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맞선 (137/304)

맞선

김현성 사장은 강수용을 데리고 아파트와 상가를 둘러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부동산 시장에 나온 참이다.

“본래 이런 일은 실무자가 진행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나왔죠.”

“아. 예.”

김현성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지 다 알지 않냐는 듯이 수용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현성 사장의 눈빛과 침묵에 입을 여는 수용이다.

“아….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고 배우세요. 아파트는 첫째도 둘째도 입지입니다.”

“…예.”

예전과 태도가 다른 김현성이다. 예전엔 회장님의 동생들이라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지만, 지금은 막 입사한 신입을 대하듯이 수용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주군이 왕좌를 차지한 것과 다르지 않다. 주군의 동생들은 일말의 영향도 줄 수 없는 존재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길 바랍니다. 두 번은 없습니다.”

“김 사장님이 예전엔 굉장히 친절하셨던 것 같은데….”

수안이 처음 소개해 줄 때만 해도 깍듯하게 인사하던 김현성 사장이다.

“일 배우는데 친절한 사람 찾으려거든 탕비실 가서 커피 타는 일이나 배우시든가요.”

“…….”

“빨리 좀 걷고! 이러다 길바닥에서 야근하게 생겼습니다! 오늘 집에 가기 싫습니까!”

말투가 반말과 존대를 오가기 시작한다.

“네, 네.”

수용이 오늘 임자 만났다.

* * *

수안이 퇴근해서 씻고 잠시 거실에 내려왔는데, 수용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너 이제 퇴근했어?”

“…….”

시계를 보니 저녁 9시 반이다.

“아니면 친구들 만났냐?”

이때까지 일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무슨…. 나 말할 기운도 없어. 방으로 갈래.”

수용은 정말로 기운이 없는지 다리를 후들거리며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쟤가 오늘 뭘 하고 온 거야?”

수용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같은 시간대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 * *

또각. 또각. 또각.

힐이 바닥에 닿아 내는 마찰음이 오늘따라 자꾸만 신경 쓰인다.

결국 가다가 멈춰서고 말았다.

“휴.”

‘긴장 풀어 강수진. 그냥 편하게 보고 헤어지면 되는 거야.’

오늘 수진은 아버지와 오빠가 고른 맞선남을 만나기로 했다.

‘남자친구도 없었는데 갑자기 남편감이라니….’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손을 내밀었던 수진은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돌아서는 수진이다. 향하는 곳은 방금 나왔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거울로 화장이 들뜨진 않았는지 미용실에서 하고 온 머리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폈다. 벌써 세 번째 확인이다.

“휴우. 괜찮아. 괜찮다. 수진아. 괜찮을 거야.”

또각. 또각. 또각.

괜히 발가락이 아픈 것 같고 머리도 아픈 것 같고 자꾸만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오늘 예약이 있으시더군요.”

안으로 들어가자 수진을 알아본 고려 호텔 레스토랑 매니저 덕분에 다시 화장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매니저는 수진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예약된 자리로 안내했다.

“아직 예약 시간 50분 전입니다. 호텔에 쉬실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할까요?”

그렇게 화장실을 오갔어도 아직도 이른 시간이다. 긴장된 마음에 너무 서둘러서 생긴 일이다.

“아닙니다. 그냥 커피 하나 먼저 주세요. 간단한 업무라도 보고 있으면 되니까요.”

차라리 잘됐다 싶은 마음이다. 가방에 챙겨온 노트가 보물처럼 느껴진다. 챙겨오길 잘했다 싶었다. 평소 자신이 디자인한 작품을 남기던 노트였다.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수진은 펜을 들고 노트에 의류 디자인을 그려나갔다. 수진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노트에 드리울 때까지 자신의 선과 면 그리고 그 조화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긴장은 어느새 날아가 버렸다.

“디자인 실력이 대단하신데요?”

“……!”

수진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사진으로만 봤던 남성이 곁에 서 있었다.

“아. 오셨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나왔어야 했는데 기다리게 했습니다.”

“앉으세요.”

“예. 수진 씨. 아. 수진 씨라고 불러도 되겠죠?”

아깐 그렇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는 남성이 앞에 있어도 마음이 차분했다.

“그게 좋겠네요. 저도 상준 씨라고 부를게요.”

서로 이름을 알고 있으니 통성명이 필요 없어서 편했다.

나이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스물일곱.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준 씨 집에선 결혼을 서두르시나요? 이런 자리에 나오긴 아직 젊지 않으세요?”

“워낙 손이 귀한 집이라…. 집안 내력이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스무 살에 결혼하셨고, 얼마 없는 친척들도 일찍 결혼합니다. 저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죠.”

수안이 고른 인물 중에서 그나마 제일 나은 인물이 박상준이라는 인물이었다. 나이도 젊었고, 평판도 좋은 남성이다. 그의 집안에서 적당한 규모의 기업을 소유, 경영하고 있었고 현재 상준은 대학 졸업 후 이제 막 회사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다지고 있었다. 매출액 2천 5백억 규모의 대형 건설사를 포함해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금강이라는 이름의 그룹이 그의 집안 가업이다.

“요즘 회사는 어떠세요?”

“…무척 힘듭니다. 버텨나가고는 있지만, 솔직히 앞이 보이지 않아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네요?”

“경영은 아버지가 맡고 계시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요.”

수안이 회사 사정에 대해 질문해 보라고 조언했었다. 만약 “괜찮다. 회사는 자금이 여유롭고 안정적이다. 위기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답하거든 더 볼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허풍쟁이는 언제고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상준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첫 번째 위기를 무사히 넘어갔다.

“건설업이 요즘 많이 힘들다고 듣긴 했어요.”

“예. 저도 지금 건설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계열사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라 요즘은 회사 직원들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도 구조 조정이 필요한가요?”

“본래 구조 조정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필요할 수도…. 하하. 제가 오늘 회사 얘기를 하러 나오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좋은 자리에 나왔으니 좋은 얘기를 나누죠.”

그리 잘생겼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서 더 정감 가는 얼굴이다. 어려운 주제를 피하는 태도나 말투도 자연스럽고 상대를 배려하는 그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게 맞을까?’

