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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찰 (138/304)

유찰

기화 자동차 2차 입찰도 유출로 끝나고 말았다. 기화 입찰 사무국에서도 “이른 시일 내에 후속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입찰 제안서를 제출한 강운, 대현, 삼디와 해외 BE 인베스트먼트가 모두 부채 감축을 요구하며 실격 사유에 해당하는 부대 조건들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화 자동차의 부채는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수안에겐 오히려 최적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다. 이면 합의를 통해 이미 일정 부분 부채 탕감을 약속받았지만, 무리한 요구 조건이라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기업이 부채 탕감을 요구해 입찰이 무산될 정도라면 수안의 요구는 적정한 선으로 보여질 수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있을 수안이 아니다.

“이번에 확인하셨겠지만 제 요구 조건이 무리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대통령님.”

-…그래. 결국 3차까지 가는군.

“채권단 정리도 서두르셔야죠? 늦어지면 이후 3차에서도 무산될지 모릅니다.”

-알겠네. 내가 힘은 써 보겠지만, 채권단이 말을 안 들어서 말이지….

이미 협의한 사항임에도 확답을 피하고 있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구분하실 분이로세. 액션을 보일 때로군. 마침 기회도 좋고….’

수안의 생각을 모르는 대통령은 자신이 묻고 싶은 것만 묻고 있었다.

-그리고 이현창 총재가 국정원장으로 오른 것은 확인했나?

“대통령께서 어련히 잘하셨겠죠. 총재님께 축하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 덕분에 일이 해결됐다고 생각하고 있어. 정치에 너무 거리를 둘 필요는 없네.

“앞으론 기업인으로서만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IT 기업 발전에 힘써 주게. 자네가 IT 업계에서 선두 주자나 다름없잖나. 휴대 전화 생산 라인을 갖추고 컴퓨터를 공급하는 데다 포털사이트까지 선보이고 있으니…. 관련 지원이 시작될 테니 그냥 받아 두시게. 이 부분은 보답이라기보다 국내 IT 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지원책일세.

자발적인 도움까지 거절할 필요 없었다.

“회사의 발전이 나라의 발전이 되도록 기업 경영에 힘쓰겠습니다.”

-나도 부탁함세. 그리고 이제 금 모으기 운동이 끝물이야.

BE에서 금을 사야 하질 않느냐는 물음이다.

“약속은 잊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모인 금은 모두 BE 인베스트먼트에서 국제 시세로 매입합니다. 나중에 재매입을 원하실 때도 국제 시세에 따라 주시면 됩니다.”

-또 도움을 받겠군.

훗날 얻을 이득을 생각하면 도움이라 할 수도 없다.

“달러도 야금야금 들여오고 있습니다. 헤지 펀드 자금이 국내 금융 시장을 집어삼킬 일은 없을 겁니다. 규제는 IMF에서 풀어 달라는 대로 풀어 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막습니다.”

-…BE와 더블 스타에 지원할 부분을 더 찾아봄세.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이제 급한 불은 다 껐다. 기화 차 3차 입찰은 또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이 붙들고 있을 필요도 없다.

미국에 갈 시간이다.

이방효 사장이 이미 파티 일정을 잡아 놨고, 수안과 아현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대통령에게 남길 경고를 위해 전화를 들었다.

“배 사장. 잠시 와 봐. 이번 계열사 사업 보고 자료도 같이 가져와.”

-예. 회장님. 자리로 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영성이 집무실에 도착했다.

“제시카에게 연락해서 이번에 미국으로 출국할 때 같이 가자고 해.”

“기화 3차 입찰이 남았습니다만.”

“어차피 다녀오는데 며칠이면 될 거고, 우리가 액션을 보여야 “앗 뜨거워.” 할 것 같아.”

“이해했습니다.”

BE 인베스트먼트의 대리인으로 기화 자동차 입찰에 참여하고 있는 제시카를 미국으로 보내며 부채 탕감을 압박하는 것이다. BE 인베스트먼트가 입찰에 불만이 있어 미국으로 출국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본인까지 미국에 가 버리니 BE와 수안의 관계를 아는 대통령도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리인 바꾸자고 해. 제시카는 그냥 돌려보내고 다른 사람으로 바꿔.”

제시카가 워낙에 관종이라 자꾸만 TV에 얼굴을 비추려고 한다.

본래 의도대로 삼디 그룹에 방심을 심어 주고 정부와 입찰 사무국에도 BE가 만만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이런 포장이 필요 없었다.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줄 대리인이 필요했다.

