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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35/304)

형제

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비우셨고 다른 형제들도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금은 정영수와 정영호 형제만 남아 있었다.

“영호야. 괜찮냐?”

“안 괜찮을 건 뭔데?”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며칠 전에 만났던 형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눈앞에 앉아 있다.

보통 이렇게 질문으로 대꾸하면 “큰형님이 물어보면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인마!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형에게 예의가 없어?”라고 돌아와야 맞다.

“…형님.”

“왜?”

“진짜 형님이야?”

“그럼 가짜 형님이겠어?”

“휴우.”

“오늘 그룹 총괄 회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 왜 한숨이야. 아버지 앞에서 한숨 쉬진 말아라. 불호령 떨어진다.”

“형님도 공동 회장입니다.”

“난 한숨 안 쉬었는데?”

“…휴읍.”

다시 한숨을 내쉬려다가 얼른 멈췄다. 오늘 계속 형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널 믿고 계신다. 그러니 아버지 마음에 드는 대북 사업 잘해 봐. 유동자금은 그냥 꺼낸 말 아니니까 바로바로 얘기하고.”

얼굴엔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리 초기에 대북 사업 성공을 노래해도 그로 인한 이득은 없을 것 같다. 수안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부회장이 쪽박이라더라.’

정영호 회장의 얼굴엔 비틀린 표정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형님을 밀기 시작한 것 같은데….’

상념이 이어지기도 전에 형의 말이 들려온다.

“넌 건설 회장직에 오른 지가 언젠데 아직도 물갈이를 안 했어?”

아직 정영수 회장도 함부로 임원진에 손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갈아치울 사람은 갈아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함께 그룹을 일궈온 가신들 때문에 동생들과 더 멀어졌다.

“물갈이?”

“아직 아버지가 계셔서 조심스럽긴 할 테지만, 미리미리 준비해 둬. 건설에 자리한 임원들을 모두 네 사람으로 다 채워.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라 오직 널 따르는 사람으로.”

“……!”

이런 부분까지 세세하게 조언해 줄 형님은 더더욱 아니었다.

‘건설을 집어삼키라는 말이나 다름없잖아?’

가신의 농간을 혐오하는 정영수 회장의 의중이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형님.”

“난 간다. 나오지 말고 일이나 해. 집에서 보자.”

오늘따라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커 보이는 형님의 등이다.

“대체 형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수안은 강운 그룹 회장 집무실에서 아버지가 내민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 가격 실홥니까? 고작 이 가격에 방송사 지분 48%를 인수할 수 있다고요?”

작년 기록한 매출은 3천 7백억. 당기 순이익이 120억.

메이저 방송사를 엄청난 가격에 물어온 강운모 회장이다.

“크흐흐. 올해 상당한 손실이 확정적이거든. 기업들이 나자빠지는데 누가 방송에 광고를 주겠어?”

“그렇다고 고작 2억 달러로….”

매년 수백억의 흑자를 발생시킬 방송사였다. 98년은 꽁꽁 얼어붙은 내수 시장으로 인해 손해를 볼지라도 이후에는 확실하게 회복한다. 게다가 방송사는 수익을 바라고 인수한 것이 아니다. 입맛에 맞춰 여론의 향방을 틀어 버리는 불합리한 언론의 행태에 대항하기 위해서 인수한 방송사였다. 2억 달러로 지상파 방송사를 가질 기회는 흔치 않았다.

“요즘 환율로 따지면 3천억이 넘어. 고작이라고 표현하긴 좀 많지. 윤 회장이 비실거리면서도 더는 못 깎아 준다고 하더구나.”

윤 회장은 강운모 회장에게 너무 시달려서 볼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요즘은 자주 즐긴다던 쌍화차 대신에 아예 한약을 처방받아 달여 먹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날로 먹은 거죠. 여기서 더 깎으면….”

날강도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쏙 들어갔다.

