 둘이 함께 살던 집에 갔다가 주환이 떠난 것을 알게 된다.

“평생 기다린다며!! 며칠을 못 참고 가냐?!”

주환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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