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 협의회
“우아. 저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거죠? 그럼 아주 비싸겠죠?”
가격이 문제가 아니다. 호프(Hope) 다이아몬드는 가격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 유명한 목걸이다.
“프랑스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소유하기도 했어. 주인이 아주 많이 바뀐 녀석이야. 그 목걸이를 소유한 사람은 불행이 닥친다는 미신이 있어. 호프 다이아몬드 소유주 대부분이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거든.”
수안은 호프(Hope) 다이아몬드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한 농부가 맨 처음 발견했지만, 그 지역을 침입한 페르시아군에 의해 살해하고 약탈당한 것이 시작이다. 페르시아 총독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왕에게 헌상했으나 총독은 도적들에게, 황제는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500년 뒤 힌두교 중이 이것을 탈취하려다 실패했고, 고문으로 사망했다.
이후 17세기에 프랑스 보석 상인 장 밥티스트 타베르니에가 입수하여 1668년 루이 14세에게 헌상했고, 이후 타베르니에는 20여 년을 더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루이 14세는 47년 뒤 1715년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나름 장수한 셈이다.
루이 14세의 애첩 몽테스팡 후작 부인은 이 다이아몬드를 착용한 뒤 숨쉬기가 힘들다며 괴로워했고 그 후 미신에 빠져 실각한다. 이 다이아몬드를 종종 빌렸던 프랑스 국무장관 니콜라 푸케도 결국 실각하여 나중에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루이 15세를 거쳐 이 다이아몬드를 소유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종종 이 다이아몬드를 빌리던 랑발 공작부인조차 프랑스 혁명 중 오체분시되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이후 프랑스 보석상 자크 셀로에게 흘러 들어갔으나 이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게 된 후 자크 셀로는 미쳐서 자살했다.
다시 러시아 귀족인 이반 카니토프스키가 소유, 파리의 애첩에게 선물했으나 결국 애첩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네덜란드 세공업자의 손에 들어가 비로소 현재의 44.5 캐럿 형태로 완성되었으나 그의 아들이 훔쳐 달아난다. 본인은 상심에 잠겨 자살하고 그 아들도 다이아몬드를 판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긴 침묵을 깨고 1830년 경매장에 출현, 아일랜드의 은행가 헨리 토마스 호프에 의해 낙찰되기에 이른다. 호프 다이아몬드라는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호프 본인은 경마장에서 낙마해 즉사했고, 그의 부인과 정부도 1900년 파산했다.
1908년 오스만 제국 황제 압둘 하미드 2세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정실인 수비아에게 선물하지만, 나중에 수비아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황제 본인도 1년 후인 1909년 폐위되었으며 정신 이상 증세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이후 하비드 베이의 손에 들어갔으나 익사로 생을 마감한다. 호프 다이아몬드와 접촉한 사람이 꾸준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어, 엄청나게 죽었네요? 그런데 지금은요?”
1911년 미국의 사업가 네드 맥린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아보고 15만 4천 달러에 구입, 아내에게 선물했다. 이후 아들 빈센트 맥린이 교통사고 사망, 본인도 아내와 이혼 후 그 유명한 티폿 돔 부정 사건에 휘말려 알코올 중독에 정신 이상이 겹쳐 사망한다.
네드 맥린의 아내 에발린의 사망 후 유명한 뉴욕 보석상 해리 윈스턴(1896~1978)이 구매, 뉴욕에서 전시한다. 윈스턴은 이 다이아몬드의 내력을 접한 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에 돈까지 얹어 주고 소포 우편을 통해 기증, 다행히 여생을 순탄하게 보냈다.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되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지.”
“기증? 비싼 다이아몬드를 기증해요?”
“그 사람도 사 오긴 했는데 미신에 대한 얘길 듣고 웃돈을 줘서 기부했다나 봐.”
“후아. 엄청난 내력을 가진 다이아몬드였네요.”
“호프 다이아몬드를 포함해서 희귀한 다이아몬드인 피렌체(Florentine), 상시(Sancy), 리전트(Regent) 다이아몬드를 4대 저주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르고 있어. 다들 그에 맞는 스토리가 있거든. 더 들어 볼래?”
“으으. 더 이상 다이아몬드의 저주는 듣고 싶지 않아요. 듣기만 해도 나쁜 일이 있을 것 같다고요.”
