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계자를 위해 (133/304)

후계자를 위해

수안은 다시 탁자에서 소주잔 하나를 들어 유리컵 속에 넣었다.

소주잔 위에 물을 붓자 잔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컵에 물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잔이 몇 개 있을까요?”

“그야 유리컵 속에 소주잔이 들었으니 유리잔은 사실 두 개잖나.”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무슨 소릴…. 아!”

그제야 수안이 말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새끼를 밴 암소! 겉으론 한 마리로 보이지만 실제론 두 마리야. 아버지의 진실한 마음을 여기에 담을 수 있겠어! 이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북에서 크게 환영받으실 거야. 거기다 내가 아버지 눈에 들 수 있는 최적의 수로군.”

“정답. 이렇게까지 힌트를 드렸는데 모르시면 그냥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하하. 아버지께서 진정으로 무릎을 치겠어.”

“하지만 왕 회장님은 여기까지도 생각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뭐? 자네가 아버지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했나?”

“이북에 가시는 것을 진심으로 생각하신다면 나올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정 회장님은 왕 회장님과 비슷한 수준의 감각을 가진 아들이 되는 걸로 만족하십시오. 형제들과 반목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신선한 발상의 전환도 아버지와는 동급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좋아. 좋아. 점수는 확실하게 따겠어.”

“생각만으로 끝내지 마시고 바로 움직이세요. 새끼를 밴 암소 구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까? 미리미리 뛰어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 성과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실행력까지 자랑할 수 있습니다.”

“…허허. 자네 정말 물건이로군.”

“이런 상대와 자동차로 경쟁한다 생각하셔도 계속 그렇게 눈 아래로 보이실까요?”

움찔.

수안의 말에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든 정영수 회장이다. 마냥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무섭게 보시진 말고요. 어린 저는 무척 겁이 납니다.”

하나도 겁먹은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겁은 정영수 회장이 먹고 있었다.

‘저런 놈이 마음먹고 자동차를 시작하면…. 오싹하군.’

“1차 도움은 여기까지 하죠.”

“1차?”

2차도 있다는 말이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정 회장님의 백기사가 되어 드린다고요. 저 함부로 허튼 소리하는 사람 아닙니다.”

“…강 부회장. 뭘 준비하고 있는가.”

“맨입으로요?”

“…….”

아까완 무게감이 다르다. 대가 없이 도움을 받으면 훗날 경쟁자로서의 면이 서지도 않는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정 회장은 수안에게 뭘 줄 수 있는지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고민하긴 뭘 고민하세요. 제가 달라면 줄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없다. 대현 그룹에서 대현 자동차가 갖고 있는 위상이 높은 것도 아니다. 대가를 주고 싶어도 손에 쥔 것이 없으니 보답하고 싶은 마음은 공허한 바람일 뿐이었다.

“…없지. 지금은 없어. 하지만 나중엔 꼭 보답하겠네.”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정영수 회장은 침을 꼴딱 삼키며 수안의 말을 기다렸다.

“건설과 전자, 증권 주식을 매집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

지금은 금융 위기로 인해 주식 가격이 한없이 착하기(?) 때문에 많이 매집해도 차익을 실현할 수 있다. 왕자들의 분쟁이 시작되면 웃돈까지 얹어서 팔 기회가 올 수도 있다.

물론 대현 자동차 주식도 착실하게 매집하고 있다. 이 부분은 괜히 지금 얘기해 분란을 만들 필요 없었다.

“그러니 정 회장님은 형제들과 반복하는 척도 하지 마시고 끌어안는 모양새만 취하세요. 아버지에게 착하고 순한 아들의 모습만 보여 주십시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허허 웃으십시오.”

“아버지가 원하는 일엔 번뜩이는 재치를 보여 주고 말이야.”

“그렇죠. 절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 중 하나가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면 자신도 그 아들을 예뻐할 것 같았다.

형제를 아끼고 품이 넓은 아들. 거기다 자신과 너무나 닮아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뻐하지 않겠는가. 수안의 충고는 하나같이 쓸모가 많았다.

“자네 머리가 대체 얼마나 좋은 거야?”

“한국대 수석 입학하고 사법 고시 단번에 패스할 정도는 됩니다. 운동은 취미로 금메달 8개 정도는 따죠.”

지금까지 보여 준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큭. 내가 같잖은 소릴 했어.”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그랜저를 고급으로 만들 생각은 언제 하신 겁니까?”

“하하. 그야 한참 전부터…. 어? 강 부회장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크크. 빈틈이라 생각하고 찔러 봤습니다. 훅 넘어오시네요. 본능도 감추시고 발톱도 다 갈아서 없애 버리세요. 그래야 피붙이에게 진심이 통합니다.”

진심 아닌 진심을 보이기 위한 마지막 방책까지 충고하는 수안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올해 10월에 출시할 그랜저 XG는 무려 4,600억을 투자해 인공 지능 기술까지 가미했다.

대현 자동차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모델이기에 각별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면 뭐 한답니까. 어차피 저와 강운 자동차는 새로 나올 고급형 그랜저와 경쟁할 차종이 없는데요. 제가 없는 동안만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십시오. 제가 뒤따라가겠습니다.”

수안이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목덜미가 짜르르하다.

“오, 오지 마!”

“푸흐흐. 기다리시라고요. 아직 안 갑니다. 기화 차 입찰이 끝나야 뭐라도 시작하죠.”

대현과 경쟁하기 위해 이미 신모델 차종 개발을 시작하고 있다. 수안이 디자인했고 각종 편의 사양도 개발 중이다. 기화 차 3차 입찰 성공과 동시에 신차 개발이 속도를 붙일 것이고 관련 특허는 동시에 출원될 것이다.

‘화려한 빛의 향연이 시작되죠.’