“예. 회장님. 이방효 사장에게 한국어가 가능한 대리인을 준비해 두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콜.”

‘그럼 이제 남은 사업은 인터넷이군.’

“요즘 더블 스타 계열사들 상황은 어때?”

배영성은 최근 계열사 사장들에게 받은 경영성과 자료를 꺼내 보여 주며 요약해 설명했다.

“다움과 네이보가 출격해 가입자를 끌어오고 있습니다. 야후가 작년 말에 상륙했지만, 국내 포털 양대 산맥은 이미 우리 계열사가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야후 외에 다른 포털은 넘볼 수 없는 수준이고 적절하게 재미난 TV 광고를 집행하고 있어 꾸준하게 가입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네이보는 블로그, 다움은 카페가 강점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미니홈피를 가지는 것이 유행인데 이 역시도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네이보와 다움을 통해 접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외부에는 네이보와 다움의 콜라보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대준 대통령이 괜히 수안에게 IT 업계의 선두주자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광고는 신선한 얼굴이 필요해. 반복되는 재미는 물리기 마련이니까. 광고 모델은 내가 골라서 알려 준다고 해.”

“예. 회장님.”

배영성은 수안에게 다음 자료를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갔다.

“국내 PC 보급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SJ 컴퓨터의 성장세가 두드러집니다. 주요 대도시는 물론 지방 소도시에도 SJ 컴퓨터 대리점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장 사장이 소규모 대리점 점주 모집에 대한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불가. 대리점은 무조건 직영이야. 소규모 대리점은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들에 눈탱이나 칠 놈들이지. 차라리 PC 무료 교육을 늘리라고 해. 어지간한 문제는 컴퓨터를 구입한 고객이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10만 원짜리 메인보드를 수리했다고 20만 원이 넘는 수리비를 받아먹기도 한다. 실제로 수리가 이루어졌을까? 메인보드 수리는 전문가도 쉽게 장담하기 어려운 섬세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먼지나 한번 털어내고 고쳤다고 수리비 조작을 일삼는 소규모 대리점 사장들이 수두룩할 터였다. 이런 소규모 대리점을 허락해 SJ 컴퓨터 이름에 먹칠을 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경쟁자들 때문에 장 사장이 몸이 달았던 모양입니다. 이 건은 반려하겠습니다.”

“팬탁은 요즘 어떻지?”

“고급화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명품가방 브랜드와 콜라보한 루이스카이폰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판매 제한으로 쉽게 살 수 없는 휴대 전화라는 인식까지 심어 줬습니다. 디자인과 내구성 그리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까지 삼박자를 갖추고 있어서 가격을 높여도 잘 팔립니다.”

“판매 제한은 아직 생산 공장이 부족해서 그런 것뿐인데 말이지….”

팬탁의 공장이 아직 삐삐와 휴대폰을 동시에 생산하고 있어서 생산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수안은 여기서 고급화 전력과 판매 대수 제안 전략을 가지고 나와 마케팅에 대박을 낼 수 있었다. 한송 텔레콤에서도 팬탁의 휴대 전화를 더 확보하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없는 물량이 뚝딱 나오지는 않는다.

“게임 분야는 포털사이트 성장과 함께 이용자 수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네이보와 다움에서 게임 광고를 실어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한 마케팅이 유효했습니다.”

“게임이야 잘될 수밖에 없으니 패스.”

게임을 위해 PC를 사는지 PC가 있으니 게임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둘은 함께하고 있었다. PC의 보급과 함께 게임 산업도 함께 성장하는 중이다.

“그리고 더블 엔터와 SN 엔터는….”

“여기도 패스. 엔터테인먼트 잘나가는 게 하루 이틀이야?”

더블 엔터테인먼트와 SN 엔터테인먼트는 경쟁하듯이 인재를 발굴해 가수로 데뷔시키고 눈에 띄는 신인 배우로 인지도를 올리고 있었다. 더블 엔터에선 박준영과 방수혁이 기둥처럼 자리하고 있었고, SN에는 이수남 사장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HOT의 인기는 여전했고, 후속 보이 그룹도 경쟁자가 생기기 전에 나와 팬을 양분하며 성장했다. 걸 그룹의 시초격인 여성 가수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안랩이 남았는데 이쪽은 95년 V3 발표 이후 매출이 튼튼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작년 네트워크 서버용 안티바이러스 소프트웨어까지 출시했고 올해 중국 공안부의 공인을 추진하고 있는데 공인을 받으면 중국에도 상당한 수출을 가능케 할 것으로 보입니다.”

“V3라….”