앞으론 아내가 먼저 다이아몬드 목걸이 선물을 거절할 것 같았다.
“내가 그중에 하나 사다 줄까?”
“돼, 됐어요! 누구한테 저주를 옮겨오려고요?”
확인 차원에서 물었을 뿐이다. 수안은 투명한 돌에 불과한 다이아몬드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한 사람은 왜 그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만 찾게 될까. 수안도 아현의 미모에 혹해서 결혼을 입에 올린 사람이었다.
“이제 나가자. 엔딩 크레딧도 거의 다 올라갔어.”
“잠깐만요. 노래도 너무 좋잖아요. 다 듣고 가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타이타닉의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수안이 말했다.
“이 노래 부른 가수도 이번 파티에 부를 생각이야.”
“으앗! 맞다. 파티!”
아현은 수안과 밖으로 나가며 어제 배 사장 와이프와 너무 즐거웠다며 말하기 시작했다.
수안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내의 말을 반복하기도 하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 밥도 같이 먹었어?”
“그러고 보니 나도 배 사장 와이프 못 본 지 오래됐네.”
“당신이 대신 결제하길 잘했어. 당신은 이번 기회에 종류별로 사 두지?”
대화의 마지막은 아들 얘기로 이어진다.
“우리 정원이가 주원이를 잘 따라?”
“형아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니는데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주원이는 자기가 형이라고 평소엔 까불었는데 어제는 의젓하게 굴더래요. 호호.”
“우리 아들도 동생 생기면 의젓해질 거야.”
“그럴까요? 아직은 아기 같기만 한데….”
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첫째는 온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 어린 티를 내기 마련이다. 그러다 동생이 태어나면 질투심에 사로잡혔다가 금방 어린 태를 벗고 성장하곤 한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요. 정원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아들 얘길 해서 더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집에 가자. 예약은 취소하면 되지 뭐.”
“내가 수애한테 연락해서 대신 가라고 할게요. 아직 예약 시간 남았고 돈도 이미 지불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친해진 건지 벌써 편히 대화하는 모양이다.
“그렇긴 하지.”
배영성 사장이 예약한 식당을 스스로가 사용하게 생겼다.
* * *
이번 대현 그룹의 경영자 협의회는 정택주 회장에 의해 소집되었다.
대현의 각 계열사 경영진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정영수 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오늘 수안의 말을 완벽하게 실행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침착하자. 난 뼛속까지 동생들을 사랑하는 형이다. 착해 빠진 형. 못난 형이다.’
자신에게 주문까지 걸고 있었다. 발톱을 갈아 없애 완벽하게 감추라는 충고를 따르기 위함이다.
멀리 대현 건설을 맡은 한참 아래 동생이 보였다.
녀석을 사랑할 마음이 들지 않지만, 주문은 효과를 발휘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맺힌 것이다.
“큰형 왔어?”
“영호야. 요즘 수고 많다며? 아버지 오시기 전에 얼른 자리 앉자.”
“어….”
평소처럼 한마디 할 줄 알았던 큰형님이 오늘따라 이상한 태도를 보여 믿기지 않는 얼굴이다.
“건설에 유동 자금이 부족하진 않고?”
“우리야 씨티 은행 대출이 대부분이라 국내 은행 자금 압박에 시달릴 일은 거의 없지.”
신규 수주가 줄어들어 유동성이 위험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건설의 약점을 대놓고 내보일 수는 없었다.
“다행이다. 아버지가 대표 이사로 돌아오셨으니 정부 발 신규 수주라도 가져오실 거다. 해외에도 발이 넓으시니 돌파구를 찾아내실 거야.”
“그러면 좋고….”
평소 덕담을 입에 담는 형도 아니었다.
‘형이 오늘 왜 이래?’
“회장님 오십니다.”
비서의 외침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정택주 회장을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앉아.”
차자작.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는 경영진은 마치 군대를 보는 듯했다.
“이번 정부는 이전과 다르다.”
대현이 그만큼 투자했으니 다를 만도 하다.
“특히 대북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하려고 해. 대현 건설에서 할 일이 많을 거야.”
정택주 회장이 건설 회장을 맡은 정영호 회장에게 고개를 돌려 말하고 있었다.
“예. 회장님. 따르겠습니다.”
이미 사전에 서로 얘기된 부분이었다.
정영수 회장은 그 모습을 보고도 희미한 미소만 보이고 있었다.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나는 기분이 좋다. 씨X. 아니지. 좋다. 조옷타….’
