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대 (136/304)

독대

“그나저나 오늘 넌 대통령과 독대해서 무슨 얘길 할 거야?”

“별로 얘기할 일도 없습니다. 안부나 좀 물어보면 끝이죠.”

“수안아. 정치권에 쓴 돈은 빨리 현금화해야 해.”

선거 자금을 지출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고작 5년인데, 3년만 지나도 레임덕이 오기 시작하거든. 그러니 대통령의 힘이 막강한 시절에 빨리 치고 빠져야 한다. 알았어?”

“예.”

“그리고 더블 스타 산하 기업은 대부분이 IT 계열이잖아. 이번 대통령은 IT에 관심이 많아. 관련 사업으로 정부에서 지원받을 일이 많을 거야. 혜택이 넘치도록 기다리고 있다. 가서 안부 묻지 말고 다 달라고 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회장님.”

지금 부자가 향하는 장소는 청와대였다. 강운 그룹을 포함한 5대 대기업과 총자산 상위 기업 50곳 대표들을 경제인 간담회에 초청한 것이다. 대통령의 첫 발언까지는 언론에 공개되지만, 그 이후 비공개로 전환될 예정이었고 대표들은 대통령과 독대해 요즘 기업의 애로 사항에 대해서도 말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수안은 애로 사항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다. 오히려 대통령의 하소연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게 알려 줄 만한 사안이 아니다.

.

.

.

“우리 경제를 대표하는 최고 경영자 여러분을 모시고 함께 대책을 논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업과 정부가 힘을 모은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반드시 극복하고, 오히려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청와대 영빈관. 수안은 아버지 곁에서 대통령의 발언을 들으며 앉아 있었다.

각 회사 대표들의 발언도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었고, 아버지 강운모 회장도 마이크를 잡고 간단하게 요즘 기업의 위기와 돌파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사전에 준비된 대로 김대준 대통령이 원하는 방향인 IT 발전을 통한 방법이었다.

수안은 말을 극도로 아끼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이것도 이미 아버지와 얘기되어 있었던 일이다.

혹시라도 수안이 경제인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BE에 관한 일이나 청와대와의 친분은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화가 끝났을 때 수안은 청와대 행정관을 따라 가장 먼저 일어났다. 대통령과 독대 자리를 갖기 위함이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더블 스타 강수안입니다.”

오늘은 강운 그룹 부회장으로 온 것이 아니라 더블 스타 회장으로 초청을 받아서 인사가 달랐다.

“강 회장. 어서 와. 일등 공신이 이제야 오셨어.”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안을 반긴다. 악수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지난 일을 입에 올리는 김대준 대통령이다.

“지난번 취임식 때는 왜 그렇게 빨리 도망갔나?”

김대준이 일등 공신이라는 뜻은 이현창이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설득한 일을 말함이다. 덕분에 근소한 차이로 여당 대선 주자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김대준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도움을 수안이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통령님께는 충분히 축하해 드렸지 않습니까. 주변에 보고 싶지 않은 인물들이 많아서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면된 전임 대통령들 말인가?”

“예. 거기다 직전 대통령도 추가해 주시죠. 요즘 기업뿐 아니라 국민까지 다 죽어납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IMF 한파로 기업은 도산하고 직장인은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우울한 현실을 견디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해서 심심치 않게 자살 사건을 접할 수 있었다.

“나도 그 사람은 보기 싫었어. 전임만 아니었어도 초대를 안 하는 건데 말이야.”

한참 전에 틀어진 사이가 쉽게 좋아질 수는 없었다.

“금융 위기를 몰고 온 대통령이니 강 회장이 꺼릴 만도 해.”

“그분 없는 곳이라 더 얘기하기도 그렇군요.”

“그래. 괜히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도 아까운 사람이지. 요즘 강 회장 회사에서 필요한 것은 있나? 규제 완화도 좋고 잘 풀리지 않는 법적인 일도 좋네. 허가나 승인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얘기하고.”

“전혀 없습니다.”

