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언제 출시하는데?
정신병자라는 말에 사회자가 얼른 나섰다.
“조태주 대표께서는 말씀을 조금 순화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손을 들어 알았다는 제스처를 보인 조태주를 확인하고 다른 패널에게 눈을 돌리는데 귀에 꽂은 인이어로 지시가 들어왔다.
-김재호 아나운서. 나 최정무 사장인데, 길게 끌고 갈 것 없어. 지금부터 오픈하고 패널들 헛소리 못 하게 만들어.
사회자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큐 시트를 읽어 내렸다.
“많은 국민이 스티븐 회장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합니다. SBS 취재진은 시청자와 대한민국 국민의 요청에 따라 스티븐 강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밝혀냈음을 이 자리에서 먼저 밝히는 바입니다.”
“……!!”
“……!!”
“사실 밝혀냈다는 말에 어폐가 있겠군요. 스티븐 회장 본인이 직접 연락해 알게 되었습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스티븐 회장이….”
“…한국의 방송사인 SBS에 연락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전문가 패널이 웅성거렸다.
“SBS에서는 미국 방송국과 협력으로 미국 BE 인베스트먼트 CEO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지금부터 영상으로 확인하시겠습니다.”
미국 방송국의 리포터가 BE 인베스트먼트 빌딩 앞에서 BE를 소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실감 넘치는 카메라 워크를 보여 주던 방송은 BE 인베스트먼트 최고 경영자가 일하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영어로 진행되어 한글 자막이 지원되던 방송에 이방효가 나타났고, 익숙한 언어가 귀에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미국 BE 인베스트먼트의 경영을 맡은 이방효입니다.]
“…….”
“…….”
패널 중 일부는 BE의 최고 경영자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국어가 유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 많은 고객이 BE 인베스트먼트 서울 지점과 거래하고 계십니다. 이 자리를 통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스티븐 회장님께도 항상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숭고한 결정 덕분에 고국이 금융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제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패널들이 아연한 표정으로 흘러나오는 방송화면을 보고 있었다.
“스티븐 회장이 한국에 있다고?”
“한국의 금융 위기와 관련이 있어?”
리포터가 스티븐 회장과의 만남에 관해서 묻자 이방효는 다시 한국어로 답변했다.
[제가 처음 한국에서 회장님을 만났을 때가 아마 16년 전쯤일 겁니다. BE 인베스트먼트가 회장님의 손으로 세워졌으니 당연한 일이죠. 당연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 회장님의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당시 회장님 나이가 고작 14살이었거든요. 훗.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14살?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올해 나이가… 서른?”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저는 일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회장님이 저를 받아 주셔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중략… 많은 사람이 저를 투자의 귀재라고 추켜세워 주지만, 사실 지금까지 BE가 이룩한 투자 성과의 대부분은 회장님의 결정이었죠. 저는 지시를 이행한 중간 관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르더군요. 아. 천재라는 설명도 회장님을 묘사하기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더 나은 수식어를 찾아봐야겠군요.]
여성 리포터가 14살의 회장에 관해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사실 회장님은 투자 회사보다 다른 방면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투자 회사를 먼저 시작하셨으니 일의 선후가 약간 달라지겠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방효가 입을 열었다.
[스티븐 회장님은 한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회사를 경영하신 이후에는 제게 BE의 일을 맡기고 경영에만 온 힘을 쏟아붓고 계십니다.]
“누구지? 올해 서른 살의 경영자라면….”
“어, 어라?”
한 사람은 번뜩 누군가를 떠올렸다.
‘서,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스티븐 회장님은. 아니, 강수안 회장님은 여러모로 참 대단한 분입니다.]
“……!!”
“……!!!”
대한민국에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다.
“…….”
미국 방송의 리포터도 입만 뻐끔대며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올림픽에 나가실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죠. 저로서는 회장님의 기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나가서 전부 금메달을 따오시더군요. 여러모로 예측하기 힘든 분입니다. 본인은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광폭의 행보를 보이지만, 시류를 읽고 정확한 투자를 감행하는 눈은 누구보다 뛰어난 분입니다. 저는 회장님을 이해하는 걸 포기했습니다. 특히 얼마 전 그래핀 개발 소식을 듣고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저 같은 일반인이 이해할 범주를 한참 넘어선 분입니다.]
‘강운 그룹이 뒤에 있을지도….’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방효의 말이 이어진다.
[회장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회장님은 BE를 설립하고 일정 수준에 올릴 때까지 집에 얘기도 안 하셨다고 하더군요. 강운 그룹 강운모 회장님이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고 목덜미를 잡으셨다 들었습니다.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20대가 되기도 전에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평가받는 강운 그룹보다 더 거대한 기업을 키워냈으니까요. 10년도 걸리지 않았죠.]
“허허….”
인터뷰가 끝난 다음 방송은 수안의 기획대로 계획대로 흘러갔다.
지금까지 BE가 한국에 보인 호의적인 태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패널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홍복입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어지간한 국가의 경제 수준과 맞먹는 거대 투자 회사입니다.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수월하게 이겨낸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지요. 강 부회장님이 왜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갔겠습니까. 바로 BE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다 미국 BE로 끝이 아니지요. 일본 BE의 규모도 미국 BE에 못지않게 거대합니다.”
“…아까 망상이니 정신병자니 했던 분은 왜 조용하시죠?”
“…….”
“열기가 너무 과열되는 것 같습니다. 잠시 SBS 취재원들이 파악한 자료를 보시면서 BE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TV 화면은 BE의 자산 규모와 운영 자산이 어디에 투자되고 있는지 그래프와 도표로 보여 주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 있는 호텔 체인과 리조트가 눈에 띄었고 방송사 지분을 포함해 유망 기업의 지분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금융 업계에서는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의 지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전 개발을 위한 회사도 있었고, 확보한 희토류 광산도 상당했다.