아직 자기 암시가 상당히 필요했다.
“이북에 보낼 특별한 선물이 뭐가 있을지 고민해 봐. 선물뿐 아니라 많은 부분을 예상해야 해.”
“예. 회장님.”
‘기회다!’
정영수 회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동생에게 집중되는 관심이 못마땅한 마음에 나섰다고 생각하는 정택주 회장이다.
하지만 정영수 회장 주변에 있는 가신들은 잘 나섰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지금 회장님께서 말씀 중이십니다. 갑자기 그렇게 발언을 시작하시면 안 되죠.”
영호가 형을 나무라며 나섰다. 저 입에서 또 무슨 소리가 나올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형님이 그럼 그렇지.’
잠시라도 흔들렸던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렇습니다. 아직 회장님 말씀이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좀 더 기다리시죠.”
건설사 임원도 나서서 정영호 회장을 거들었다.
그런데도 정영수 회장은 희미한 미소만 보이며 굳게 발언을 이어 갔다.
“갑자기 나선 것은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 말씀을 드려야 했기에 무례하게 명예 회장님 말씀 중에 끼어들었습니다.”
“…뭐야? 이왕 나섰으니 말해 봐.”
못마땅한 얼굴이지만, 임원들 앞에서 한 회사의 대표를 맡은 아들을 나무랄 것까지는 없었다.
‘다 들어 보고 혼을 내도 내야지.’
만약 엉뚱한 말을 끄집어내면 단단히 혼내 줄 참이다.
“건설 회장님이 명예 회장님께서 내려주신 업무를 맡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먼저 말씀드립니다.”
“뭐?”
회장도 아니고 회장님이란다. 회사에서 동생에게 존칭을 붙인 적도 없었던 아들이다.
“건설 회장님은 대북 사업에 많은 부분을 원활히 처리할 역량이 있으시니, 믿고 맡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명예 회장님이 업무를 분담해서 내려주시는 일에 토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말씀하신 특별한 선물을 고민해 봤습니다.”
“허….”
“…….”
정택주 회장이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다른 경영진이나 형제들도 할 말이 없었다.
헛다리를 짚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정영수 회장의 태도 때문이다.
“생각한 것이 있다면 말해 봐.”
“감사합니다. 이북이 식량난에 시달리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하지만 기름을 사용하는 농기계도 활용하기도 어려우니 소를 보내서 그들의 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은 어떨지 싶습니다. 마침 예전 회장님의 창립 일화도 있고 하니 좋은 선물이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영수가 아들이라 소 판 돈을 훔쳐 부기 학원을 등록했던 아버지의 일화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소를 보낸다…. 나도 전부터 생각하고 있긴 했지. 그래서 농장에서 소를 키우고 있지 않느냐.”
1992년부터 건설에서 서산 농장에 소를 방목해서 키우기 시작했다. 이미 소의 숫자는 3천 마리가 훨씬 넘게 불어나 있다. 이미 이때부터 소를 북에 가져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한우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을 겁니다. 요즘 시대에 소가 쟁기를 끄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계속해 봐.”
정택주 회장이 아들의 말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회의 석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북 지원은 외부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일. 소는 최소한으로 보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아버지의 추임새에 정영수 회장이 핵심을 입에 담았다.
정영수 회장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수안에게 들었던 말을 뱉어냈다.
“회장님께서 이북에 보낼 소는 모두 새끼를 밴 암소로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허허! 맞아. 그렇게 하면 외부엔 숫자를 줄이고 도착해서 금방 송아지를 낳을 테니 그 송아지를 키워서 농사에 써먹을 수도 있지.”
정확하게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의견을 제시한 아들이다.
정택주 회장은 다시 정영호 건설 회장에게 돌아서서 일을 맡기려고 했지만, 정영수 회장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생각하고 계셨던 모양이야. 하지만 이것조차 녀석이 예상했었지.’
“…해서 서산농장과 국내 한우 농가에 직원들을 파견해 새끼를 밴 암소를 수배하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현재까지 200여 마리의 새끼를 밴 암소가 확보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훨씬 더 많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헛! 자동차 회장이 언제 그런 짓까지 했어?”
말로 표현하기는 짓이라고 했지만, 표정은 기특하다는 얼굴이다.
의견 제시로 끝이 아니라 실행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자신을 빼다 박은 녀석이다.
