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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117/304)

관상

대통령이 훗날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을 사용해 미국 시민에게 사과했기에 수안이 먼저 사용했다. 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은 이후에 다른 나라 정부에서 수시로 꺼내 쓰는 단어가 되지만, 앞으론 그럴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 음….”

로버트와 클린턴이 수안의 말에 화를 낼 타이밍에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밖에 있는 사무원의 관상을 좀 봤습니다. 아! 관상이 뭔지도 모르시겠군요?”

수안은 궁금해하지도 않는 클린턴과 로버트에게 동양의 신비를 주입했고, 관상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관해서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

“…….”

클린턴이나 로버트 장관, 이방효 사장도 끼어들 수 없이 수안의 말만 계속된다.

“음… 그러니까 미스터 강은 얼굴만 봐도 상대의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인가?”

“정확합니다. 프레지던트. 방금 저는 르윈스키의 이름을 맞추고 그녀의 친구 이름도 맞췄죠.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녀의 비밀 남자친구도 맞출 수 있었습니다.”

“……?!”

“와우.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 아닙니까?”

클린턴은 재미있지 않았지만, 로버트는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감춰진 비밀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중국과 한국에선 이 신비한 관상으로 왕의 아내를 고르기도 했답니다. 신하들에게도 이 관상을 적용했죠. 관상이 좋지 않으면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오! 동양의 신비라….”

“프레지던트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제가 봐 드릴 수 있습니다.”

“한번 해 보라고 하시죠.”

로버트의 권유에 클린턴은 차마 그러자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 나는….”

“이미 전부 파악되었습니다. 지금 얼굴을 감춰 봤자 소용없어요.”

수안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돌리는 클린턴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한 분과 결혼하셨습니다. 부인을 나타내는 얼굴 부위가 빛이 납니다. 앞날에 고속도로가 열려 있어요.”

“오. 힐러리 여사께서 대단한 내조를 하고 계시지.”

“또한 미국이 발전하겠군요. 프레지던트께서 계시는 동안 미국은 해마다 성장을 거듭할 겁니다. 프레지던트 관상의 좋은 기운이 미국에 퍼져 나가고 있어요. 거대한 미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 우연은 아니었겠죠.”

“오오. 이거 진짜 믿음직한 이야기 아닌가. 하하하.”

좋은 얘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내년에 새빨간 불운이 다가옵니다. 아주 가까이 왔어요.”

“……!”

“이겨낼 수 없는 불운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피해갈 수도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죠.”

“피해갈 수 있는데 왜 안타까운지 모르겠군.”

“프레지던트. 충실한 가장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

“이봐. 미스터 강. 지금 한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가?”

클린턴은 가만있는데, 로버트가 나서서 말했다.

“프레지던트. 제가 본 모든 것을 여기서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르위….”

수안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려 하자 클린턴이 먼저 말했다.

“로버트. 밖에 잠시 나가 주게. 미스터 강과 따로 얘기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스티븐 강은 프레지던트께 예의를 갖춰 주게.”

수안이 눈짓하자 이방효 사장도 로버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 클린턴이 버튼 하나를 누르고 입을 열었다.

딸깍.

“이제 이곳은 도·감청에서 자유롭네. 편히 말하게.”

“편리한 장치로군요. 밖에서 르윈스키를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만나는 애인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수안이 클린턴을 직시하며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로 그녀의 비밀 남자친구야.’

“그걸… 얼굴만 보고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안 믿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다음 달 프레지던트에게 망신당할 기색이 보입니다. 두 사람에게 같은 불행이 보이는 것을 보면 성 추문일 것이 뻔한 일입니다. 둘의 머리카락이 아주 단단하게 엮여 있어요. 이 정도로 인연이 엮이려면 부부 사이에나 가능한데…. 대통령께서는 이미 부인이 있으시네요. 그럼 뻔한 일이죠.”

“자네의 말은 흥미롭지만, 그런 일은 없네.”

딱 잘라 반박해도 수안은 이미 알고 있다.

“또 예전처럼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시겠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불행이 한결 가까이 다가옵니다.”

원래 이런 추문이 처음도 아닌 사람이다. 몇 번이고 성 추문이 있었다.

“르윈스키는 관상학적으로 자신의 얘기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절친한 친구에겐 자신이 만나는 특별한 남자친구에 대해서 모두 털어놨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죠? 르윈스키는 친구 복이 없더군요. 언제나 배신당할 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녀는 관상이 참 나빠요.”