수안은 턱을 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대운 자동차 주식을 날려 먹을 때쯤인가?’

뭔가가 뒷머리를 간질거리고 있었다. 중국과 V3를 더했더니 갑자기 뭔가 떠오르려다가 말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수안이 눈을 크게 뜨고 책상을 치면서 일어났다.

“생각났다!”

“무슨 일입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는 겁니까?”

배영성도 수안이 뭔가를 생각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이러스! 바이러스야! 바로 그 중국 놈!”

훗날 있을 전염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말함이다.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지만, 이름이 중국인과 비슷했던 것 같아 수안은 중국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기억해 낸 것이 중요했다.

“올해 우리나라에 상륙할 바이러스. CIH! 바로 이놈이 내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었어!”

개발자 Chen Ing-Hau(첸잉하오)의 이름을 따서 CIH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이러스다. 과거 수안은 이 바이러스로 인해서 컴퓨터가 완전히 먹통이 되었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대운 자동차 주식을 팔려다가 컴퓨터가 먹통이 되며 기회를 놓쳤고 나중엔 그냥 들고 있어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러다 못 팔아서 결국 워크아웃까지 들고 있었지….’

남 탓을 하자면 끝도 없지만, 대운 자동차 주식을 그렇게 날려 먹은 것도 결국은 이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 수준이라면 상당히 독한 놈이네요.”

“내가 나중에 알아봤는데 보통 바이러스는 하드디스크 내에 있는 시스템 파일을 손대는 수준이었고, 이번 바이러스는 하드디스크를 포함해 BIOS까지 날려 버리는 녀석이라고 했어.”

하드디스크를 넘어 메인보드 내부의 BIOS를 조작하는 녀석은 이 바이러스가 최초가 아니었나 싶다.

“…BIOS를 날려 버려요?”

“안 사장에게 연락해서 예의주시하라고 해. 관련 바이러스 확보되면 곧장 백신 프로그램 개발 시작하고 배포해야 해.”

“그런 바이러스라면 금방 찾을 수 있겠습니다.”

“…쉽게 못 찾아.”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금방 찾을 수 있을 텐데요?”

바이러스가 당장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든다는 말이 아니었다.

“이 바이러스의 무서운 점은 파일이 감염되어도 전혀 티가 나질 않아. 그리고 바이러스가 발동하는 날짜는 내년 1999년 4월 26일.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내 컴퓨터가 감염되었는지도 모르고 다른 컴퓨터에도 전부 바이러스를 옮기게 돼. 그래서 빨리 찾아서 백신을 만들어 내면 해결할 수 있어. 안 사장이 각별하게 챙기라고 해 줘.”

“…녀석들은 그딴 걸 대체 왜 만든답니까?”

배영성은 왜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못된 장난처럼 느껴졌다.

“푸흐흐. 배 사장. 해커와 바이러스 개발자가 있어서 백신 사업이 잘된다는 생각은 안 해?”

“아!”

해커와 바이러스 개발자가 없다면 백신 사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린 공생하는 사이야. 녀석들은 우리에게 월급도 안 받고 백신 개발 회사를 광고해 주고 있지. 우린 아주 고마워해야 한다고.”

바이러스 백신인 V3가 잘 팔리는 이유가 바로 그런 해커와 바이러스 개발자가 있기 때문이다. 둘은 공격과 방어로 특화되어 있었고, 서로 공방을 통해 발전해 나간다. 그 와중에 백신 사업자는 돈을 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역시 보는 시선이 다르시네요. 이해했습니다.”

“다른 보고 사항 있나?”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에서 직접 받으실 테니 제외하겠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보고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고 끝입니다.”

“그럼 가서 짐이나 싸 놔. 곧 출국이잖아.”

“미국에서의 경호는 예전에 보셨던….”

퇴역 미군들로 구성된 사설 경호 업체는 벌써 세 번째 이용이다.

‘같은 업체가 반복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아니. 이번엔 바꾸자. 계속 같은 업체를 사용하면 오히려 경호에 허점이 생길 것 같아.”

“맞는 말씀입니다. 이방효 사장에게 경호 업체를 추천받아 보겠습니다.”

배영성이 나가고 수안은 잠시 집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IMF로 걱정이 가득한 서울이지만, 그래도 사람 만나는 것을 겁내진 않는다. 지하철과 도로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콘서트라도 있으면 많은 사람이 운집한다. 지금도 거리에 사람들이 붙어서 걸어 다니고 있었고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

‘바이러스. 바이러스.’

오늘 생각난 것은 컴퓨터 바이러스일 뿐이지만, 진짜 바이러스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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