‘됐다.’
그리고 정영수 회장은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대북 관련 사업은 건설 회장님이 진행하실 테니 지금까지 확보한 암소와 자료를 모두 넘기겠습니다.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네 성과가 아니냐? 그냥 넘기겠다고?”
애초부터 건설 회장인 영호에게 넘길 생각이었지만, 어느 정도 반발이 있을 거로 예상했다.
“저는 지금 자리에서 자동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그룹을 이끌 건설 회장님이 아니십니까. …그간 심려를 끼쳐 죄송한 마음입니다.”
“……!!”
정택주 회장이 입을 벌린 채 아들 얼굴을 보고 있었고 정영수 회장 주변에 앉은 자동차 임원들도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자신의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 갑자기 지금 무슨 말씀을….”
자동차 임원 하나가 벌떡 일어나 말했지만, 정택주 회장이 잘라 버렸다.
“다들 나가고 건설 회장하고 자동차 회장만 남아. 경영자 협의회는 잠시 후에 다시 시작하지.”
대현에서 정택주 회장의 말은 절대적이다. 다른 형제들도 경영자 협의회에 끼어 있었지만, 모두 군소리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미 대현의 후계가 2강 체제로 굳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영수 회장은 그런 2강 체제를 스스로 깨버린 것이다.
“…….”
정택주 회장은 말없이 아들 정영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영수 회장은 속으로 여전히 자기 암시를 걸고 있었다.
‘난 밸도 없는 놈이다. 못난 아들. 착한 아들이다.’
“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죽을병이라도 걸렸어?”
“이제야 제 분수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허! 갑자기?”
“요즘 다른 회사 경영자를 만나 보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정택주 회장도 아들이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당연히 알고 있다. 처음엔 자신과 함께 만났었고 이후엔 아들이 따로 만나러 다닌다고 들었다.
“강 부회장 말이냐?”
“맞습니다. 확실히 저와 차이가 컸습니다. 강 부회장의 행보를 보다가 저 나이 때 난 뭘 했나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제가 지켜야 할 것은 자동차라고 말입니다. 형제와 분란을 일으키면 그룹에 해가 될 뿐입니다. 지금까진 임원들의 농간으로 건설 회장님이나 다른 동생들과 자꾸 문제를 일으켰지만,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저는 오직 자동차만 바라보고 일하겠습니다.”
“크흠.”
정영수 회장은 동생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자기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앞으로 대현 그룹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
큰형님이 대놓고 이렇게 배를 보일 줄 몰랐던 정영호 회장은 무슨 말로 답을 할지 몰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항복한다고? 형님이? 지금까지 그렇게 날 견제하고 미워하던 큰형님이?’
하지만 대현 그룹은 아직 정택주 회장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영호.”
“예. 회장님.”
“너 혼자서 대현 그룹 경영할 수 있어?”
“네! 물론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평소엔 아들의 대답이 믿음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영수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가벼워. 무게 중심이 필요해.’
“영수.”
“예. 회장님.”
“너는 어떠냐.”
“저는 자동차를 열심히 관리해서 대현 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로….”
“아니. 대현 그룹 말이다. 너도 대현 그룹 경영할 자신 있어?”
“……!”
“아버지!”
정영수 회장도 정영호 회장도 같은 질문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에 정영호 회장이 급한 마음에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다.
정택주 회장은 이런 작은 실수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젠장. 이건 어떻게 대답해야 정답인 거야?’
그사이 정영수 회장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답을 구하고 있었다.
‘발톱은 전부 갈아 없애라고 했으니, 끝까지 믿는다. 제대로 안 되면 수안이 네가 다 책임져!’
“회장님. 저는 대현 그룹에서 미약한 부분을 차지하는 자동차를 맡겨 주신 것도 벅찹니다. 이번엔 아버지의 생각을 짐작해 따라가다가 새끼를 밴 암소까지 떠올릴 수 있었을 뿐입니다. 대현 그룹을 맡기는 것은 이미 경영 능력에 두각을 드러낸 건설 회장이 적합합니다.”
“……!”
“……!”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자신을 포장한 정영수 회장이다.
“영호야.”
“예. 아버지.”
정영호 회장은 아버지가 아니라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순간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표정을 회복하고 다시 말했다.
“큼. 나간 경영진들 다시 들어오라고 해.”
“예.”