“……!!”

수안은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뭐 하러 머나먼 이국땅에서 관상까지 들먹이며 한 사람을 구렁텅이에서 빼내려고 했는지 후회스럽다.

‘내가 왜 관상가 흉내까지 내면서 이러고 있냐.’

이미 내디딘 걸음이라 무를 수도 없는 것이 문제다.

“친구의 이름이 뭐지?”

“아무 일도 없었다면 왜 그녀의 친구가 궁금하십니까?”

“…배신이라고 하니 백악관 직원이 걱정됐을 뿐이네. 그녀는 맡겨진 일을 훌륭히 하는 친구야.”

이어진 변명에 수안은 관상이라는 가면을 내려놨다.

“그녀를 배신할 친구의 이름은 린다 트립. 이번 정부가 들어서며 펜타곤에서 해고되고 앙심을 품은 여인이죠. 친구를 배신하는 이유는 자신이 해고된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상세하지 않은가! 자네가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수안은 클린턴의 말을 잘라먹으며 계속 설명했다.

“그녀는 르윈스키와 친구로 지내며 그녀와의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해서 갖고 있죠. 이것을 방송에 터트려 이번 정부 아니, 대통령의 이미지에 먹칠하려 합니다. 공화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언론이 프레지던트를 노리고 물어뜯을 겁니다.”

“지금 무슨….”

지금까지 관상이라는 이상한 얘길 하던 때와 다른 말투였다. 마치 입수한 정보를 알리는 투였다.

“제가 믿기지도 않을 관상까지 들먹이면서 얘길 하면 조금이라도 들어 줘야 하지 않습니까? 곧 희대의 스캔들이 터지게 생겼다고 해도 안 믿으시면 저도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

“일의 해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내연 관계를 종료하시고, 린다를 펜타곤에 복직시켜 녹음 파일을 모두 돌려받으세요. 상황 종료. 해피엔딩. 아주 깔끔하죠.”

수안이 스캔들을 막는 첫 번째 이유는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함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상처받을 두 여인을 위함이다. 여인 중 하나는 클린턴의 아내인 힐러리였고, 남은 한 여인은 힐러리와 클린턴의 딸이다. 대통령도 그의 불륜 상대도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

“…정보의 출처가 궁금하군.”

“제가 가진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 주요 방송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제보로 받는 정보의 질도 상당한 수준을 자랑합니다. 다행히 BE 지분이 높은 방송사 기자에게 린다의 제보가 들어와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을 뿐입니다. 지금 저와 대화할 시간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다른 방송사에 녹음 파일 샘플을 건네주면 제가 확보한 시간도 소용없습니다.”

“아….”

이제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다. 수안이 가진 회사를 예전에 보고 받았고 실제 BE 인베스트먼트가 방송사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빙성이 높은 정보였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린다의 복직을 먼저 처리하시면 녹음 파일 확보에 수월하실 겁니다. 마침 제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 정보를 듣고 막을 수 있었죠. 프레지던트는 운이 참 좋습니다.”

“…알겠네. 린다를 펜타곤에 복직시키고 녹음 파일을 회수하지.”

이번 달러 입금으로 수안에게 추가 후원금을 요구하려던 계획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정치 스캔들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내년에 다가오던 칙칙한 불행의 기운이 프레지던트의 관상에서 사라져 갑니다. 해피 뉴 이어.”

나오는 길에 르윈스키의 궁금증 가득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수안은 미국 대통령과 짧은 만남을 끝으로 백악관을 나섰다.

“날씨는 징그럽게 맑네.”

오늘따라 하늘이 맑고 푸르다.

더러운 정치가도 싫지만, 성 추문까지 발생시키는 정치가는 더욱 싫다.

그의 아내는 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정원이가 보고 싶다.”

아들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아들을 보면 이 기분이 한결 나아질 텐데.’

“제일 빠른 비행기가 몇 시지?”

“인터뷰는 하고 가셔야죠. 회장님.”

“…나도 알아.”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지만, 내일 인터뷰가 있었다.

“로버트 재무부 장관과 골프 약속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도 잘 알고.”

아직 집에 돌아가려면 며칠 더 필요했다.

