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al Office
대현 그룹 두 부자의 대화가 이뤄지는 그때 수안은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비서실 직원 수십이 수안을 보좌하기 위해서 함께 도착했다.
‘숫자가 많아도 허전할 줄이야.’
배영성이 없으니 이 모양이다.
그래도 맡긴 일이 많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배영성을 대신할 다른 사람이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회장님.”
“이 사장. 하하하. 이제 남들 눈치 안 보고 만나니 얼마나 좋아.”
BE 인베스트먼트와 수안과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서로 마주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공항에서 서로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미국 BE 인베스트먼트를 이끄는 이방효 사장이 직접 마중 나왔다.
“동남아시아 일은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제가 뭘 했겠습니까. 실무진에서 고생 많았죠.”
“그래도 소로스 마음을 돌려세웠잖아. 보니까 소로스가 일본에서도 발을 많이 담그지 않는 것 같던데, 이것도 이 사장이 한 일인가?”
“친분이 생겨 작은 경고를 남겨 줬습니다.”
“소로스 그 사람이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속이 깊은 사람이야. 잘했어.”
수안이 이방효를 통해 경고하지 않았어도 소로스의 원화 공격은 미수(?)에 그쳤을 예정이다. 한국에서 쏟아지는 금이 문제였다. 그리고 소로스는 김대준 당선자와 친분을 가진 사람이고 민주주의와 인권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훗날 자신의 자산 대부분을 기부하는 사람으로 수안은 소로스를 선량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저도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답니다. 그가 세운 재단에 BE도 기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Open Society Foundations, OSF) 말이야?”
1993년에 민주주의·인권 운동을 위해 소로스에 의해 설립됐고, 이후 인권운동과 난민 구호 등을 위주로 활동하는 재단이다.
“회장님도 알고 계셨군요.”
“며칠 지나면 1998년…. 아무래도 소로스와 이 사장이 또 만날 일이 생기겠어.”
“……!”
수안이 소로스와 만나 친분을 쌓으라고 했던 것은 이번 동아시아 금융 위기 때문이었다.
소로스와 만날 일이 있다고 하면 이번과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이 사장도 눈치가 늘었어?”
소로스는 롱텀 캐피털(LTCM) 파산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번에 한국에 닥친 위기가 전 세계로 영향을 끼칩니까? 대공황의 재림입니까?”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한국이 그 정도로 영향력이 크진 않잖아?”
“흠흠. 죄송합니다.”
이방효의 질문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아시아가 추락하고 다음은 어디인가를 묻는 시장의 화두에 러시아가 선택된 거지.’
이후 신용 평가기관들은 러시아의 신용 등급을 강등시키고 루블화는 폭락한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채를 사며 자신들의 투자 이론을 맹신한 롱텀 캐피털은 파산을 면치 못한다.
‘무려 100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손실을 기록하니까 말이야.’
소로스가 투자한 곳이 바로 이 롱텀 캐피털이다.
“그보다 뒤에 아는 얼굴이 보이네?”
이방효 사장 뒤로 예전 신혼여행에서 봤던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헤이. 클락슨!”
배영성이 보낸 모양이다.
오랜만에 만난 클락슨은 그사이 근육이 더 붙어 있었다.
“맨날 운동만 하고 살았습니까? 손이 등에 닿지도 않겠습니다.”
“손은 예전부터 등에 안 닿았습니다.”
“하하. 하긴 그랬겠네요.”
“그리고 오늘은 재무부의 의뢰로 이곳에 왔습니다.”
“와우. 미스터 클락슨. 이제 정부 의뢰까지 받는 겁니까?”
“스티븐 강의 경호 임무라는 걸 알고 자원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저도 아는 얼굴이라 편하군요. 갑시다.”
“저도 호텔로 출발하겠습니다. 내일 그곳에도 함께 가야 하니 오늘 미리 회장님과 합을 맞춰 봐야죠.”
“하하하. 합은 무슨 합이야? 가서 얼굴이나 보고 오면 끝인데. 이 사장이 술이 고팠나 봐?”
“들켰네요. 오늘은 배 사장님도 안 계시고. 김 사장님도 없으니 제 세상 아닙니까.”
“얼른 호텔로 따라와. 옷 갈아입고 나오지. 대신 오늘 저녁은 이 사장이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줘. 내가 미국은 잘 몰라.”
수안은 미국에선 한국과 다르겠지, 싶었다. 이방효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큰 착각이었다.
“헤이! 마하 맨!”
“수안 강!”