상대의 말을 들을수록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직 확신은 없었다.

“직장인이 회사 얘기 말고 또 무슨 얘길 하겠어요.”

“하하. 이런 자리까지 일을 가져오시는 것을 보니 상당히 적성에 맞는 모양입니다. 디자인팀에서 일하고 계세요?”

“요즘 신 사업팀에서 일하고 있어서 의류 디자인실과는 거리가 있어요.”

“취미라고 하기엔 전문적인 수준으로 보이던데요?”

“미국 대학에서 4년간 디자인을 전공하고 들어왔어요.”

자신의 이력도 상대가 봤을 프로필 안에 다 들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디자인에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자신의 프로필을 봤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 프로필에 강운 그룹의 맏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자신이 졸업한 대학교 이름도 기록되어 있을 터였다.

“죄송한 말씀인데…. 수진 씨 이름만 전해 듣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프로필을 열어보지도 못해서….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아휴. 계속 변명만 늘어놓게 되네요.”

프로필을 받기는 했지만, 맞선을 보는 오늘까지도 열어 보지 못했다.

오늘 상준은 상대의 정보에 깜깜한 상태로 맞선자리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셨구나.”

수진은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해 줘서 오히려 좋았다.

‘모르는 게 약이지.’

“수진 씨가 어디 집안 분이신지는 확인해야 했는데…. 그래야 저도 수진 씨 회사 얘기를 묻고 공감하지 않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공감할 구석은 찾기 힘들 것 같네요.’

“제가 아직 국내 회사들을 다 몰라서…. 혹시 회사 이름을 듣고 모르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이 모를 리도 없고요.’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네요. 우리가 회사 간판을 보고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회사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요. 그냥 상준 씨가 오늘 집에 가서 확인하는 걸로 해요. 어때요? 오늘 함께 있는 동안 저는 비밀을 지킬게요.”

“하하. 이거 프로필을 등한시했다가 궁금증만 커지게 됐네요. 제 잘못이니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저 올해 스물일곱입니다. 수진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진짜로 이름만 듣고 오셨네요.”

“아휴. 자꾸 확인하고 그러십니까. 이름만 듣고 나와서 정말 죄송한 마음입니다. 다시 사과드리죠.”

“사과하실 것까지는 없어요. 오히려 안 봐주셔서 전 기분 좋아요. 저는 스물여섯. 상준 씨와 딱 한 살 차이네요.”

“그럼 지금 회사에서 직위가….”

보통 여성들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고 바로 취직하니 3년 전에는 회사에 입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물여섯이면 주임이나 대리 직위까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집안 소유의 회사라면 높은 직위를 가질 수 있어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다.

상준의 친구 중에는 스물일곱에 회사에 출근도 안 하면서 이사를 달고 있는 녀석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원래 디자인실에 있었는데, 영업도 갔다가 CS도 갔다가 하면서 회사 내부에서 빙빙 돌리고 얼마 전에야 신 사업팀으로 발령됐어요. 역시 사무실이 좋긴 좋더라고요.”

“푸흐. 아. 죄송합니다. 저도 공감해서 웃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공사 현장부터 체험하라고 하셔서 대학 시절에 자주 막일을 하러 갔었거든요.”

“아버님도 대단하시네요. 귀한 아들이라면서 공사 현장 막일을 시키세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설 현장을 따라다녀야 하고 사무실에선 잡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저는 사원으로 시작했고 이제야 3개월이 지나 수습 딱지를 뗐습니다. 3개월간 월급도 70%만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원리원칙을 이렇게 확실하게 지키세요. 아들은 좀 봐주셔도 될 텐데 말이에요. 아.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야근했는데도 초과 수당은커녕 월급 30%가 허공으로 날아갔어요. 제 친구는 집안 기업에서 일도 안 하고 이사 월급을 받아 가더란 말입니다. 아이고 부러워.”

“훗.”

“과장님 눈엔 수습 딱지 뗀 신입이 웃기실 수도 있지요. 예. 암요.”

“흐흣. 미안해요. 상준 씨 표정이 정말 억울해 보여서 그랬어요.”

“웃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여동생은 제가 하는 말에 한마디도 안 웃거든요. 수진 씨가 웃어 주니 뭔가 자부심이 생긴달까?”

“상준 씨 형제는 여동생만 하나 있었죠?”

프로필을 달달 외우고 있는 수진에 비해 상준은 수진의 프로필에 깜깜했다.

“수진 씨 가족은…. 또 얘기 안 해 줄 건가요?”

회사를 감추고 있으니 가족도 얘기하지 않을 거냐는 물음이다.

“가족은 상관없죠. 아버지, 어머니에 오빠 하나 그리고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가 있어요. 오빠가 일찍 결혼해서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조카도 있고요.”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추측하기 쉽지 않다.

“우아. 형제가 넷이라니! 무척 부럽습니다. 게다가 성비까지 남자 둘에 여자 둘. 어려서부터 패를 나눠 많이 싸우셨겠는데요?”

어려서는 성별로 패를 나누기 쉽고 다투기도 쉬워서 한 말이지만, 어림도 없는 추측이다.

“싸우긴요. One Of One이 있는데 무슨 수로 싸워요.”

“하나 중에서 하나라면…. 수진 씨 오빠?”

“오빠는 어려서부터 남달랐어요. 힘도 세고 똑똑하고…. 여러모로 무시무시했어요. 저를 포함한 동생들이 전부 오빠한테 혼나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1 대 3으로 덤벼도 이긴 적이 없었어요.”

“우아. 나이 차가 많이 나는가 봅니다.”

“상준 씨와 동갑인데요?”

상준은 자신과 동갑이라는 말에 현재를 추측할 수 있었다.

“훗. 그렇다면 지금은 다르겠네요. 비슷한 연배로 보이고 예전엔 왜 그렇게 대단해 보였을까 생각하지 않아요? 제 여동생이 어려서는 안 그랬는데 이젠 저한테 그렇게 대들어요. 아주 오빠를 만만하게 생각하더라니까요. 아! 물론 수진 씨가 그런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빠는 지금도 남달라요. 지금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죠. 셋이 덤비면 지금도 맞을걸요? 게다가 집안 서열에서도 아버지 바로 아래 있으니 말 다 했죠?”