강운모 회장의 당부를 잊었는지 수안은 대통령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회사는 일전의 자금 수혈로 무너진 회사들을 다시 일으키고 있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소년, 소녀 가장과 위기 가정을 비롯해 사회 취약 계층을 보살피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제가 스포츠 스타로 알려졌으니 어린 스포츠 꿈나무를 발굴해 키우는 일도 병행하고 있지요. 몸이 열두 개라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저를 복제해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제가 더 열심히 뛰어야겠지요.”

“…….”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일개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다 다른 부탁까지 더하기 민망할 수준이다. 그래도 기업에 이득이 될 만한 제안 하나가 있어 입을 떼려 했지만, 이번에도 수안이 먼저였다.

“혹시라도 남북 경협 얘길 꺼내시려거든 도로 넣어 주십시오. 계속 대현 그룹에 맡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정택주 회장이 이번 경협에 얼마나 기대가 큰지 모릅니다. 저는 국내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북한까지 신경 쓰긴 어렵습니다.”

김대준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흠. 알았네. 그럼 내가 궁금한 일을 하나 묻지. 요즘도 이현창 그 사람과 자주 만나나?”

“이 총재님은 본인 자리에서 열심히 정쟁을 일삼고 계시죠. 지난번 취임식에 잠시 보고 그 뒤엔 연락도 안 했습니다.”

그 정쟁이 김대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봐. 강 회장.”

“예. 대통령님.”

“강 회장이 일등 공신이면 이등 공신도 있기 마련이잖나. 당 연합으로 날 밀어준 사람을 국무총리에 앉히기로 했는데 지금 그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수안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지금 의원 숫자가 많은 야당이 대통령이 원하는 국무총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김대준 대통령 입장이 아주 난감했다.

“대통령님. 저는 일개 기업인입니다. 경제인이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 끝이 항상 좋지 못합니다.”

“이미 강 회장은 발을 깊이 담그지 않았는가.”

“그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영수 회담에 끼어들었지만, 이젠 아닙니다. 생각했던 대로 국내 기업을 충분히 보살필 수 있었고, 거액의 달러를 통해 IMF의 지원 요구 조건도 많이 완화되었지요. 여기까지가 제 역할이었습니다.”

“강 회장은 내가 대통령이 되길 원해서 이현창의 출마까지 막지 않았는가. 거액의 달러를 들여온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에 날아가 대통령과 재무부 장관까지 만나고 왔어. IMF의 지원 요구 조건은 저절로 완화된 것이 아니라 강 회장이 발로 뛰어서 만들어 낸 것이야.”

수안이 말하지 않아 직접 공로를 꺼내는 대통령이다.

“잊어 주십시오. 그저 제 마음이었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정치에 관여하려 한 것도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

대통령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공을 세웠으면 뭐라도 바라야 하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만 한다. 보답을 받아야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줄 텐데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니 난감하기만 했다. 거기다 보답은 아직 꺼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사람아. 기업인이 챙길 것도 못 챙기면 어쩐단 말인가.”

“저는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같이 출발해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누구는 못 먹어서 다리 힘이 약할 것이고 태어나길 약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는 몸도 건강하고 돈까지 많은 집에서 태어났지요. 같은 출발선에 서도 아무도 저를 이기지 못합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이런 제가 권력의 비호까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너무 불공평한 일이 될 겁니다.”

김대준에게 자신을 정의로운 기업가로 포장하는 수안이다. 그 포장은 아주 단단해서 시커먼 속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강운모 회장만 보면 부러움에 배가 아플 지경이야. 어쩌자고 강 회장같이 올바른 아들을 낳았을까.”

김대준 대통령도 아들이 여럿 있지만, 수안 같은 아들은 없었다.

“예의 없는 말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나서지요. 이현창 총재에게 뭘 부탁하면 되겠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국무총리 인선에 관한 것이면 되겠습니까?”

“강 회장이 나서주려고?”

