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묻은 양말
주환은 PC방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빨리 컴퓨터를 사야겠네.”
금방 취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국내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경험한 이력까지는 좋았지만, 나머지가 부실했다. 교본 생명 보험에서 고작 3년을 일한 것이 전부였고, 특히 나이가 문제였다. 35살의 나이에 비해 너무 짧은 업무 경력, 그마저도 한참 전의 일이다. 덕분에 기업에 넣는 이력서마다 서류 전형에서 광탈하는 중이었다.
“회사들이 아주 배가 불렀어. 나 정도면 괜찮은 인재 아냐?”
주환은 회사에 들어가 직장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대기업에 속하는 교본 생명 보험과 교본 증권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아무나 들어가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주환은 허탈한 마음을 안고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 김밥과 음료수를 사서 나왔다. 오늘 주환의 저녁 식사였다.
“…….”
한국에 와서도 집밥을 먹지 못하는 현실에 괜히 울적해졌지만, 지금은 참고 견뎌야 했다.
‘꼭 직장을 얻고 말겠어.’
그래야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있었다.
주환은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에 검은색 차량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눈길을 줬다. 조폭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주르륵 내리는 인물들을 보니 경호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관급 인사라도 왔나?’
특히 앞뒤로 보호받듯이 주차된 대형차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차종이었고….
“…….”
그 차에서 내리는 인물은 주환이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한 매제의 형이자 강운 그룹 현 회장 강수안이었다.
“여. 오랜만입니다. 사돈총각.”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잠깐 시간 됩니까?”
“없어도 내야죠.”
둘은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고, 안에는 둘 외에 경호원들만 존재했다.
“강운 그룹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말만 들었는데, 이제야 믿어집니다.”
“뭐 이 정도야.”
강운 그룹 정보력을 칭찬하는 말은 다음 말을 위한 페이크였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어째서 자신의 행적을 추적했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다. 한국에 입국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미안합니다. 내가 여러 경로로 주환 씨의 동선을 파악했습니다. 귀국이 얼마 전이었지요? 출입국 관리소에서 확인했습니다. 사돈댁의 일입니다. 제게 중요한 일이죠.”
핑곗거리 하나도 없이 주환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댁에서 많이 기다리실 텐데…. 언제 들어가실 겁니까.”
주환은 집 얘기가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나는 숨겨 드릴 수 없습니다. 사돈어른께서 걱정이 많으셔서 주환 씨를 찾고 있었거든요. 미국에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보고 싶어 하실지….”
당연히 사돈댁에는 얘기도 안 했지만, 능청스럽게 말하는 수안이다.
“아닙니다. 저를 기다리진 않으실 겁니다.”
단호한 주환의 말에 수안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부모님에 대한 미움이 남았습니까?”
“휴우…. 회장님도 다 아시는 모양입니다. 하긴 모르실 수가 없겠지요.”
집안 소식은 여동생을 통해 매제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그 소식은 당연히 수안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수안은 자신이 이렇게 나서는 궁극적인 이유를 입에 올렸다.
“내년에 아버지께서 대선에 도전합니다. 친족의 문제가 아버지의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막으려면 나는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확인했으니, 이를 해결하는 것도 제 몫입니다.”
수안이 왜 사돈집의 일까지 나서는지 명쾌하게 설명된다.
“아. 대선….”
대선으로 가는 동안 별의별 문제가 다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거기서 자신의 여자 문제와 가정사까지 등장하면 여동생이 겪을 어려움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사돈어른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 얘긴 내가 들을 말도 아니고 아버지가 들을 말도 아닙니다. 댁에 가서 부모님께 하시지요.”
“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없는 아들로 생각하라며 집을 나왔다.
부모님 가슴에 큼지막한 대못을 박고 나왔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저는 이제 아버지 아들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혈연은 끊는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면 미래까지 후회하게 만들지 마세요.”
과거를 후회한다?
‘…맞아. 난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
혈연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이길 바라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날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난 시간 동안 시시때때로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날의 일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화난 얼굴과 붙잡는 어머니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친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서 떠올랐다.
‘보고 싶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
울컥한 주환을 두고 수안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자식이 셋이나 있습니다. 내 자식들이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할 수도 있죠. 그럼 나는 아이들을 크게 나무랄 겁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용서와 사랑밖에 없습니다. 난 그 아이들의 아빠니까요. 이건 변하지 않아요. 내 자식은 내가 죽어서도 내 자식입니다. 사돈어른도 같습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집을 나갔어도 몸 건강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실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집에 안 들어가요? 잘못해서 얼굴을 못 보겠다고요? 더 큰 잘못을 하고 싶습니까? 언제까지 아이로 살 생각입니까? 지난 몇 년 동안 대체 뭘 한 겁니까?”
“…….”
