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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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 주자

근래 수안은 출퇴근이 곤혹스러웠다.

-부회장님. 오늘은 강운 그룹 본사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먼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 기자들이 또….

초기 포털 사이트와 방송으로 언론의 흐름을 비틀 수 있었지만, 기자들의 취재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방송 이후 주로 집무를 보는 강운 그룹 사옥 앞은 많든 적든 항상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질문은 서면으로만 받는다고 해.”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던질 거면서 왜 자꾸 오는지….’

평소 어디에 돈을 쓰느냐, 총자산이 얼마나 되느냐, 미국 대통령과는 얼마나 친분이 있느냐, 왜 시알리스의 출시를 서두르지 않느냐는 질문까지 있었다.

기자들의 이런 행태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 주며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지만, 윗선의 지시로 무작정 들이대는 기자들에게 이성적인 대응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대답을 듣자는 건지 그냥 소리를 지르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이후 기자들과의 만남을 단절하고 간접적으로만 대응하는 중이다.

“난 펜타그램으로 갈 테니까 장 비서도 그쪽으로 와.”

-예. 부회장님.

강운 그룹 사옥에 진을 치던 기자들이 요즘은 더블 스타 사옥에도 자주 출몰했다. 아직 외부에 덜 알려진 펜타그램은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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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이 펜타그램 집무실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영성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어라? 장 비서가 연락했어?”

“예. 최우선적으로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나 대신에 더블 스타에 엉덩이 붙이고 있어야지. 이제 더블 스타 부회장인데.”

해가 지나 부회장으로 승진한 배영성이다. 더블 스타 시무식에서 취임식을 겸했다. 강운 그룹에서는 전무이사가 되었고, 이곳 펜타그램에서는 여전히 사장이다.

“경영진은 오히려 밖에 돌아다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돈을 벌어오죠.”

수안부터가 그렇게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 앉아만 있다고 알아서 회사가 발전하겠는가. 위에서 움직여 기업이 나아갈 큰 틀을 만들어 주고 이후에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해야 회사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안을 보면서 경영을 배운 배영성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제 부회장 달았다고 막 들이받네?”

“하하. 저 아니면 회장님께 들이받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김현성, 최학주 정도가 있겠으나 배영성 만큼 편하게 수안을 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됐고. 뭔데 여기까지 왔어?”

“역시…. 이방효 사장이 난리를 피울 만했네요. 애플과의 협약과 회장님 휴가 건 말입니다.”

“…아. 깜빡했다.”

BE 인베스트먼트 건을 무마하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애플과의 협약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시간 있지 않나?”

잠시 잊기는 했지만, 시일은 남아 있었다.

“이렇게 시끄러울 때 국내에 계시지 말고 잠시 외부에서 머리를 식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자들 피해서 출근하시는 것도 하루 이틀이죠.”

“…진즉에 얘기하지.”

수안도 해외로 나가면 편하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귀찮은 일들을 피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겠지만, 마무리를 위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자들의 악다구니는 마무리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강운 전자 김 사장하고 팬탁 박 사장은 미리 출국했던가?”

“예. 시제품 들고 출국했습니다. 사전 조율이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가셔서 서류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가야지.”

“전용기 대기시키겠습니다.”

“이번엔 애플 들렀다가 바다 위에서 조용히 쉬고 오면 되겠다.”

이방효 사장이 대절한 호화 요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사모님 집안 결혼식은 다녀와서 참석하시면 됩니다.”

“아! 형님 사업은 어떻게 되고 있어?”

임영수와 한정희는 진짜 사업을 시작하려 마음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둘이 사업을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사업 초창기엔 수안이 도와주기로 했었다. 수안이 도와준다고 해서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일이라 배영성이 비서진들과 함께 돕는 중이었다.

“작은 기업을 인수하는 방향으로 전환했습니다. 사업을 새로 일으키려면 시일이 오래 걸리니까요. 사업 전체를 매각하려는 적당한 규모의 화장품 제조 기업이 있어서 인수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허 출원부터 도와야 할 거야. 아이템이 나름 괜찮거든.”

‘회장님이 이렇게 평가하신다면 사업의 성공 여부는 따질 것도 없겠어.’

배영성은 수첩에 특허라고 적어 넣으며 말했다.

“예. 해외 특허까지 신경 쓰겠습니다.”

“그리고…. 배 부회장은 휴가 언제 가?”

한동안 휴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막 부회장으로 취임한 배영성이다. 사장이 되었을 때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는데, 부회장이 된 지금은 더했다.