정택주 회장과 둘만 남았음에도 정영수 회장은 민망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강운 그룹 부회장을 보고 많이 배운 모양이야.”
“배울 점이 많은 친구입니다. 어려도 많은 면에서 저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지금 제 위치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룹 대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친밀하게 지내볼 생각입니다.”
“녀석에게 얻을 것이 그것 뿐은 아닐 터….”
‘또 뭐가 있더라….’
아버지에게 할 말이 번뜩 떠올랐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던 녀석의 말이었다.
“…곧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고 완성차 시장에 진출할 녀석입니다. 친구는 가까이 둬야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둬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더 가까이 두고 지켜볼 참입니다.”
‘역시 관록이 있어.’
나이를 먹으며 생긴 관록뿐만이 아니다. 그룹 전체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성질과 욕심조차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이제는 주변 잡소리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무게감을 갖추고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을 짐작해 실행하는 기특한 모습까지 보이질 않는가.
‘어차피 둘을 올릴 참이었지.’
아들들의 반목을 막으려 원래 조만간 실행하려고 했던 일이다. 이제는 마음 편히 진행할 수 있었다.
* * *
오래 지나지 않아 정영호 회장의 지시에 따라 회의실 밖으로 나갔던 경영진이 속속 돌아왔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정택주 회장이 일어나서 발언을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대현 건설 대표 이사로 복귀한 것은 이번 건설의 위기를 넘어가기 위함일 뿐이다. 나는 앞으로도 명예 회장으로서 그룹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룹의 일은 그룹 내에 속한 임원이 하길 바라며 이번 경영자 협의회 표결에 올릴 사안을 결정했다.”
정택주 회장의 아들들과 경영진은 직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발표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현 그룹 총괄 회장직에….”
“““……!!”””
분명 그룹 총괄 회장이라고 했다. 대현 그룹의 후계를 완전히 못 박겠다는 뜻이다.
임원들의 귀가 모두 정택주 회장의 목소리만 집중하고 있었다.
‘바로 나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방금까지 둘을 저울질하셨어.’
정영호 건설 회장은 자신에게 그룹을 이끌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의 형은 아버지 보는 앞에서 거절까지 입에 담지 않았는가.
대안은 자신밖에 없었다.
“…….”
정영수 회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자동차 임원들이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젠 가신들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 지금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만으로 벅차다.
‘헛짓은 아니었겠지? 내 대답이 정답이냐 오답이냐. 그것이 문제다!’
“대현 그룹 총괄 회장직에 정영호 건설 회장….”
“……!”
‘역시 나였어!’
영호는 샴페인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다.
“…….”
‘괜찮다. 씨X. 괜찮다. 강수안 야 인마! 나 어떻게 하냐! 괜찮다. 난 숨을 쉰다. 살아 있다. 난 여물 씹는 소다! 씨X. 자동차라도 지키자. 이건 안 뺏길 거야!’
여전히 정영수 회장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과 정영수 자동차 회장이 맡아 공동 회장 체제로 갈 것을 제안한다.”
회의실 내부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모두 번쩍 들렸다.
“……!!!”
“……!!!”
“……!!!”
다른 경영진들과 마찬가지로 정영수 회장의 고개도 번쩍 들렸다.
‘큽! 살았다! 수안이 만세다!’
기쁨은 감추고 또 감춰야 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끝이 아니야. 더 해야 해!’
정영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연기를 계속했다.
“회장님. 이의 있습니다.”
“…내 제안에 반하겠다는 뜻인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회사는 단일 명령 체계가 필요합니다. 금융 위기 상황에 경영자의 지휘가 분산되면 위기 상황에 제때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허. 그래서?”
‘날 속였더냐? 이제야 본 모습을 드러내느냐? 혼자 다 갖고 싶었더냐?’
정택주 회장은 다시 아들을 의심했다. 아들이 발톱을 감추고 있었고 자신이 그에 속아 넘어간 것은 아닌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아들의 말은 그런 작은 의심조차 봄날의 눈처럼 녹여 버렸다.
“이미 건설 회장님은 그간 충분한 경영 능력을 보여 줬고 명예 회장님도 이를 인정해 오셨습니다. 이젠 그룹 총괄 회장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영호 회장님이 단독 회장을 맡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야 이번 금융 위기를 이겨내고 그룹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여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지만, 이젠 슬슬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속마음이 그 증거였다.