그래서 취직이라도 해서 자립하고 싶었다. 그런 다음 부모님을 보러 가려고 했었다. 집을 나가서도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과거를 후회한다면 조건을 따지지 말고 그냥 가세요. 가서 다 잘못했다고 고백하세요. 부모님은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줍니다. 그래서 부모입니다.”
“크흡. 하, 하지만….”
주환은 감히 용서를 바랄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커 왔던가. 여동생이 홀대받는 걸 알면서도 우쭐한 마음밖에 없었다.
“당장 집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십시오. 내가 할 말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수안은 정말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 수안은 비서실에 추가로 지시를 내렸다.
“차 한 대는 남겨놔. 댁에 모셔다드려.”
“예. 회장님.”
주환은 한참이 지나 가게에서 나왔고, 자신을 기다리는 강운 그룹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정장의 두 사람은 주환의 퇴로를 막고 물었다.
“집으로 가십니까?”
“…예. 별로 멀지 않은데….”
주환은 수안과의 대화로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당장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요 앞입니다.”
하지만 주환이 탄 차는 원룸을 지나 큰 도로로 접어들었다.
“…집으로 간다면서요. 방금 지났습니다. 세워 주십시오.”
주환이 집에 간다는 말은 원룸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서초동으로 갑니다.”
“자, 잠깐! 아직 난 마음의 준비가….”
수안은 말 몇 마디로 풀어질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비서실에 강제적으로라도 데려가라고 추가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그냥 가십시오. 회장님 지시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회장님 명령을 100% 이행할 생각입니다.”
“…….”
그렇게 주환은 반강제적으로 집에 가는 차에 올랐다.
* * *
주환은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집 앞에서 막막한 심정이었다.
“하아.”
집 안에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과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패륜적인 말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내가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냐고.’
“안 들어가십니까?”
자신을 집 앞에 내려준 직원들은 주환이 집에 들어가는 것도 확인하겠다는 듯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들어가시는 것까지 확인해야 저희가 퇴근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눌러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됐습니다.”
버튼이 눈앞에 있었지만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그사이 뒤에 있던 비서실 직원이 얼른 끼어들어 버튼을 눌러 버렸다.
띵동!
“이, 이게 무슨 짓….”
-누구세요?
“신주환 도련님 모셔왔습니다!”
-네, 네?
“신주환 도련님 모셔왔습니다. 빨리 나와서 잡아가 주십시오.”
-옴마야. 사모님!!
“이, 이봐요!”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흐흐. 이래야 우리 일이 끝납니다. 들어가십시오.”
“아…. 젠장. 젠장!”
인터폰 내부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 밖으로 나온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타다닥.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문을 열고 보인 얼굴은 바로 아버지.
“……!”
신 회장이 문 앞까지 뛰어나와 직접 대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하얀색 양말을 신은 채였다. 그 하얀 양말이 흙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날도 추운데….’
“아, 아들!”
“…….”
평소 깔끔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신발을 신을 생각도 못 하고 아들을 보겠다는 마음에 가벼운 옷차림 그대로 거실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아버지 눈에는 원망이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무사한지만 걱정하는 부모의 눈빛이었다.
“…….”
털썩.
그 모습에 주환은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 도저히 아버지를 마주 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가득히 담긴 아버지 눈을 어찌 마주한단 말인가.
투둑. 툭.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목이 메어서 도무지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떨어졌다.
“끄윽. 끅.”
비서실 직원들은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조용히 사라졌고, 이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너! 너! 너…. 왜 이제 와 이것아.”
쩍.
어머니까지 밖으로 나와 주환의 등을 철썩철썩 때리고 있었다. 주환은 어머니의 호통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다. 자신의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어머니에 감사했다.
“끄윽. 흑. 어어엉.”
“아팠니? 어디 몸 아픈 데라도 있어? 아휴 마른 것 좀 봐.”
아들의 울음소리에 원망스럽게 등을 때리던 손도 멈추고 아들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는 어머니셨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주환의 마음 깊은 곳을 자극했다.
“흐어어어어엉.”
부모님의 사랑은 자신이 측량하기도 힘들 만큼 깊고 깊었다. 언제나 그래오지 않았던가. 사랑받고 자라온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난 대체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야.’
“끄읍. 죄, 죄송…. 죄송합…. 흐어엉.”
“아들. 어서 일어나. 바닥이 차. 응?”
몇 년 만에 만난 아들이 찬 바닥에 앉아 있는 것도 가슴 아픈 부모였다.
“됐다. 들어가자.”
아버지는 아들의 사과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무사하게 돌아오기만 바라고 있었다. 오늘은 그 바람이 이루어진 기쁜 날이다.
“형님. 들어가시죠.”
수용이 나와서 주환을 부축했다.
“매제….”
“안에서 말씀하세요. 밖이 춥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도 그렇지만, 형님도 감기 걸리시겠어요.”
주환은 힘없이 걸음을 옮겨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주환이 나가진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주환의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이제 안 갑니다. 죽으나 사나 부모님과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