“…저 갑자기 소름 돋았는데 보실래요?”

상준은 소매 단추를 풀어 두꺼운 팔뚝을 들이밀었다.

“푸흐흐. 갑자기 팔은 왜 걷어요?”

“생각해 보세요. 오늘 맞선 보러 나왔는데, 수진 씨는 오빠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설명하면서 아직도 두려워하는 눈빛이라고요. 제가 겁 안 나게 생겼어요?”

“무섭기도 하지만 동생을 너무 사랑하는 자상한 오빠예요. 겁먹지 말아요.”

“저 도망가도 됩니까? 방금 그 말이 더 무서웠는데 말이죠.”

“왜요?”

“그런 오빠라면 얼마나 여동생을 챙기겠어요? 수진 씨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저 맞아 죽지 않을까요?”

“오오~”

“그건 무슨 뜻이죠?”

“정답이라는 뜻.”

“큭.”

“푸흐흐.”

“하하하.”

첫 만남이지만, 둘은 오랜 친구처럼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고려 호텔 커피숍 구석에서 주먹을 부르르 떠는 남자가 있었다.

‘저것들이 왜 자꾸 내 얘길 하면서 처웃어?’

수진에게 맡긴다고 했지만,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맞선자리에 찾아온 수안이다.

‘그래도 수진이가 잘하고 있네…. 우리 수진이 진짜로 다 컸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수진은 너무 잘하고 있었다. 가장 첫 만남에 괜찮은 놈이 나와서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수안은 고려 호텔 밖으로 나오며 최장호 경호실장을 곁으로 불렀다.

“예. 회장님.”

“박상준 밀착 감시 시작해. 술버릇, 취미나 성적 취향, 여성을 대하는 평소 태도까지 확인해야 해. 특히 평소 여자를 많이 갈아치운 놈은 아닌지,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놈인지 알아봐.”

“지금부터 직원들이 교대로 밀착 감시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회사로 가지.”

“예.”

수안이 탄 차가 더블 스타로 향하고 있었고, 남은 최장호 실장을 포함한 경호원 세 사람이 지금부터 박상준을 감시하기 위해 대기하기 시작했다.

‘만약 엉뚱한 놈이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진짜 무시무시한 오빠가 상준을 노리고 있었다.

* * *

회사에 돌아와서 수용을 찾았는데 자리에 없었다.

요즘 통 얼굴 보기가 힘들다.

“수용 도련님은 김 사장과 외근 나갔다고 합니다.”

“또?”

김현성 사장을 따라 일을 배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오고 기운이 쭉 빠져서 퇴근한다. 수안은 동생이 얼마 못 견디고 자신의 옆으로 돌아올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견디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제 걸음마를 떼려나? 연락해서 회사로 들어오라고 해.”

“누구나 다 하는 사회생활입니다. 감싸고 돌면 적응만 더 늦어지니 그냥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내가 언제 감싸고 돌았다고 그래? 요즘 수용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회장님이 신경 쓰시면 그 자체로 직원들이 어려워하게 됩니다. 그나마 김 사장이라 회장님 눈치 안 보고 굴리고 있는 거죠. 회장님이 이번에 막으시면 앞으론 수용 도련님을 가르칠 사람이 없습니다.”

강운 그룹 회장의 아들이자 더블 스타 회장의 동생인 수용을 누가 함부로 할 수 있을까.

배영성의 말대로 김현성 사장 정도가 아니면 누구도 수용에게 일을 가르칠 수 없었다.

“배 사장 말에 틀린 게 없네. 오케이. 녀석도 이제 내 손을 떠나는 건가.”

“녀석도라고 하심은…. 누가 또 떠났습니까?”

“오늘 수진이 맞선자리에 몰래 다녀왔는데….”

“거길 회장님이 왜 가세요?”

“걱정되잖아. 혹시 사기꾼 같은 놈한테 휘둘리면 어쩌나 싶어서 그랬지.”

“하아. 회장님. 저도 동생들에게 그렇게 관여하진 않았습니다. 이번엔 회장님이 과하셨어요.”

“내가 기억하기로 여동생 귀가 시간이 늦는다고 매번 잔소리하는 걸 들었는데?”

“…….”

어려서부터 배영성과 함께한 수안이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친구들하고 여행 간다고 하니까 회사 차 빌려서 쫓아간 적도 있을걸? 분명 남자친구랑 외박하려고 변명하는 게 틀림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

“그리고 여동생이 결혼하겠다고 남자를 데려왔을 때는….”

“아아. 지금 생각해 보니 맞선자리는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것 같네요. 처음부터 확인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최 실장에게 뒷조사 시켜놨어.”

“뒷조사까지는 좀….”

“그날 배 사장이 매제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아아. 뒷조사도 해야죠. 암요.”

“미리 파악해 놓으면 나중에도 걱정 없잖아. 나중에 뒷수습하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미리 알아보고 일찌감치 손 떼는 편이 나아.”

“그런데 뒷조사를 맡기셨다니 오늘 보니 상대가 영 아니었습니까?”

“얼굴도 그만하면 합격이고 성격도 무난해. 집안 가업이 요즘 어렵긴 하지만,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서 안심이지.”

“회장님이 그 정도로 평가하셨다면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인가 보네요.”

“그럼 아버지랑 내가 골랐는데 어쭙잖은 놈을 골랐겠어?”

“그럼 걱정하실 일도 없겠는데 뭘 걱정해서 뒷조사까지 하십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여자 눈앞에서는 입에 발린 말로 둘러대고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지저분하게 노는 놈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놈 많죠. 많습니다.”

“그렇지? 어쨌든 이번에 최 실장이 제대로 확인하고 돌아오면 끝이야. 수진이 이제 다 컸어. 시집 보내도 돼.”

“회장님과 한 살 차이밖에 안 납니다. 어디 가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배 사장에게나 얘기하지 어딜 가서 얘기하겠어. 그보다 잡담은 여기까지만 하자. 마누라가 딸기를 사다 달라고 해서 얼른 들어가야 해.”