특히 지금까지 보여 준 BE의 수익률 변화와 성장세는 따라올 투자 회사가 없었다.
“제가 봐도 정말 대단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시총 1위에서 50위까지가 아니라 100위까지 더해도 BE와 비견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미국 정부가 왜 BE의 지분을 취득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패널들이 나섰다.
“…제가 알았던 BE가 아닙니다. 그사이 또 성장했습니다.”
“보통 투자 회사 수익률이 50%를 넘기기 쉽지 않은데, 여긴 연간 수익률이 최저점을 기록한 연도의 수치도 100%를 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의 지분이 대단한 수준입니다. 저 정도라면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국 5대 금융사 중에 세 곳이 한 사람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저는 제약 회사들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바이오 에보트는 시알리스를 출시한 회사가 아닙니까? 파이자 제약의 비아그라와 경쟁하고 있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조태주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한국엔 언제 출시하는 겁니까?”
“…….”
“…….”
“…….”
질문에 답을 할 사람도 없거니와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질 상황도 아니었다.
조태주는 패널들의 눈총을 받으며 쭈그러들었다.
“아, 아니. 국산 제품이면 애용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해서….”
* * *
방송이 끝나지 않았지만, 인터넷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SBS 특집 방송. 시청률 폭발.]
내용도 없는 기사에 댓글만 무수히 달리고 있었다. 가장 많은 엄지를 받은 댓글은 기자에게 일이나 하고 기사를 쓰라는 욕이었다.
┗기자들 일 안 하냐? 방송 받아쓰기라도 해서 기사를 올려야지! 새꺄! 고작 제목 하나만 올리고 끝이냐?
다음은 돈에 관한 댓글이다.
┗미국 정부가 산정한 BE 가치는 1조 6천억 달러. 현재 1,260원대를 횡보하는 환율로 계산하면 2천조. 2천조라니…. 내가 쓰고도 믿기지 않는다.
마지막은 조태주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추천한 댓글이었다.
┗그래서 언제 국내 출시하는데?
* * *
방송이 끝나고 다음 날. 본래 정부에서 나설 일이 아니었지만, 사전에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청와대 대변인이 프레스룸에 등장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 건은 이미 정부에서 파악하고 있었으며, BE 인베스트먼트에 관련한 사항은 적법한 조세법률 절차에 따라 관리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미 BE 인베스트먼트는 상당한 세금을 납부하였고,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IMF로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아 준 금을 BE에 맡겨 두고 있으며 조만간 회수하여 국고로 편입할 예정입니다.”
짧은 발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들어왔다. 대비한 질문이 나오면 적당히 대답했지만, 어처구니없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한동 일보 문익상입니다. 미국 정부처럼 한국 정부도 BE 지분을 취득할 계획이 있습니까?”
“…미국 정부는 BE 지분 25%를 얻기 위해 4천억 달러를 사용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한해 국가 예산이 100조를 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BE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자가 한국인이라는 점도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나머지는 보도 자료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조 원을 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약 790억 달러.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지분을 넘겨줘도 5%가 채 되지 않는다. 하물며 국가 예산은 정해진 쓰임이 있다. 아무리 예산을 쥐어짜도 1조 원 빼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변인은 곤란한 추가 질문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프레스룸을 빠져나갔다.
* * *
수안은 청와대 대변인 발표가 끝나고 전화를 걸었다.
“괜히 수고롭게 해 드렸습니다. 대통령님.”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논란은 피할 것 같습니다.”
BE와 관련한 일이 부풀기 시작하면 직접 나서도 해결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랬다간….’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꿈이 물거품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주는 바람에 조기에 진화할 수 있었으니 감사 인사 정도는 남겨야 했다. 거기다 세금납부가 끝났고 적법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했으니 앞으로 BE 인베스트먼트 관련 세금 문제로 골머리 썩을 필요 없었다. 두루두루 고마운 일뿐이다.
“어떻게 이번 일을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 덕분에 내 인기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잖나. 내년 대선도 무난할 것 같아.
“거기까지 내다보십니까. 하하하.”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도 차기 대선을 생각한다.
수안은 그가 정치인이라는 점을 상기할 수 있었다.
-자네가 많이 도와줘.
따로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예. 성심성의껏 뒤에서 지원하겠습니다.”
* * *
-큰 짐 덜었어.
“예. 선배님. BE를 밝히고 났더니 이렇게 홀가분하네요. 선배님도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엔 이현창이다. 국정원에서 수안의 정보를 감추기 위해 노력해 준 사람이었다.
-자네가 회사를 가진 걸로 왜 정부가 잘했다는 소릴 듣는지 모르겠어.
수안이 BE 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라는 것이 알려졌는데 정부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리 떨어지지 않던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히려 오르고 있으니 이현창에겐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닐 것이다.
“지지율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선배님은 이번 대선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통령 지지율과는 다르게 선거는 한신당이 꽉 잡고 있는데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주변에선 난리란 말이네. 정치학자들이나 정치부 기자들이나 전부 내가 될 거라고 시끄러운데 정작 나는 차기가 아니라 차차기를 노리고 있잖나.
“두고 보시면 압니다. 묫자리 찾아가시지 말고 서울시장으로 표심을 다지고 있으세요.”
-야. 말을 해도 묫자리라니!
이제 이런 농담을 편하게 던질 정도로 편해진 사람이다.
“푸흐흐. 왜 발끈하세요? 아직 정정하신데요.”
-큼.
“부족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국정원 그만두면 얼굴이나 보자고.
“예.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