* * *

“와우. 오늘 제가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유명한 분을 만나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수안 강.”

“반갑습니다.”

“1997년 마지막 날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와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미스터 강의 팬들을 대신해 이 영광을 만끽하도록 하죠.”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당신이 절 인터뷰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미셸.”

“절 알아봐 주셔서 더 영광인데요?”

“당신이 출연한 영화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가 있거든요. 하하.”

배트맨 이외에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수안은 육상 경기에 관한 질문과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적당한 수준에서 대답했다.

이미 인터뷰에 나올 질문들은 사전에 조정이 끝난 상태였다.

준비된 질문에 준비된 답변이 오가고 인터뷰는 마무리를 남겨 놨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이번 미국 방문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는데 방문 목적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예정된 질문은 아니지만, 의외의 질문도 아니었다.

수안은 농담으로 질문을 받았다.

“이미 공항에서 다 불었습니다. 저는 불법 체류자가 될 생각이 없어요. 단지 여행이거든요.”

미셸의 웃음소리 이후에 다시 적당한 답을 했다.

“사실 제 회사가 미국에서 상당한 성과를 보인다고 해서 격려차 찾아왔습니다.”

“왓? 수안 강이 미국에 회사를 가지고 있었군요? 제가 아는 회사일까요?”

“여성들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남성을 위한 물건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런. 앞으론 여성을 위한 물건도 만들면 되겠어요. 제가 첫 번째 구매자가 되어 드리죠. 그 물건이 제가 살을 빼는 데 도움이 될까요?”

운동선수이니 스포츠에 관련된 제품이라고 생각한 미셸이다.

“…….”

이래서 인터뷰가 재미있다.

이 대답으로 인해 시알리스의 매출 증대에 지대한 효과를 발휘할 것 같다.

“바이오 애보트에서 판매 중인 시알리스가 여성의 운동에 필요할지 모르겠군요.”

“시알리스?!”

미셸도 시알리스가 무슨 약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여성에겐 효과가 없을 테니 드시지 않는 걸 권고하죠.”

“하하. 요즘 미국인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약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만들었군요! 정말 대단한 정보였어요.”

“적당한 운동과 식이 조절이 건강한 몸을 만듭니다. 그 약은 특별한 치료 목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인터뷰가 나가면 다시 시알리스의 매출이 껑충 뛰어오를 것이다.

모르는 사람도 인터뷰를 보면 시알리스가 무슨 약인지 찾아볼 테니까.

* * *

하지만 인터뷰 후에 이방효 사장은 방송사에 녹화된 인터뷰를 편집하라고 지시했고, 편집된 인터뷰를 확인한 수안은 꼭 이래야 했나 싶었다.

변경된 인터뷰는 절묘하게 편집되어 바이오 애보트가 수안의 회사라는 부분이 빠져 있었다.

-시알리스? 그 물건이 제가 살을 빼는 데 도움이 될까요?

-여성에겐 효과가 없을 테니 드시지 않는 걸 권고하죠. 적당한 운동과 식이 조절이 건강한 몸을 만듭니다. 그 약은 특별한 치료 목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알리스의 목적이 치료에 있다지만, 회장님의 이미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성 기능 치료제로 판매하고 있지만, 다들 정력제 정도로 생각하니까요. 회장님의 이미지에 성적인 부분을 끼얹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때가 아닌가?”

“어차피 나중엔 알려질 일이지만, 우리 입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지요. 국내에 금융 위기가 닥쳤는데 지금 한국 국민에게 BE의 존재가 알려져 봤자 좋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수안은 이방효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많은 사람이 BE를 알게 되면 이런저런 뒷말이 나올 수 있겠어.”

김대준 당선인만 해도 BE의 자금을 이용해 위기를 넘어가려 했었다.

국민이 알게 되어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왜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도 조국의 위기를 외면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고, 그 궁금증은 곧 증오로 바뀔 것이다. 끔찍한 결말이다.

“어차피 인터뷰는 이번 미국 방문으로 예의상 했을 뿐입니다.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요즘 비아그라와 경쟁은 어때? 여전히 박빙인가?”

“저희 쪽으로 중심선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로 확실히 넘어서겠죠.”

시알리스라는 제품명이 인터뷰에 실려서 다행이다.

‘그거면 됐지 뭐.’

자신의 것이라 밝히지 않는다 해도 회사가 어디 도망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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