“딸기요? 사모님이 과일 좋아하시는 거 보니 이번엔 소원성취하시겠습니다.”

“병원 가면 확인할 생각이야. 딸이면 정말 좋을 텐데…. 아! 배 사장 와이프도 임신이라며?”

“예. 주원이 녀석이 워낙에 활달해서 둘째는 딸이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수안은 배영성과 간단하게 대화하고 이제 일어서려고 했는데, 수안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음? 여보세요.”

-회장님. 최장홉니다.

“어. 밀착 감시 시작했나?”

-아닙니다. 아직 둘이 같이 있습니다.

“뭐?”

-두 사람은 지금 홍대 근처로 이동했고….

스르륵.

수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수진은 오늘 처음 맞선을 본 남자와 깔깔거리며 홍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제 팔 근육은 공사판에서 생긴 근육이라니까요. 제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습니다.”

“푸흐흐.”

수진은 얼른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상준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홍대로 자리를 옮겨온 것이다. 수진이 계속 오빠를 걱정하고 있어서 근육까지 내보인 참이었다.

“수진 씨 오빠분이 아무리 성격이 대단해도 저한테는 안 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시원하게 맥주 한잔만 하고 들어가세요.”

상준이 키도 크고 근육도 있다 하지만, 수안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신장 186cm에 육상 스프린터인 오빠의 근육은 평범한 근육과 질적으로 달랐다. 수안 옆에 서면 위축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근육과 큰 키에서 풍기는 기운에 절로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나도 싫지 않기는 한데….’

마음이 잘 맞는 남자라는 생각 때문인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편안했다. 집안 걱정도 되긴 하지만, 조금 늦는 거야 상관없을 거로 생각했다.

“좋아요. 간단하게 먹기로 해요.”

“하하. 역시 화끈하신 우리 수진 씨. 너무 늦게 보내드리진 않겠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저도 얼른 집에 가서 수진 씨 프로필을 확인해야 하거든요. 하하하.”

젊은이들이 가득한 홍대 술집 중에서 적당한 호프집을 찾아 들어갔다.

상준이 막 나온 시원한 생맥주를 들고 말했다.

“술은 조금만 드시기로 하죠. 맞선 첫날 술 먹었다고 하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맥주 정도는 괜찮아요. 영업하면서 많이 먹어 보기도 했고.”

“하하. 그럼 짠!”

“짠.”

둘이 잔을 부딪치고 막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최장호 실장이 곁으로 와서 말했다.

“아가씨. 거기까지만 하시죠.”

“어, 어. 최 실장님?”

수안을 항상 따라다니는 경호실장이라 최 실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구시죠? 수진 씨 아는 분입니까?”

상준은 갑자기 나타나 수진에게 아는 척하는 인물을 경계했다.

“경호실장님이세요.”

“아. 경호실장님. 지금까지 수진 씨를 지켜 주셨나 보네요.”

‘본래 그렇진 않은데….’

안 그래도 오빠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상대라서 말을 아꼈다. 맞선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을 염려해 경호실장을 보냈으리라 짐작했다.

“최 실장님. 금방 가려고 했어요. 오늘도 집까지 부탁드려요.”

“…회장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

“어… 지금 회장님이라면 아버지가 오신다는 말씀이신가요?”

프로필을 보지 못했어도 상대가 기업가 집안인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맞선 상대의 아버지가 여기까지 온다는 말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뇨. 오빠가 온다는 뜻인 것 같은데…. 최 실장님. 맞아요?”

“예. 곧 오실 겁니다.”

“오빠라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오빠를 회장님이라고 부르죠?”

“그야….”

수진은 “오빠도 한 기업의 회장이니까.”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어느 집안사람인지 모르는 상대에게 오빠의 존재는 너무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이다.

“하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상준 씨.”

“제가 프로필을 못 보고 온 일이 천추의 한입니다. 결국 수진 씨 입을 통해 들어야겠네요.”

하지만 설명하고 들을 시간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딸랑.

출입구 문에 걸려있던 방울이 소리를 내며 방문자를 알렸다. 그리고 그 인물은 수진과 상준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큰 보폭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오, 오빠.”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안을 맞이하고 있었고, 출입구가 등 쪽에 있었던 상준은 가장 늦게 일어나 방문자를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 요어억!!”

얼마 전 금 모으기 운동을 중계하는 TV에서도 얼굴을 봤었다.

자신과 동갑인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

같은 나이로 인해 항상 집안에서 비교 대상이 되었던 원망스러운 존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강수안. 더블 스타 회장 강수안. 강운 그룹 맏아들 강수안 부회장.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안은 테이블 근처로 다가와서 일어선 상준의 얼굴을 마주 봤다. 정수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수안의 눈이 상준의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수안은 말없이 그냥 상준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많은 장소.

말투나 행동을 조심해야 할 곳이다.

“앉아. 사람들 시선 모이기 전에.”

“어윽…. 예, 예.”

절로 존대가 튀어나오는 비주얼이다.

“그쪽은 수진이 집에 안 보내고 뭐 하시나?”

“…죄송합니다.”

“술은 서로 더 알고 나서 먹어야 하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진짜 강운 그룹 첫째 딸인 걸 몰랐어?”

“아….”

아연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정도 표정 연기를 하려면 연기 대상 정도는 받는 배우여야 할 것 같았다. 몰랐다는 말은 사실로 보인다.

“수진이 넌 가방 챙겨서 차에 타.”

“어.”

오빠가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반박할 마음도 없다. 수진이 최장호와 함께 차로 이동했다. 수안은 남은 상준을 보고 말했다. 아주 친근한 말투로 다가서고 있었지만, 눈빛이 날카롭다.

“그쪽은 더 놀다 가시든가. 여기 물 좋지?”

“아, 아닙니다.”

수안은 상준의 옆으로 가서 반대편 어깨를 잡아 자신 곁으로 끌어당겼다.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말하기 위함이다.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맞선 첫날 여자한테 술을 먹여? 어느 집 자제인지도 모르면서?”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이면 하지 말았어야지.”

수안의 손이 상준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잡았다.

꽈아악.

“으윽. 죄송합니다.”