‘젠장. 너무 나갔나? 진짜 무르시면 어떡하지? 이 말은 하는 게 아닌데!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마저 정택주 회장의 눈엔 그룹의 미래를 염려하는 모습으로 보이니 도박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건설 회장의 생각은?”
“…….”
형이 오늘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이젠 걱정할 것도 없어 보였다.
오래지 않아 자신의 것이 될 대현 그룹이다.
“…저도 정영수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회장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형은 언제든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배를 까 보이고 항복을 표시한 상대였다.
‘이전에도 이겼고 앞으로도 이긴다.’
이미 대현 그룹의 가신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상황이다. 앞으론 형을 따르는 임원들까지 모두 자신의 휘하로 넣어 완벽하게 그룹을 손에 넣어야 했다. 오늘 형의 발언으로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 여유를 부리지 않으면 언제 부리겠는가.
“역시 판단력이 좋구나. 방금 그 대답이 널 살렸다.”
“…….”
‘…방금 내가 혼자 해 보겠다고 했으면!’
정영호 회장은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전한 말에 방금 저승 문턱에 다녀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형을 진정으로 후계자 위치에 놓고 계셨어!’
절체절명의 위기감이 엄습한다.
아무리 가신들의 지지가 있더라도 아버지의 결정 하나로 모조리 바뀔 수 있었다.
* * *
정택주 회장은 본래 건설을 맡은 정영호를 중심으로 공동 회장직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노선이 바뀌고 있지만, 공동 회장직이라는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정영수 회장의 말대로 건설 회장이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그간 짧게나마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정영수 회장은 더 일찍부터 나와 일선에서 회사를 꾸려온 경험이 있고 회사의 어려움도 항상 함께해 왔다.”
다만 바뀐 의중이 반영되어 회장 임명 제안을 하는 발표가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정영호 회장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인정이 전부였고 정영수 회장에 대한 평가는 구구절절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정영수 회장이 보여 준 그룹에 대한 책임감과 세월로 쌓아 온 관록은 나이 든 사람도 쉽게 배우기 어려운 것이다. 정 회장은 현재도 일선에서 발로 뛰며 경영자로서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니 실로 그룹 총괄 회장직에 적합하다 할 것이다. 이에 건설 정영호 회장과 자동차 정영수 회장을 총괄 회장으로 명하고 그룹의 대소사를 맡기려고 한다. 협의회 경영진은 이에 대하여 가부를 결정하길 바란다.”
아들이 자신을 대신해 옥살이까지 하고 온 것을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런 이유를 들어 보상을 요구할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아들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나이가 들어 속까지 깊어졌다고 생각됐다.
정택주 회장의 말이 끝나자 경영자 협의회에 모인 경영진이 잠시 입을 가리고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정택주 회장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번복은 없었다.
“오래 생각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니 바로 결정으로 넘어가겠다. 경영진은 이 의견에 동의하면 거수하길 바란다.”
영수와 영호를 제외한 경영진 전부가 손을 들어 승낙한다. 마치 공산당 회의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경영진은 박수로 화답했다. 진정으로 이북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모습과 겹쳐 보이는 사람들이다.
짝짝짝짝.
정영수 회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일어서 있었기에 마치 단독 회장으로 추대되어 박수를 받는 것 같았다. 실제로 명예 회장 정택주의 의중이 어디로 향했는지도 명확했다.
“대현 그룹 경영자 협의회의 추대를 통해 정영호 건설 회장과 정영수 자동차 회장이 대현 그룹 총괄 회장직에 올랐음을 알린다. 두 회장은 앞으로 서로 도와가며 대현 그룹을 이끌어 주길 바란다.”
“아….”
‘됐다. 그것도 단번에!’
진짜 샴페인을 터트려야 할 사람은 여기 있었다.
* * *
경영자 협의회를 마치고 정택주 회장의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룹 총괄 회장으로 추대된 오늘 일은 그리 충격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큰형인 정영수 회장이 아버지의 관심 가득한 지지를 등에 업고 공동 회장에 오를 줄은 몰랐다. 이 부분이 형제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큰형님.”
“어. 영준아. 아깐 내가 늦게 와서 인사도 못 했다. 중공업은 문제없지?”
“회사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형님 다시 봤어. 이제 그룹 회장이잖아?”
“큰일이다. 영호가 마음이 상했을 텐데….”