“…올여름에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영수 형님 일은 비서들이 알아서 도와줄 텐데, 이번에 나랑 같이 요트 타러 가지 않을래? 가족들도 다 같이.”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나중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랑 불편할 것도 없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배영성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인 일이 있습니다. 근래 부동산 매입을 진행 중이라….”

김현성 사장을 통해 알아봤던 건물 계약이 곧 진행된다. 아내에게만 맡길 수 없는 일이라 자리를 비우기 곤란했다.

“어이쿠. 우리 배 부회장이 건물주 되는 거야?”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아내가 용케 허락했네?”

“아내가 먼저 원한 일입니다.”

“오. 역시 감각이 있으셔.”

“앞으로 빌딩 운영하면서 나오는 돈은 아내가 하고 싶은 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미래의 월드 스타는 어쩌고?”

주원이는 미래에 빌보드 차트에 오를 귀한 몸이다.

“어휴. 주원이는 아직 멀었습니다.”

“미리미리 영어 공부 시키고 춤, 노래 연습도 해야지.”

“하하하하.”

배영성과 수안은 가족과 아이들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소소한 서로의 이벤트에 웃고 떠들었다. 배영성은 수안에게 친구 이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이 차이는 상당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붙어 있었다.

“배 부회장 와이프는 정원이 엄마랑 좀 같이 다녀야겠다. 그래야 사모님들이 어떻게 놀고 무슨 취미를 갖는지 배우지.”

“사모님만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그것도 좋겠습니다.”

한껏 들떴던 BE 인베스트먼트 뉴스도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었다.

* * *

미국 애플 본사에 도착해 협약서에 사인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전자 김 사장과 팬탁 박 사장이 어떻게 스티브를 구워삶았는지 더 많은 양보가 담긴 계약서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사인하기 전에 따로 둘을 만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스티브 사장이 우리 제품을 확인하고 기함했습니다.”

“이정도 제품을 개발했다고 예상하지 못한 듯합니다.”

회사 전용기로 애플로 날아간 김 사장과 박 사장은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시제품을 먼저 보여 줬다. 스티브가 무조건 제품을 먼저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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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의 실물을 확인한 스티브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머리에 담아 둔 디자인과 기기의 성능이 모두 강운 전자에서 만든 MP3 장치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에 빈 공간이 없어. 작은 공간에 이렇게 가득 채워 넣다니. 강운 전자에서도 가능했다니….’

“보는 김에 이것도 확인하시죠.”

“What the….”

작은 기종 몇 개는 그래도 자신이 생각한 제품의 범주 안에 있었기에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하지만, 최신 개발 제품은 분해하지 않았음에도 아찔함을 선사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심플한 디자인.

전면부에는 동그란 버튼 하나만 보였고 옆면에 작은 버튼이 있었다.

전면부 아래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고 화면에 보이는 버튼을 옆으로 밀자 반짝이는 창으로 드넓은 세상이 드러났다. 윈도우를 처음 만난 도스 사용자의 마음이었다.

“Wow….”

스마트폰을 만들기 직전의 단계인 MP3기기였다. 풀 LCD 스크린이 채택되었고 정전압식 터치스크린이 적용된 이번 기기는 일반적인 레벨의 MP3와 격을 달리하는 제품이었다.

“작동 원리는 개인 컴퓨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은 인터넷과 연결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다음 세대 제품에서는 Wifi가 적용된 모델로 확정하고 있죠.”

“안에 보이는 아이콘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단독 프로그램입니다. 아직까지 개발된 프로그램이 많지는 않지만, 게임이나 사진 보관 등이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업데이트는 팬탁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가능하죠. 지금은 유선으로 연결해서 업데이트를 하지만 2세대부터는 무선으로 업데이트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것도 이번에 출시합니까? 저희가 생산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이 제품은 한국에서만 생산할 계획입니다. 당장 출시할 생각도 없고요.”

“김 사장님. 연말 출시로 예정했었죠?”

“맞아요. 스펙 차이가 너무 커서 같이 출시되면 다른 제품들이 묻혀버리니까요.”

“이것도 생산하게 해 주십시오.”

스티브의 말에 둘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안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애플의 공장은 이 제품을 생산할 수 없어요. 고도의 숙련공들이 생산하는 제품입니다. LCD 수율도 아직 낮은 상황이죠. 한국에서 생산해도 단가가 높은데, 미국까지 부품을 보내 생산하면 단가는 더욱 올라갑니다. 애플은 이번 제품을 대신 생산해 주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번 강운 전자 MP3 제품의 마케팅 비용은 애플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이 제품도 저희가 생산하고 싶습니다. 확실하게 팔아 드리겠습니다.”

“총괄 판매까지 하겠다는 말입니까?”