실내 간접 조명으로 색다른 감각의 차를 강조하는데 이미 외부 디자인부터 죽여 주는 상태라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다. 대현의 그랜저를 고르려던 소비자도 수안의 K5와 K7을 보면 마음을 바꿔먹을 것이 분명하다.

둘이 대화를 끝마치고 나서야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사 듭시다. 회장님. 여기서 예전에 왕 회장님이 사 주셨는데 먹을 만하더라고요.”

예전 4백억 엔이 들어 있던 통장을 정택주 회장에게 넘겨준 그곳이다.

“나도 자주 와 봤어.”

“그러세요? 단골이셨네. 그럼 오늘은 정 회장님이 쏘는 걸로.”

“…….”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젊은 사업가였다.

“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쏘세요. 오늘 저랑 만나셔서 점수 따신 일도 생각하셔야죠. 저 같은 사업가와 만났다고 하면 왕 회장님이 “우리 아들은 노는 물이 다르구나.” 하시지 않겠어요?”

“허!”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 녀석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

“저 강운 그룹 부회장이고 미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 그저 그런 기업가와 같은 급으로 보시면 안 되죠.”

“아버지께 꼭 전해 주지.”

“괜히 트집 잡히지 말고 그냥 가만두세요. 왕 회장님이 전해 주지 않는다고 모르실 분도 아니신데요. 대놓고 얘기하시는 것보다 다른 통로로 들으시면 더 귀를 기울이실 겁니다.”

“큼.”

말 막는 데는 선수였다.

“여기 음식이 저랑 잘 맞아요. 먼저 들겠습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드세요. 흐흐.”

정영수 회장이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수안이 먼저 시작했다.

‘이 녀석이 크면…. 정말 감당하기 어렵겠어.’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우니 나중엔 어떨지 짐작도 안 된다. 오늘도 한없이 휘둘리기만 했다.

정 회장이 숟가락을 드는 손에 기운이 없었다.

* * *

수안은 배영성이 대관한 영화관을 찾았다.

아현은 아들을 떼놓고 나와 가벼운 몸으로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는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우리 너무 일찍 아이를 가졌나 봐요. 더 오래 신혼을 즐길걸.”

“신혼도 좋겠지만, 당신도 정원이를 본 기쁨이 더 크잖아.”

“흣. 그 말도 맞죠. 우리 정원이를 어디에 비기겠어요.”

자식을 가져보면 세상의 중심이 자신에서 아이로 변한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고 수안과 아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오늘은 당신만 생각할게.”

아현은 남편이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하는 말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미소를 보였다.

“흐읏.”

아내의 미소를 본 수안이 느끼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 당신한테 또 반한 거 있지. 아무도 없는데 뽀뽀나 한번?”

“아이참. 호영 씨도 저기서 보고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얼른 들어가요.”

둘째까지 가진 부부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애정 행각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지 않다. 주변에 경호원들이 잔뜩 동행하고 있었다.

텅 빈 극장에 수안과 아현이 들어섰고 경호원들은 멀찌감치 자리 잡았다.

“왜 아무도 없어요? 요즘 타이타닉은 연일 매진 아니에요?”

“왜긴 배 사장이 일을 잘해서 그렇지.”

새로 오픈한 극장이기도 해서 대관이 쉬웠다고 했었다.

“민폐 아닐까 싶은데요?”

“민폐 아냐. 아직 일반에 오픈한 영화관이 아니니까.”

수안은 왜 극장에 아직 사람들이 없는지 설명했다. 아직 오픈을 안 했으니 극장을 찾는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 그래서 주차장도 한산했구나.”

아현은 영화관 전체를 대절한 것은 아닌지 싶었던 모양이다.

“앞으로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차라리 당신하고 내가 완전무장하고 몰래 보는 편이 낫지.”

“당연하죠. 영화관에서 보는 관객들이 다 수익이라고요.”

타이타닉 제작에 BE가 참여했고 그 수익의 대부분이 수안의 회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상영 시작하라고 할게.”

수안의 손짓에 경호원 하나가 휴대 전화를 들었고 곧 극장이 암전했다.

“시작한다.”

아현은 광고 하나 없이 시작하는 타이타닉에 금방 빠져들기 시작했다.

실제 있었던 타이타닉 침몰 사고에 가상 남녀의 로맨스를 섞어 만든 영화였다.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됐던 남녀 주연배우의 환상적인 호흡은 영화에 몰입을 더하게 만들어줬다.

아현은 스크린에서 눈도 떼지 않고 그들의 연기를 지켜봤다.

“두 배우 상당히 호흡이 좋아요. 굉장한데요?”

영화를 감상하는 일반인의 시선이 아니라 같은 배우로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I'm The King of The World!]

극 중 잭이라는 인물의 호기로운 외침은 다가올 비극을 외치는 듯했다.

제임스 감독은 하나부터 열까지 실제성을 강조해서 만들었기에 배에 물이 차오르는 신이나 배가 두 동강 나는 신도 실감 나게 묘사되었다.

맞잡은 아내의 손이 축축하다.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어 배우가 아닌 관객의 위치로 돌아갔음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한 목걸이에 아현은 입을 틀어막았다.

“저 목걸이를 주인공이 계속….”

대양의 심장으로 불리는 거대한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바다로 가라앉는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고하고 있었다.

“하아…. 제임스 감독님이 대단한 작품을 만드셨네요.”

“믿어도 되는 감독이니까.”

“저 목걸이도 가상의 물건인가요?”

“실존하지 않지만 유사한 물건은 존재해. 호프 다이아몬드. 그걸 근본으로 해서 극화했으니까.”

훗날 블루 사파이어로 만든 대양의 심장이 생기긴 하지만 아직은 영화에서 사용한 소품으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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