“앞으로 수진이 울리지 말고 잘 놀아. 알았어?”

“예. 절대로 안 만나겠…. 수진 씨와 만나도 됩니까?”

수진과 어울리지 말라는 말인 줄 알았던 상준은 수안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내가 그렇게 미친놈으로 보여? 여동생 앞길을 내가 왜 막나.”

“아아….”

툭툭.

수안은 상준의 어깨를 털어 주며 품에서 떼어놨다.

“또 봅시다. 박상준 씨. 대신 앞으로 이런 곳까지 날 또 오게 만들면 그땐 가만 안 있을 테니 그런 줄 아시고.”

“예, 예.”

수안은 차 안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 수진을 볼 수 있었다.

“누가 잡아먹냐? 네가 뭐 잘못했어?”

“너무 늦게까지 남자랑 단둘이 있었어. 내가 실수한 거야.”

“…남녀가 연애하면 별일이 다 생기는 거야. 나도 그건 이해한다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저놈이 어떤 놈인지 오늘 처음 만난 네가 다 알아?”

“몰라.”

“그래.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지. 그래서 오늘만 내가 오지랖 넓게 끼어들었다. 그러니 괜히 너까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론 최 실장 안 보내고 나도 참견 안 할 테니까 편히 만나.”

“…응. 고마워 오빠. 난 오빠가 진짜로 나 혼자 보냈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내 실수다. 혼자 보냈으면 끝까지 믿어야 했는데.”

“오빠가 온다니까 난 안심했어. 정말로 괜찮아.”

“…집에 가자. 맞선남은 나중에 약속 잡고 또 만나. 알았지?”

“응. 세상에 오빠같이 자상한 사람을 또 누가 오빠로 뒀을까?”

수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수현이.”

“풋. 맞네.”

수진은 오늘 맞선남과 만나서 했던 말들과 느낌을 오빠에게 조잘거리며 말해 줬다.

수진에겐 신선하고 색다른 경험이라 오늘 일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수안은 여동생의 말을 들으며 오늘 수진의 맞선남이 그리 나쁘지 않은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잘 만나 봐. 젊은데 정신까지 제대로 박힌 놈은 이쪽에서 찾기 힘들어.”

돈 많은 집에서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은 찾기 쉽지 않았다. 정말 고르고 골라 다섯을 찾아냈지만, 그중에 제일 나은 놈이 박상준이었으니 수진의 마음에도 들었다면 이 녀석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나 이제 자신 있는데, 몇 명 더 만나 보고 확인해 볼까?”

남자 만나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진 수진은 이번에 후보에 오른 모두를 만나 보고 싶었다.

“굿. 나쁘지 않아. 그래야 누가 제일 괜찮은 놈인지 보이는 법이거든.”

1번이 괜찮긴 하지만 이런 기회를 일부러 날릴 필요는 없다. 인간 군상을 여럿을 만나 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뒷조사를 빨리해야겠네.’

* * *

상준은 반쯤은 정신이 나가서 집에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후아….”

“왔니? 오늘 맞선은 괜찮았…. 너 무슨 일 있었어?”

괜히 어머니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머니는 오늘 맞선녀가 어느 회사 딸인지 아셨어요?”

“봐서 뭐 하니? 괜히 잘 안되면 그 회사에 선입견만 생기지 않겠어? 네가 한두 번 맞선 보는 것도 아니고….”

이른 결혼을 위해 더 어렸을 때부터 맞선에 나갔던 상준이다. 오늘 프로필을 보지 않고 맞선자리에 간 것도 깜빡 잊었다기보다 어머니처럼 너무 많은 맞선을 보며 생긴 귀차니즘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어느 집에서 나와서 그래? 우리 회사보다 크던?”

“하아….”

“아니면 너무 작은 회사야? 좀 작으면 어때. 아버지도 회사 규모는 필요 없다고 하셨고 사람 됨됨이만 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차라리 좀 작으면 좋을 것 같다.

“어머니. 오늘 만난 여자 이름은 강수진이고요.”

“강수진? 수진이면…. 어느 집 딸인지 모르겠네. 이름은 익숙한데….”

“그럼 강수안은요?”

“강수안은…. 올림픽 육상. 어? 강운 그룹? 가앙~ 운~ 그룹???”

“강운 그룹 맏딸이 강수진이래요. 오늘 저랑 맞선 본 강수진이요.”

“너, 너는 알고 나갔어?”

“아뇨. 가서 알았어요. 그것도 헤어지기 직전에 알았어요.”

“넌 프로필도 안 보고 뭐 했어?”

“어머니도 안 보고 그냥 전해 줬잖아요. 나도 매번 만나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죠.”

“아휴. 이걸 어쩐다니. 상대방에게 실수는 안 했고?”

“오늘 뭔가 잘 맞아서 같이 맥주 한잔만 하려고 했는데….”

상준은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가 날아오는 것을 봤지만 뻔히 보고 맞아 줬다.

‘맞아도 싸지. 맞선 첫날 술을 먹자고 했으니….’

짜악.

“크흡.”

“맞선 보고 좋으면 다음에 또 봐야지 맞선 당일에 술 먹자고 하는 놈이 어딨어!! 그 집에서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안 그래도 수진 씨 오빠가 찾으러 와서 얼른 보내 줬어.”

“강수안 부회장이 직접? 직접 오기까지 하셨다고?”

“응.”

“이 화상아.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술집을….”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이 어머니의 말을 막아섰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넌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현관에서 왜?”

“아버지.”

“여보. 오셨어요.”

“넌 오늘 맞선본 사람이 또 마음에 안 들어?”

맞선에 나갔다가 퇴짜 놓고 오기 일쑤였던 아들이다. 오늘도 비슷한 일 때문에 어미와 다투고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였다.

“아니. 그게요. 아버지….”

“저번엔 얼굴이 너무 예쁘다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고, 그 전엔 머리에 든 게 없다고 싫다고 하고, 누구는 현모양처 타입이라서 싫다고 했지? 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세상에 있기는 한 거냐?”

“오늘은 마음에 들었는데요?”

“오! 그래? 드디어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았구나! 그런데 당신은 왜 화를 냈어?”