“애플의 제품도 연말에 출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

스티브는 강운 전자의 최신 제품을 보고 깨달았다.

‘이건 지는 싸움이야.’

붙어보지 않아도 뻔히 그려진다. 강운이 이번에 출시한다는 제품부터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했다. 여기에 최신 제품이 연말에 출시된다면 애플의 음향 기기는 소비자에게 외면받을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마케팅을 진행해도 저건 못 이긴다. 절대로 못 이겨.’

그리고 PC 컴퓨터의 시대가 대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손 안의 컴퓨터가 생겼어. 이 제품은 혁신이야.’

스티브는 이번 계약을 진행하기 전에 한국에 관해 공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남입니까?”

“네?”

“그게 무슨….”

“BE 인베스트먼트가 강운 전자 부회장이신 스티븐 회장님의 소유로 밝혀졌고, BE 인베스트먼트는 애플의 주식을 15%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계열사라고 봐도 무방하죠.”

“아….”

“그래도 15%는 너무 적은데….”

“스티븐 회장님은 지금 지분 비율로 만족하지 않으시겠죠. 추가 지분을 발행해서라도 지분 비율을 높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애플이 계열사나 다름없다면 생산 대행을 맡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자세한 사항은 지금부터 논의합시다. 애플은 무조건 양보하겠습니다. 대신 이번 계약에 저 제품의 생산을 꼭 넣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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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셔플과 나노 제품의 생산과 후일 터치의 생산까지 계약서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얼씨구? 그럼 애플은 뭐 한답니까? 우리 제품만 생산하면 저들 제품은 언제 생산해요?”

“급하게 개발을 진행해 완성단계에 있던 MP3를 전면 중단한다고 합니다.”

“…….”

기존 제품의 개발을 중단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터치 제품을 본 스티브가 이대로 개발을 접겠는가. 기존 제품 개발을 중단한 이유는 새로운 도약을 위함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사업을 포기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잠자는 괴물을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네.’

“미국 특허는 확실합니까?”

“예. 유사한 제품을 생산하면 모두 저희 특허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스티브에게 확실하게 일러 두세요. 우리는 10년 뒤를 내다보고 제품을 개발하고 있고 누구에게도 시장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요.”

“예. 부회장님.”

‘이대로 놔두면 어디까지 우리를 괴롭힐지….’

그래도 안심이 되질 않는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써야….’

수안은 공동 개발까지는 허용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 애플이 양보를 많이 했으니 당근을 제시할 필요도 있겠군요. 국내로 애플 직원들을 불러서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을 보여 주고 공동 개발을 제안해 보세요.”

“……!!”

“……!!”

눈으로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수안은 눈을 부릅뜬 둘에게 말했다.

“아. 공동 개발이라고 해서 너무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스티브와 애플의 엔지니어들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게다가 시장 초기엔 우리가 스마트폰을 선점하겠지만, 언제까지고 독주할 수는 없습니다. 후발 주자들이 뒤를 바짝 쫓아오겠죠. 우리와 우호적인 애플을 후발 주자로 만들어 둔다면 미국 시장에서 독점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동개발을 진행해도 애플의 지분은 없을 겁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술을 보면서 배워 가는 입장이니까요.”

스마트폰의 첫 시작은 블루 오션이겠으나 레드 오션으로 변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특히 치고 올라오는 중국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어디까지 공개할까요.”

“강운 패드 불가. 아직 패드가 나오려면 멀었는데, 갑자기 따라오면 격차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강운 스마트폰 프로그램도 불가. 이 부분은 우리 계열사가 선점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스마트폰의 판매로 인한 수익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프로그램으로 인한 수익이 더 클 겁니다. 성장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죠. 나중에 프로그램 개발 툴을 공개하겠지만, 선점은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강운 워치도 불가…. 그냥 1세대 스마트폰만 공개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예. 부회장님.”

“그 정도면 나쁘지 않겠습니다.”

이후 계약은 간단하게 끝났다. 자리에 앉아 계약서에 사인하고 악수하면 계약은 끝이다. 나머지는 두 사람과 스티브에게 맡겨 놨다. 이러려고 높은 자리에 있지 않겠는가.

“벌써 가십니까? 스티븐 회장님.”

“일전에 스테판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것 같은데요? 당신하고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립니다.”

“하하. 제가 깜빡했습니다. 스테판 회장님.”

“난 오늘부터 휴가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전권을 가진 두 사람과 논의하세요.”

아현이 아이들과 요트가 정박한 해변으로 먼저 떠났다.

남편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애플과 제게 보여 주신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잊지 마세요. 나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스티브. 특히 당신은 내게 생명을 빚졌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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