“이현창 총재와는 예전처럼 친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요즘 통합신당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수안은 이제야 본론을 꺼내고 있었다.

“이 총재와 친분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로 해결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양보할 일은 양보해야 야당에서도 대통령이 선택한 국무총리를 수용하겠지요.”

“양보?”

“저도 이현창 총재가 뭘 원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만나서 의향을 들어 보고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내용을 전달 드리겠습니다.”

“부탁 좀 하세. 강 회장.”

“노력하겠습니다. 대통령님.”

결국 수안에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하고 부탁만 남겨 놓은 김대준이다.

‘마음의 빚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지.’

이는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로 알 수 있다. 만약 몸이 아픈 환자를 의사가 치료하고 돈을 받으면 환자의 고마움은 지출하는 돈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의사 앞에서는 감사하다고 인사했어도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고마운 감정을 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돈을 받지 않으면 환자는 의사에게 지극히 고마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환자는 돌아가는 길에도 의사를 생각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서도 그 의사에게 고마운 감정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물질적인 부분에 의해서 휘둘린다. 사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 행위 자체는 다르지 않았다. 오직 돈을 줬느냐, 주지 않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수안은 김대준 대통령에게 물질적 보답을 받지 않음으로써 고마움을 가슴에 새기는 선택을 한 것이다.

‘오래 고마워할수록 더 오래 기억할 테니까. 그래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기출 변형이다. 돈이 없던 환자가 의사에게 무료로 치료받고 훗날 돈을 벌어 갚았다고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환자는 이미 돈을 갚았지만, 오래도록 의사의 은혜를 기억했던 과거가 감사한 마음을 각인시킨다. 돈을 갚아도 돈이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감사한 마음도 고스란히 남기는 것이다.

언젠가는 보답을 받을 테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그래야 보답을 받아도 고마운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작 한 번으로 끝내려고?’

의사에게 돈을 갚은 환자는 이후에도 선물을 들고 의사를 찾아간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그의 기억이 아직 은혜를 갚지 못했다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내 도움도 한번이 아니니 여러 번 받아도 되지 않겠소.’

* * *

수안은 아버지를 기다렸다가 함께 청와대를 빠져나왔고, 돌아온 회사에서 전화를 들었다.

“총재님. 접니다.”

-오! 후배님. 오늘 경제인 간담회에 간다고 했었지? 얘기는 나누고 왔는가?

“몸이 달았습니다. 그래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국회에서 국무총리 인준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국정원장 하나로는 아쉽단 말이지.

어차피 오래 끌어 봐야 국민에게 피로감만 더하게 만드는 일이다. 국무총리 인선은 얼른 넘겨 버려야 했다.

“어차피 총재님께 남은 시간은 많습니다. 이번에 국정원에서 한 5년 쉬시고, 다음에는 서울에서 시장도 하시면 10년은 금방입니다.”

-서울시장?

“서울의 인구가 몇입니까? 서울에서 정책만 잘 써도 그 많은 표가 다 들어옵니다. 게다가 서울은 통합신당의 텃밭이기도 하고요. 전 국민이 서울시장을 차기 대선주자로 생각하게 만들면 대선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고 들어가게 됩니다.”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고 하던 수안이 마음껏 정치적 수를 던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함부로 공천하지 말라고 했었구만.

“예. 그래서 아무나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칫 잠룡을 키워낼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알았네. 후배가 그리 말하니 이번엔 국정원장으로 만족하지.

“청와대에는 내일 전달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찾거든 알아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더 얻을 양보가 있으시면 알아서 얻어 보시고요. 저야 혹시 몰라서 걱정할 뿐입니다. 더 얻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너무 몰아치지 않고 살살 구슬려 보겠네. 들어가게.

“예. 총재님.”

본래 국정원에 관심이 없었지만, 따질수록 국정원이라는 카드가 좋아 보였다.

국내 정치에 활용해선 안 되겠지만, 활용하기 나름이 아니겠는가.

‘내게 그 자리를 가져와 주시게. 후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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