“여기 봐 줘!”
수안과 이방효를 포함해 경호원들까지 정신없이 만드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부는 파파라치라고 부르는 집요한 기자들이다.
“…그냥 호텔로 가야겠다.”
“저도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96년 올림픽이 미국에서 열렸음을 기억했어야 했다. 미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올림픽 3연패의 주인공.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4관왕을 차지한 수안이다. 육상 스프린터 강수안을 알아보는 미국 사람들이 펍으로 하나씩 들어왔고, 결국 펍이 미어터질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다.
“길을 만들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날 수안이 밖에서 한 일은 경호원이 터 준 길을 따라가며 어색한 미소를 보이고 손을 흔들어 준 것이 전부다.
호텔 방에 들어와 소파에 앉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후아.”
수안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을 듣고 이방효가 미안한 듯 말했다.
“내일 신문은 볼만하겠네요.”
“어쩔 수 없지 뭐. 나중에 인터뷰라도 잡아야지,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비추지 않고 돌아가면 안 되겠어.”
아무 생각도 없이 미국에 왔지만, 팬들의 아우성이 아직도 귀에 울린다.
“회사에서 인터뷰를 잡아 보겠습니다.”
“고생스럽겠지만, 부탁해. 적당한 방송사 찾기 어렵겠어.”
이방효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수안을 보다가 말했다.
“…회장님. 미국 BE에서 지분을 투자한 방송사가 여럿 있습니다.”
“아…. 그랬나?”
“회장님과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켜 준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그럼 내일 백악관 일정 이후로 일정 잡아 봐.”
“예. 회장님.”
“그리고 룸서비스로 맥주도 나오나?”
“뭐든 안 되겠습니까.”
결국 수안과 이방효는 호텔에서 적당한 룸서비스로 조촐하게 술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 * *
다음 날 수안은 로버트 재무부 장관과 먼저 만났다.
“스티븐 강. 동양인치곤 정말 너무 큰 거 아니오?”
“제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렇습니다.”
“아. 나도 운동을 열심히 할 걸 그랬어.”
로버트 장관의 키도 작은 편이 아니지만, 186cm의 수안에 비하면 작게 느껴졌다.
“오늘 프레지던트 일정이 많아서 일찍 가야 할 것 같으니, 가면서 얘기합시다.”
바로 백악관으로 이동한 수안은 차 안에서 정말 하잘것없는 얘기들을 해야 했다.
“시알리스가 출시되자마자 시장 반응이 정말 대단했지. 사람들은 비아그라만 있는 줄 알았다가 다시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어. 비아그라는 고작 하루를 가는데, 이 녀석은 무려 3일 동안 유지된다고 하잖아. 게다가 안면 홍조나 두통 같은 부작용이 덜한데도 말이야.”
부작용을 얘기하는 걸 보니 많이 먹어 본 모양이다.
“우리 제약사에서 신약 연구 개발에 엄청난 투자를 했습니다. 비아그라는 초창기 불량품일 뿐이죠. 진짜는 바로 시알리스였습니다.”
“아하하. 그래서 특허를 파이자 제약에 판매했다는 말이야? 불량품을 팔면서 그렇게 큰돈을 받아 내다니, 스티븐은 머리가 비상해.”
“그렇습니다. 서로에게 아주 유익한(!) 거래였죠.”
“맞지. 맞아. 아주 유익한 거래였지.”
그 거래로 상당한 거금을 손에 쥔 로버트 장관이다. 사실 로버트 장관이 거래에 관여한 일이 없었음에도 그저 장관이라는 이유로 받은 돈이다. 그 거래의 성공은 프랭크 빈치 부장관이 노력한 결과였다. 로버트 장관으로선 유익하다고 할만했다.
“요즘 약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하더군.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급이라니 시설에 더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수안은 로버트 장관이 왜 이렇게 시알리스 얘기에 열을 올리는지 알 것 같았다.
‘동철이 삼촌의 눈이 꼭 이랬었지….’
“시설은 이미 늘리고 있지요. 그보다 주변에 광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재무부 직원 한 명만 따로 보내 주시면 시알리스 열 박스를 내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주변에 인심 쓰시면서 저희 제품을 많이 알려 주십시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백악관이 보인다. 이제 시알리스 얘기를 그만해도 좋을 것 같다.
* * *
수안은 몸수색을 거쳐 백악관에 들어와 기다리다가 대통령 집무실 밖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르윈스키?”
“강 선수가 절 알아요?”