이제 말투도 감정 수발도 아주 자연스러운 정영수 회장이다.
“형님. 진심이야?”
“난 자동차 하나만 해도 벅차다. 자동차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룹은 영호가 맡아야지. 아버지가 건설을 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어차피 아버지도 영호를 생각하고 계실 테니 너도 앞으로 영호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만 생각해.”
뒤에서 정영수의 말을 듣고 있던 영호가 말했다.
“큰형님.”
“아! 영호야. 그게 말이다….”
정영수는 영호를 붙잡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자식들을 모았던 정택주 회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붙잡은 손을 다시 놔야 했다.
“아버지 말씀 끝나면 따로 얘기하자.”
“…….”
“다들 앉아라.”
“예.”
정택주 회장의 집무실에 모인 형제들이다.
“내가 너희 다섯을 두고 오늘 둘을 골랐다. 그렇다고 남은 너희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러니 이 아비의 고심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예….”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예전부터 비슷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셨다.
“영호.”
“예.”
“영수.”
“예. 회장님.”
“국내 건설 수주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해외도 크게 다르지 않아. 앞으로 건설업 부도율이 어디까지 치솟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금융 위기 상황이다. IMF에서 지원을 받은 후 지금까지 벌써 1만 개 가까운 기업이 무너졌다. 금융권에서 시작된 위기가 일반기업으로 번졌다. 이 중에서 가장 직격탄을 맞은 업종이 바로 건설업이다.
“영호는 이번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건설업 하나로만 본다면 지금은 몸을 움츠려야 합니다. 그래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만 하면 그 이후로는 우리 세상이 옵니다. 전문 건설사도 하나씩 나자빠지고 있으니 겨울을 이겨내면 더 많은 수주를 품에 안을 수 있습니다. 이미 그룹 차원의 구조 조정을 실행했고 체제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적자가 예상되지만, 해외 CB 발행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할 계획입니다.”
아주 정석적인 답이었다.
“영수는 건설이 주가 아니지만 묻지 않을 수 없구나. 앞으로 영호와 공동 회장으로 경영에 참여하려면 건설도 알아야 한다. 너는 어떻게 건설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길이 보이느냐?”
“이미 영호가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이러다 반전에 맛 들이겠어.’
“그렇다고 기업이 기회에 대비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북에 가져갈 선물을 고르시는 것도 결국 이번 정권을 잡은 김대준 대통령의 정책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경제적 이득까지 고려하셨을 줄로 압니다.”
“호오. 그래? 어떤 경제적 이득이 있을 것 같으냐?”
“먼저 북에서 얻을 수 있는 일차적인 사업은 관광 사업입니다.”
“관광?”
“이산가족도 만나기 어려운데, 북한 관광은 너무 심한 비약으로 들리는데요?”
영호가 딴지를 걸었지만, 영수는 부드럽게 받았다.
“저도 과한 추측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익을 볼 수 있는 측면에서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아. 예.”
아직도 거북스럽게 들리는 형님의 존댓말을 들으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계속해 봐. 관광이라니?”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이산가족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이나 한 집 건너 두 집이 이산가족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 국민이 북한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관광지. 누구라도 가고 싶어 하는 그곳.”
모든 형제들의 시선과 아버지의 시선까지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해서 우리나라 국민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환상적이죠?]
수안이 흘리듯 했던 말을 이렇게 써먹는다.
“바로 금강산입니다.”
“아! 생각만 해도 그립구나.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두부처럼 하얀 구름이 걸려 있었지.”
“회장님께서 소 떼를 선물하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내주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북한 지도자는 금강산 관광을 작은 보답 정도로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또 얘기해 봐. 내가 움직인 결과로 따라올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정영수 회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수안에게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대화를 복기했다.
[건설업도 흥할 것 같지 않습니까? 거기 전기가 부족하다고 하니 화력 발전소도 지을 수 있을지 몰라요.]
“국내 수주는 말랐지만, 전기가 부족한 이북에서 화력 발전소 건설을 부탁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 대현 건설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건설사입니다. 대현 건설이 지은 화력 발전소는 국제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대현이 북에 가는데 건설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옳거니. 가능성이 크지. 또, 또 얘기해 봐.”
“제가 생각한 마지막입니다.”
[북한 지역에 생산 공장을 지어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면요? 엄청날 것 같지요?]