“여보…. 이 녀석이 맞선녀가 마음에 든다고 술집에 데려갔다고 해요.”

“…그래? 그래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음에 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큰 무례는 아니었을 거야.”

“그쪽 집안이 너무 좀….”

“부모가 엄해? 어느 회사 딸내미던가?”

“강운이래요.”

“강운? 강운 테크?”

“거긴 우리 회사 근처 중소기업이잖아요.”

“어? 설마….”

“네. 강운 그룹이요. 강운모 회장의 딸이래요.”

“야!”

이번에도 상준은 아버지의 팔이 휘둘러지는 걸 보면서 등짝을 내밀었다.

쩌억!

“끄읍!”

“마! 사람 봐가면서 술집에 데려갔어야지!”

“모, 몰랐다고요!”

“게다가 술집에 강수안 부회장이 와서 여동생을 데려갔대요.”

어머니 말에 아버지는 다시 목소리가 높아진다.

“뭐? 강운 그룹 강수안 부회장까지? 진짜야?”

“네.”

“야! 너 어쩌자고!”

“나도 몰랐다니까요!”

실로 억울하다.

자신도 마지막에서야 알았던 사실이다. 강수안 회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수진이 어느 회사 딸인지 알 수 있었다. 강운 그룹에 유명한 사람은 강운모 회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강수안과 배우자 임아현뿐이다. 나머지 동생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란에 집에 있던 여동생까지 나와서 거들었다.

“아빠. 호적에서 파 버려요. 어떻게 맞선보고 당일에 술을 먹자고 할 수가 있어요? 여자한테 술 먹이고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집에서도 저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사과라도 하러 가야 하나?”

평소라면 그냥 지나갔을 일이나 강운 그룹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꾸만 조심스럽다.

“그냥 평소처럼 신경 쓰지 마시고 내버려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버지까지 나서면 제 꼴이 뭐가 돼요?”

“뭐가 되긴 인마. 그래도 사과는 하고 살아야지.”

“아버지도 알잖아요. 강수안이라고요. 강수안. 수진 씨 오빠가 다음에 재밌게 놀라고 했으니까 걱정 놓으세요.”

“강 부회장이 그랬어? 역시 그 사람은 난 사람이지.”

물론 그 전에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냐고 묻기도 했고, 죄송할 짓이면 하지 말라는 말도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엔 분명히 수진이 울리지 말고 잘 놀라는 말도 했다.

“수진 씨는 자신감 넘치는 전문직 여성이고 저는 딱 마음에 들었어요. 쉽게 생각하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잘 만나 보려고요.”

“자신 있냐?”

“…무슨 자신이요?”

“강운 그룹 사위로 살 수 있는 자신.”

“…….”

“어지간한 며느리 데려오면 너는 여전히 우리 금강 그룹 사람일 것이고 며느리는 금강 그룹 며느리가 되겠지만, 네가 강운 그룹 딸과 결혼하면 강운 그룹 사위가 된다. 네가 그걸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 거야.”

“…오늘 첫 맞선인데 제 동의도 없이 왜 거기까지 벌써 일을 진행하세요? 만나다가 헤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 집에선 이런 놈이 뭐가 좋다고 딸을 내보내서는 이런 사달을 만들어?”

“아버지 제 연애사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니 더 관여하지 마세요.”

“뭐 인마?”

“저 올라갑니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아무리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저, 저.”

“박수진. 너는 아무 때나 끼어들지 마라. 나중에 혼나는 수가 있어.”

“웃기시네. 나중에 강운 그룹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셔. 강운 그룹 장인한테 알랑방귀 뀌고 손바닥 지문이 닳도록 비벼가면서 살아야겠지만 말이야.”

“…….”

동생의 말이 현실이 될까 걱정이다.

* * *

수안은 신문으로 정권과 야당의 분쟁이 일단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회 국무총리 인준. 이제야 용인한 야당의 속내는?]

[한 달을 넘게 끌어온 국무총리 인준이 이제야….]

[국가정보원 신임 원장에 통합신당의 이현창 임명. 정부 야당과 대통합으로 가나.]

[김대준 대통령. 국회의원의 기립박수 받으며 국회 입성.]

“어휴. 양보 화끈하게 하셨네.”

통합신당은 자신들의 힘을 보이면서 충분히 많은 것을 얻어냈다.

대통령이라도 야당의 동의 없이는 국무총리 하나 임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고, 이후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하는 시기에는 적절하게 환영까지 동조하며 일하는 국회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국정원장 자리도 잘 받으셨고….”

무엇보다 이현창이 국정원장 자리를 받은 것으로 수안이 원하는 것은 다 이뤄진 것과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스위스로 요원들을 파견해 공작을 기획하는 것이다.

‘이현창이 어떤 결정을 할지 모르지만, 이래도 저래도 국가엔 도움이 될 거야.’

이현창 총재가 죽이고자 한다면 죽어서 잘된 일이고, 살려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고자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되어 살해 공작이 들통나 버린다면 그 즉시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사이는 일촉즉발의 상태로 변한다. 하지만 이것도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다. 노파심에 얘길 꺼내봤자 좋은 소리를 듣지도 못한다.

“앞으로 잘합시다. 난 손 뗄 테니.”

더는 관여할 수 없다. 그럴 시간도 없다.

똑똑.

“들어와.”

“회장님. 최장홉니다.”

“아. 최 실장.”

“지난번에 맡기신 일로 보고차 들렀습니다.”

“가져와 봐.”

“예.”

수안은 박상준을 포함해 수진의 맞선남 후보 리스트에 존재하던 모든 사람의 뒷조사를 실행했고, 그 결과를 받아 보고 있었다.

“얘는 뭐야? 이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후보 중 하나의 사생활을 본 수안의 말이다. 최장호가 펼친 파일엔 한 남자가 어여쁜 여성과 함께 빌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여자를 따로 만나고 있었는데, 집에선 모르는 모양입니다. 살림집을 차려 주고 자주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미모의 스튜어디스와 동거 중이라는 내용이다.

“얘는 후보에서 제외하기로 하지. 수진이에게도 그대로 알려 줄 테니 나중에 둘러댈 것 없어.”