“역시 회장님은 대단한 협상가셨습니다. 더 배우겠습니다.”

“푸흐하하. 내가 아니면 어려운 가격이긴 하지.”

윤 회장은 강운모 회장과 줄다리기를 이어 가며 당장이라도 판을 엎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귀한 달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윤 회장이다. 하루가 다르게 전문 건설 기업이 나자빠지고 있으니 더욱 몸이 달아서 매각을 서둘렀고 그 성과를 오늘 수안이 받아 보고 있었다.

“미디어 그룹으로 묶어서 강운 그룹에서 분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달러는 강운 그룹으로 보낼 테니 마무리까지 회장님 손에 맡기겠습니다.”

“달러는 찔끔찔끔 보내지 말고 넉넉하게 송금해.”

“…달러 차입이 많아지면 자본금 비율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낮춰야 할 부채 비율은 너무 올라가고요. CB든 BW든 재무제표에 차입으로 표시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에잉. 누군 달러가 없어서 못 구한다는데 우린 있어도 제대로 쓰질 못하니….”

“그리고 지난번 입금하고 남은 달러는 기화 차 매입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도 2억 달러는 빠듯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동남아 금융 공격으로 남은 자금이 20억 달러 이상 있었지만, 쓸 곳이 많은 달러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었다.

“그럼 강운 증권이 그나마 부채 비율이 낮으니 그리로 송금해.”

“예. 회장님.”

수안과의 논의가 끝나고 나자 강운모 회장은 맏아들 옆에 앉아서 멍청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회장 집무실에 존재감도 없이 앉아 있었던 사람이다.

“넌 뭐 좀 배우고 있냐?”

“…글쎄요.”

강운모 회장에게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뭉뚱그려 답할 수 있는 강운 그룹 직원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글쎄요?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죄송합니다. 아버지.”

강운모 회장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는 수안을 제외하고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막내아들 강수용이다.

“회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여기 회사야!”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막냇동생이 영 흐리멍덩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수안이 나섰다.

“회장님. 제가 잘 가르쳐보겠습니다. 회사 생활 시작하고 아직 얼마 안 됐습니다.”

본래라면 강운 그룹 산하의 회사로 들어가 일을 배워야 했지만, 아버지 밑에서 욕만 먹을 것이 뻔한 막냇동생을 차마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졸업 전에 수용을 옆에 끼고 다니며 사회인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수안이다.

“쟤가 너 따라다니면서 뭘 배우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

이젠 동생들을 챙기는 수안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형제들을 좋아하는 천성이 쉽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동생을 돕고 살겠다는 걸 막을 이유도 없었다.

이미 첫째 아들은 다 갖고도 넘치게 품에 넣은 것들이 많았다.

“세상 누구든 시작이 있습니다. 수용이도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걸음마를 떼고 뛸 날이 올 겁니다.”

“…넌 하여튼 긍정적이야.”

수안을 보고 말하던 강운모 회장이 수용에게도 고개를 돌려 말했다.

“형 보고 많이 배워.”

“예. 회장님.”

“내가 형이라고 했잖아. 지금은 아버지라고 했어야지! 눈치는 어디다 팔아먹었어?”

“…….”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한단 말인가.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다.

수안은 고개를 흔들며 다른 주제를 꺼내 분위기를 환기했다.

“얼마 전 대현 그룹 경영자 협의회에서 대현 자동차 정영수 회장이 대현 그룹 총괄 회장에 올랐습니다. 건설 정영호 회장과 공동 회장이긴 하지만, 투자가치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정택주 회장의 심중은 이미 정영호 회장에게 향하지 않았었나?”

대현 건설 대표 이사 회장 자리에 정영호를 올릴 때부터 절반 이상은 후계자 결정이 끝났다는 평이 있었다.

“경영자 협의회 후에 대현 그룹 가신들이 정 회장 집무실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고 합니다.”

“……!”