“아. 왠지 이런 이름일 것 같았습니다.”
“어머! 그냥 제 성을 맞췄다고요?”
귀가 얇은 여자였다. 수안은 장난기가 동했다. 본래는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은 먹고 온 참이다.
“어디 이름도 알아볼까요? 음…. 모, 모, 모니.”
“오 마이…!”
“모니카! 모니카일 것 같군요.”
“우앗! 맞아요!”
“하하하. 제가 동양의 신비에 관심이 많답니다. 동양에선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신비로운 학문이 있죠.”
“설마요. 분명 당신은 백악관 어딘가에 적혀 있는 제 이름을 본 것이 틀림없어요.”
인제 와서 이성적인 사람으로 포장해 봤자 소용없다. 이미 수안은 장난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하나 더 맞춰 보죠. 당신의 아주 은밀한 비밀도 맞출 수 있답니다.”
“에?”
“당신의 애인부터 살펴볼까요? 당신 얼굴에 다 드러나고 있어요. 오! 보입니다.”
수안의 과장된 몸짓과 가늘게 뜬 눈이 지금 장난을 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짓말. 당신은 정말….”
“저런…. 날 믿지 않는다니 더는 해 줄 말이 없겠어요.”
당장이라도 말해 줄 것처럼 과장되게 행동하던 수안이 고개를 획 돌렸다.
누구라도 친분을 갖고 싶은 올림픽 스타라서 그런지 르윈스키가 매달린다.
“그래도 말해 봐요. 재미있단 말이에요.”
로버트가 집무실에서 나와 수안이 들어와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미안해요. 그가 날 찾네요.”
“이렇게 잔뜩 궁금하게 만들고 사라질 건가요?”
“대신 당신이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이름도 보이는데 말해 줄까요?”
“그거라도 말해 봐요. 내 친구는 절대로 모를걸요?”
수안은 걸음을 옮기며 가볍게 말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말투다.
“린다 트립. 그녀가 당신의 베스트 프렌드로군요. 당신 얼굴에 그녀의 이름이 있어요.”
“……!!”
“그를 만나고 나와서 당신과 얘기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Bye.”
르윈스키는 수안이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 * *
수안은 오벌 오피스 (Oval Office)에 들어섰다.
미국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을 부르는 명칭이다.
‘훗날 오랄 오피스라고 불리기도 하지.’
눈앞에 있는 이 인물과 밖에서 만난 르윈스키의 불륜 스캔들이 널리 퍼지며 생긴 우스갯소리다.
또한 이 스캔들을 지퍼게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문제로 거짓 변명을 내뱉었다가 대통령 탄핵 재판까지 이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녀의 옷에서 대통령의 체액이 발견된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도 당연했다.
수안은 상념을 끝내고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프레지던트.”
“와우. 드디어 만나는군. 미스터 강. 정말 오랜만이야. BE CEO도 반갑소.”
“반갑습니다. 프레지던트.”
수안 다음으로 이방효 사장이 클린턴과 악수했다.
클린턴 대통령과는 지난 96년 미국 올림픽에서 안면을 익힌 적이 있었다. 무려 육상 4관왕이다. 당시 대통령과 만났다고 해서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도 찍고 사인도 어딘가에 남겨 놨다. 당시에도 수안이 BE의 수장임을 알고 있었기에 경제에 관한 대화도 많이 나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밖에 나돌아다니기 힘들었습니다.”
“가정생활에 충실한 아빠였군. 건강한 몸에 많은 돈을 갖고, 가정에까지 충실한 남편이라니, 눈앞에 있지만 나도 믿기 힘들어. 하하하.”
‘당신도 가정에 충실했으면 좋았을걸.’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하긴 어렵다.
“앉아서 얘기하지. 우선 이번 한국의 금융 위기는….”
수안은 미국 정부가 일본을 노리고 시작한 일에 한국이 피해를 보았다는 입에 발린 변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도 환율을 조작해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손대고 있었고, OECD 가입국인 이상 시장에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들도 나온다.
결국 수안이 미국과 IMF의 업무(?)에 큰 해악을 끼쳤다는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이다.
수안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일에 사과를 표명해야 했다.
감정 없는 말투로 담백하고 정중하게 표현했다.
“제가 돈을 불리기 위해 부적절한 방법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죠. 달러 가치 상승이 눈에 띄어 200억 달러를 환전했고 이미 두 배의 이득을 얻었습니다. 앞으론 수십 배의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사과도 뭣도 아니다. 그냥 부적절하다는 단어를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