“예.”

제외할 후보는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장에 또 다른 놈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 얘는 평소에 룸살롱에 출근 도장 찍고 다닌다고?”

“예. 저녁마다 룸살롱으로 출근하고 매일 다른 여자를 선택해서 2차를 즐긴다고 합니다.”

두 번째 남자는 어두운 밤거리를 배경으로 찍혔다. 웃는 얼굴로 자동차 키를 던져 주는 사진과 술에 취해서 여자를 팔로 감싸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프로필엔 매너가 몸에 배어 젠틀한 남자라고 써 있던 놈이다.

“프로필도 믿을 게 못 되네.”

“처음 만난 박상준 씨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머지 하나도 깔끔합니다.”

결국 다섯 중의 둘이 다시 탈락하고 박상준을 포함한 한 후보가 남았다.

“하나? 왜 하나야? 넷에서 둘 빠졌으면 둘이 남아야 하잖아?”

“마지막은 증거 없이 정보만 가져왔습니다. 남자가 일전에 만난 여자가 어디서 애를 낳아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집안에서 여자 쪽에 돈을 주고 해외로 보낸 모양입니다. 거기서 낳은 아이와 살고 있다는 정보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시일이 좀 지난 일이라 직접 증거는 없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고…. 외부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친근한 사람들 몇은 알고 있었습니다.”

수안은 재벌가 어디에서든 있을 수 있는 일이라 고개만 흔드는 정도로 끝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이런 놈들이 즐비한데 내가 어떻게 여동생을 함부로 밖으로 내돌리냔 말이야. 최 실장은 딸 가진 아빠라 더 공감할 거 아냐.”

“물론입니다. 회장님은 현명하게 행동하고 계십니다. 미리 알아서 다행입니다. 만약 수진 아가씨가 푹 빠져 버린 다음이면 답도 없었을 겁니다.”

“…수진이에게 이 정보 다 알려줘.”

“수진 아가씨에게 직접이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수진에겐 충격적인 사실일 것이다.

“그래야 녀석도 세상 무서운 줄을 알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술을 마셔?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걔는 아직도 몰라.”

과거 뉴스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었다. 술에 약을 타서 상대방에게 먹이는 미친놈들이 세상에 그렇게 많았다. 예전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 마음 놓고 있었지만, 이젠 여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걱정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정보를 접하시면 앞으로 조금이나마 세상을 아실 겁니다.”

“최 실장 부탁해.”

“예. 회장님. 아가씨 퇴근길에 전달하겠습니다.”

* * *

수진은 일이 끝나고 최장호 경호실장의 자료를 받아 보고 있었다.

조용한 커피숍에는 수진의 종이 넘기는 소리만 팔락거리며 들리고 있다.

“…이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고요? 그것도 최근 상황?”

“예. 아가씨. 해서 후보 셋을 제외하고 하나 남은 상황입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

아찔한 정보가 가득했다. 이미 애인이 있는 남자가 하나, 매일 파트너를 갈아치우는 섹스 중독자 하나, 그리고 폭력적이며 애까지 있는 남자가 하나다. 누굴 고르든 미래가 아찔했을 것이다. 게다가 더 아찔한 것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이런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오빠가 따로 알아 오지 않았으면 언제까지고 서류상 남자들이 신사적이고 멋진 남자들로 보였을 것 같다.

“이것도 오빠가 알아보라고 해서….”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기업가 자제들의 엉뚱한 사건 사고를 많이 접하신 분이 바로 강수안 회장님이십니다. 아가씨의 배우자를 고르는 일인데 이 정도 관심은 당연합니다.”

“오빠 없었으면 정말 난….”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모르는 상대가 주는 음료는 함부로 드시면 안 됩니다.”

“네?”

최장호도 수안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딸 가진 아빠는 항상 험난한 세상을 걱정한다.

“요즘 이상한 약물이 시중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호의로 받은 커피나 물을 마시고 정신을 잃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여성들이 어떤 짓을 당했을지 아실 거로 믿겠습니다.”

“……!!”

“회장님이 여기까지 얘기하지 못하실 것 같아서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아, 아니에요.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계속 몰랐겠죠. 오빠가 갑자기 왜 달려왔나 했더니 그런 이유로 급하게 왔었나 보네요.”

“그날은 제가 있으니 그런 걱정이 없었겠지만, 아가씨에게 행동으로 경고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실장님께도 감사해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최장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최장호에게 수진이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더 물어볼게요.”

“예. 아가씨.”

“박상준 씨에 대한 것은 없었나요?”

“서류에서 보신 것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친구들과 술자리가 잦기는 하지만,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특이 사항이라고 한다면 하나 있습니다.”

“뭐죠?”

괜찮게 생각했던 그 사람조차 문제가 있다면 앞으로 누구도 믿지 못할 것 같다.

“집안에서 이른 결혼을 독촉해 맞선을 많이 보긴 했지만, 지금까지 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상준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낸 전부입니다.”

“휴우.”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예. 아가씨.”

* * *

재벌가 자제들도 여러 부류가 있다.

넘치는 돈에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껏 발산하는 부류. 이 부류를 부모가 허락하는 이유는 젊어서 한때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당한 소비 생활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부류가 있다. 세상이 정한 규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소비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부 빡빡한 집안에서는 자식들에게 강력한 금융 제재를 가한다. 어려서부터 올바른 경제 관념을 심어 주고 일찍부터 경영자로 키우기 위함이다.

박상준은 마지막 부류에 속하면서도 조금 심한 축에 속한다.

“돈이 있어야 데이트를 해도 할 것 아닙니까!”

“네 월급 가지고 충분해.”

지금 아버지와 용돈으로 협상하고 있었다. 다른 집은 천만 원 주고 조금 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다는데 그 집보다 더 큰 기업을 가진 아버지에겐 어림도 없었다.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요. 이제 막 수습 딱지 떼고 지금까지 받은 월급은 친구들 만나서 술값으로 다 나갔다고요!”

“그건 네가 과소비를 해서 그런거고! 성인이 일을 시작했으면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지!”

“그럼 강운 그룹 딸하고 분식집이나 갈까요?”