누구보다 시류에 민감한 가신들이 일부러 정영수 회장을 찾는다면 힘의 균형이 뒤집혔다는 말이었다.

“대세가 정영수 회장으로 바뀐 거죠.”

“대현에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당사자를 통해 듣기론….”

“당사자? 정택주 회장 말이야?”

“정영수 회장을 통해 들었습니다.”

정택주 회장은 정부와 진행하는 대북 사업으로 바쁘다. 그리고 일전의 대출 사건으로 얼굴을 보기도 꺼려져서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정영수 회장이 대현 그룹 경영자 협의회를 마치고 며칠 뒤 수안에게 연락했었다.

정 회장은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경영자 협의회에서 자신이 한 말들을 떠벌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경영진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줬다.

믿으라니까 자신까지 믿어 버린 정영수 회장이다.

수안은 귀찮아도 성실하게 정영수 회장과 통화했고 덕분에 회의 장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영수 회장은 성격이 불같아서 말이지.”

“이번 회의에서 정택주 회장이 공동 회장으로 두 아들을 올리면서 무게 추를 정영수 회장 쪽으로 더한 모양입니다. 가신들이 이를 감지하고 정영호 회장에서 돌아서기 시작했고요.”

“정 회장님도 그래. 차라리 하나로 딱 정해 놓으면 얼마나 좋아. 공동이면 또 분란만 일어나지 않겠냐 이 말이야.”

“저희야 분란이 일어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나 마찬가지. 특히 뒤에서 추격하려고 하는 경쟁회사에 일어나는 분란이라면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대현 그룹 주요 회사 지분 매입은 어떻게 되고 있는데.”

“차근차근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정영수 회장에게 언질을 남겨뒀으니 의심받을 것도 없습니다.”

경쟁 회사의 지분을 취득하면서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

“그런 놈이 무슨 완성차 회사 경영을 한다고…. 하긴 그래야 우리가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겠구나.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그렇지?”

경영에 안심은 없었다. 경영자는 어떤 순간에도 안심하고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머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몸이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강운모 회장은 수안의 생각을 떠보고 있었다.

“그래도 대현입니다. 지금까지 저렇게 성장했다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경영자가 모자라면 보필하는 사람이 특별하기 마련이고요. 마냥 안심하지 않겠습니다.”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을 빼닮아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아들이다.

“수용아, 네 형의 말을 단단히 기억해라. 아무리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도 끝까지 안심하면 안 되는 거야. 이게 바로 경영자의 자세다. 기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알았느냐?”

“예. …아버지.”

이번엔 선택을 잘했는지 별말이 없었다.

‘다행이다.’

수용에겐 분위기 파악이 먼저였다.

* * *

이후에도 수안은 동생과 함께 더블 스타와 강운 홀딩스에 출근하곤 했다.

수용이 어떤 일에 관심을 보이는지 알고 싶어서 회사의 이런저런 일을 맡겨 보곤 했지만, 도통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김현성 사장을 따라다녀 보라고 맡겨 놨다.

오늘은 수용을 데리고 갈 수 없는 곳에 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안아. 수용이는 좀 배우더냐?”

곁에 아버지 강운모 회장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다.

“걸음 떼기에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합니다. 곧 일어설 수 있습니다.”

“네 인내심이면 녀석이 흥미를 갖는 분야를 찾을 수도 있겠지. 너 아니면 답도 없어 보여.”

“아버지 말씀대로 아직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녀석도 분명 잘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금칠도 적당히 해. 수용이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천하태평이었어. 놀기만 좋아하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수용에게 박한 평가를 하신다.

“제가 잘 키워 보겠습니다. 녀석도 흥미가 생기는 분야를 찾기만 하면 수진이나 수현이처럼 정붙이고 회사에서 커나갈 겁니다.”

“알아서 해. 너한테 맡기고 난 모르는 척하련다.”

“예.”

수용에 대한 아버지의 선입견을 지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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