수안이 자기 생각을 왜 훔쳐 가냐고 따질 일은 없었다.
“국내 인건비는 자꾸 비싸지고 있지만, 북한의 노동력은 아주 저렴합니다. 그것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지도부와 협상만 하면 거의 공짜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입니다. 우리는 적은 돈을 들여 그 노동력을 활용, 제조 활동에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같은 글을 사용하는 한민족이니 의사소통도 자유롭습니다.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은 추가 소득이 생기는 일이니 반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관련 산업 단지를 북한 내에 지어 남북 공동 관리 구역으로 삼아야겠지요. 이 부분은 정치적인 해결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허허! 거기까지 생각했단 말이야? 이거 내가 영수를 한참 잘못 봤구나.”
[북한과 사업을 하면 쪽박 그 이상은 없습니다. 왜냐? 거긴 법이 없잖습니까. 변태 진상 하나가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무슨 영속적인 신뢰를 기대 하겠습니까?]
수안이 마지막에 한 말은 전할 수 없었다. 이번 대북 사업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신의 동생 영호가 진행하기 때문이다.
영호는 금강산 관광 이후 나오는 형의 말에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
자신은 잔뜩 움츠리고 미래를 기다리자고 했는데 형은 아버지의 행동으로 발생할 미래를 예측해 아버지 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다.
“안 그래도 조만간 대현 건설에서 대북 사업 실무 조사단을 북에 파견하기로 했다. 거기서 남북 경제 협력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했어. 이미 인선을 마쳤다.”
“이미 진행 중인 일이라면….”
영수는 건설 대표인 영호가 왜 자신이 말한 내용을 모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호는 실무자가 아니라 대표일 뿐이다. 결과를 보고받는 사람이지만, 성과가 없으니 아직 보고를 할 것도 없었지.”
“그래도 파견 가기 전에 뭘 어떻게 진행할지 대략적인 윤곽은 그려야 하지 않습니까. 맨몸으로 가면 하늘에서 대북 사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면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습니다.”
영수의 날카로운 지적이 영호의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대북 사업에 너도 함께하겠느냐?”
영수의 말 몇 마디가 몇 주간 고민했던 실무진의 생각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오늘 자꾸 거절만 하는 것 같아서 더 송구합니다.”
“왜. 하기 싫어?”
“솔직히 지금 말씀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더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지는데, 자세하게 파고들면 막막합니다.”
수안이 쪽박이라면 쪽박이 맞았다. 어느 순간부터 수안의 말에 신뢰를 주고 있는 정영수 회장이다. 이번 사업은 무조건 자신의 동생이 책임져야 했다.
“어차피 건설 회장이 시작한 일. 진행도 마무리도 모두 영호가 해야 합니다. 마침 오늘 공동 회장직까지 같이 올랐는데 첫날부터 영호의 숟가락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뒤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번 사업이 성공하길 응원하겠습니다.”
“너 이제 사업 욕심까지 버렸어?”
아들이 너무 심하게 변한 느낌이다. 암소 얘기도 그렇고 북한 사업 얘기도 그렇고 핵심을 다 짚어 줬으면서 성과를 동생에게 미뤄주고 있다.
“욕심은 자동차에 충분히 부리고 있습니다. 올 10월에 출시할 새 모델을 더 살펴야 합니다. 게다가 지금 국내는 메이저 자동차 회사가 없는 무주공산입니다. 이번에 국내 시장을 다 먹어 버리려면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허허허.”
아들은 여전히 그룹 회장직에 대한 감흥이 없는 모양이다. 오직 자동차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기꺼운 마음이 든다.
‘나도 그랬지. 자동차야말로 미래라고 생각했었어. 몰두해서 연구하고 또 파고들었어.’
정택주 회장은 자신의 과거를 아들 영수에게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현 건설에 자금 수혈이 필요하면 은행과 맺어진 관계사 지급보증 협약을 통해 어음을 이쪽으로 돌려주십시오. 자동차는 여유 자금이 조금 있으니 일정 부분이라도 건설에 숨통을 틔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네가 형 노릇을 하는구나.’
정택주 회장은 불퉁한 영호의 얼굴과 넉넉해 보이는 영수의 얼굴이 절로 비교됨을 알 수 있었다.
“네 생각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이번 대북 사업은 영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맡기로 하지.”
“예. 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
영호와 영수가 동시에 답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정택주 회장의 시선은 영수에게 향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