“…….”

상준에겐 전가의 보도라고 할 수 있는 강운 그룹이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애프터를 못 받은 이유도 다 돈 문제라니까요. 돈이 있어야 여자도 만나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여자도 못 만나요. 돈도 없는 제가 무슨 수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냐고요.”

“네 돈 보고 결혼할 여자면 내가 반대야!”

“설마 강운 그룹 딸이 제 돈 보고 만나겠어요? 우리 회사는 강운 그룹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인데?”

“끄응.”

보통 때라면 말로 이길 수 있었겠지만, 강운 그룹이 끼어들면 할 말이 없다.

상준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었다.

현금으로 몇 장 꺼내려고 했는데, 아들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현금은 뭐 하러 꺼내세요? 카드 꺼내세요.”

“…….”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꺼내 들자 상준이 휙 낚아채 갔다.

“제가 결혼에 골인할 때까지 이 카드는 반납하지 않습니다.”

아주 당당했다.

“뭐, 뭐?”

“아들 빨리 장가보내고 싶으시면 허락하셔야 할걸요?”

“아무리 강운 그룹이라도 과소비하는 사람은 내가 반대할 거야!”

“강운 그룹 딸이 시댁 돈 쓰려고 하겠어요? 이미 가진 지분만 해도 얼만데. 자기 돈 쓰는 것까지 터치하시려고요?”

“…….”

아들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하지만 저도 아버지 아들이라 그런 여자는 사양입니다. 그러니 카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 보러 가냐?”

“네. 이제야 연락이 왔어요. 막상 다시 본다니까 걱정되긴 하는데, 어떻게든 되겠죠.”

* * *

수진은 두 번째 맞선남을 만나고 크게 실망했다.

이미 맞선을 경험해서 자신감이 넘쳤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은 인연 만나시길 바랍니다.”

아주 깔끔한 마지막이었지만, 상대의 입을 통해 들으니 기분이 정말 더러웠다.

그래서 처음 만났던 상준에게 연락해 다시 보고자 한 것이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먼저 나와 있기 있습니까? 도대체 내가 몇 시에 나와야 먼저 나오는 건데요?”

넉넉하게 30분 정도 일찍 왔는데도 수진은 이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커피가 나름 괜찮거든요.”

“고려 호텔 커피라면 괜찮은 정도가 아니긴 하죠. 하하하. 그런데… 고려 호텔도 강운 그룹 산하였던가요?”

웃으며 시작한 말이 굳은 표정으로 바뀌고 있다.

“아뇨.”

“후아. 다행이네요.”

“여긴 올케언니가 소유한 곳이라 강운 그룹 산하라고 볼 수는 없어요.”

“…그게 그거네요.”

“프로필만 보고 끝이에요? 내가 강운 그룹 딸인 걸 알았으면 강운 그룹이 어떤 계열사를 가졌는지는 공부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했나요? 괜히 수진 씨를 어렵게 생각할까 봐 안 찾아봤어요. 나 지금도 살짝 긴장되거든요.”

“긴장은 무슨.”

“그럼 긴장 안 해도 되는 거죠?”

“맞선만 수백 번 봤다는 사람이 무슨 긴장을 했다고 그래요? 거짓말인 거 다 안다는 소리예요.”

“제가 맞선 본 숫자까지 파악됐습니까? 역시 강운 그룹!”

상준은 엄지손가락을 들며 말했고 수진은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

“풉.”

상준은 수진을 편안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제가 오늘 아버지 카드까지 빼앗아 왔다는 거 아닙니까. 수진 씨 맛있는 음식 사 주려고요.”

“오오. 잘하셨네요.”

상준은 수진이 즐거워하는 걸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관계가 더 진전되기 전에 묻겠습니다. 수진 씨.”

“…진전은 무슨 진전? 두 번 봤다고 진전이에요?”

너무 급하게 시작하는 관계는 아직도 두렵다.

“그럼 앞으로 진전한다 치고 제 물음에 답해 주세요.”

“…알았어요.”

“저 집에서 그리 여유롭게 살지 못했어요. 앞으로도 제 월급 안에서 데이트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합니다. 나중에 회사를 물려받을지 안 받을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께서 정정하신 동안 저는 그냥 직장인입니다. 이런 저라도 상관없습니까?”

“…….”

오히려 수진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는 말이었다.

“그게 문제가 되는 일인가요? 저도 제 월급만 가지고 사는데?”

“엇! 강운 그룹도?”

“직장 갖기 전엔 용돈 받았는데 이젠 없어요. 모든 소비는 제 월급 안에서 해결해야 하죠.”

“역시 강운 그룹이 대기업으로 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이것도 오빠가 한 짓이에요.”

“…강수안 부회장님?”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오빠가 집안에서 아버지 다음이라고.”

“우아.”

“그래도 가끔 용돈도 챙겨 주고 그래요. 거기다 이렇게 맞선까지 주선해 주는 오빠가 어디 있겠어요.”

“헙! 그럼 제 프로필이 부회장님을 통해서….”

“당신은 이미 우리 오빠에게 모두 파악된 거죠. 후훗.”

“오늘도 오실까요?”

상준은 주변을 두리번대며 살짝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빠는 없지만, 예전 그 경호실장님은 근처에 계세요.”

이번엔 최장호 실장이 자원해서 경호를 맡겠다고 했다. 덕분에 수진은 누군가 지켜 주고 있다고 안심하며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매번 경호가 이뤄지는 겁니까?”

“아뇨. 남자를 만날 때만요.”

“앞으로도?”

“당신 하기 따라서 다르죠. 지난번처럼 술자리로 직행하면 다시 나타날지도 몰라요.”

“그건 제 실수라고 생각해요.”

“진심?”

“물론… 진심이 아니죠.”

“네?”

실수라고 해 놓고 진심이 아니란다.

‘이 남자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난 그때 당신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어요. 더 많이 알고 더 가까워지고 싶었죠. 하지만 실수는 맞아요.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었다면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했어요.”

너무 훅 들어오는 진심에 수진의 입이 막혀 버렸다.

“어…. 음….”

“우리 천천히 만나 봅시다. 나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남녀의 연애가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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