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린다 (118/304)

린다

린다는 평소와 같이 장을 보고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사 온 물건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우편물이 왔나?’

문밖에는 검은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누, 누구시죠?”

“린다 트립. 맞습니까?”

“경찰을 부르겠어요. 나가세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린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지갑에서 펼쳐 보인 신분증에 익숙한 정부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부? 펜타곤에서 나왔나요?”

“아닙니다. 물론 당신이 펜타곤에서 일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여긴 대화를 나누기에 좋지 않은 장소로 보입니다.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먼저 말해 주세요.”

“린다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린다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분은 따로 있어서 제가 드릴 말씀은 많지 않군요.”

“…들어오세요.”

“먼저 들어가 계시면 그분을 모셔오겠습니다.”

“…….”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집 앞으로 등장한 사람은 린다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오 마이….”

미국인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인물. 대통령이다.

“린다.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나, 난….”

린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클린턴 대통령은 린다를 지나 거실로 불쑥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집 주변을 경호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와 미안합니다. 중요한 일이라 제가 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들어온 사람은 대통령 혼자였다. 경호원들과 대통령의 보좌관은 아예 집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당신이 위협을 느낄지도 몰라서 저 혼자 대화하겠다고 했습니다. 편히 앉으세요. 린다.”

소파에 앉아 린다를 앉으라고 하는 클린턴은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편안한 자세였다.

“…뭘 알고 왔죠?”

“백악관에서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 르윈스키가 당신의 이야기를 해 줬어요. 전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죠.”

“하! 내 친구가 대체 무슨 얘길 했죠?”

그 입이 가벼운 친구가 대통령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되지 않았다.

“당신을 펜타곤으로 복직시켰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열심히 일하던 친구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어 무척 상심하고 있다고요.”

“……!!”

“그래서 어제 당신의 퇴직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고 복직을 지시했습니다. 당신의 업무 평가는 상당히 우수했는데, 왜 일을 그만두게 했는지 모르겠더군요. 내일 중으로 연락이 올 겁니다. 펜타곤에 직접 연락하면 바로 확인할 수도 있을 테고요.”

“아!”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일이다. 상상으로나 가능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어때요. 제가 그녀의 부탁을 잘 들어준 것 같습니까?”

클린턴은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왔지만, 착오가 있었다.

“난…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한 일이 없어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녀의 상상은 외부로 표출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친구 르윈스키는 자신이 펜타곤에서 일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펜타곤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린다는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뭐죠? 왜 갑자기 나를 복직시켰죠?”

클린턴은 린다를 가만히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난 당신이 가진 테이프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강제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죠. 난 최대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고 서로 웃으며 거래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복직은 제 작은 호의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강제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는 또 다른 사본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납치되거나 체포되면 테이프의 존재가 곧바로 언론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테이프….”

린다는 대통령이 녹음테이프의 존재를 알고 있으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을 해 봐요. 난 많은 것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복직은 여러 제안 중 하나였다. 나머지는 오늘 대화를 통해 제공할 생각이었다.

“…당신은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어요.”

“……!!”

린다는 소파 하나를 뒤집어 테이프 박스를 꺼냈다. 르윈스키와 통화한 모든 내용이 이 녹음테이프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원본입니다. 사본은 만들지 않았어요.”

클린턴은 테이프 박스를 받아 크게 안도했다.

“휴우….”

수안의 말대로 먼저 호의를 보이니 적대심 가득한 그녀가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요즘 CIA 기술이 더 발전한 모양이군요. 제 사생활이 어디까지 도청되고 있는 거죠?”

“도청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사실이다. 도청을 통해 알아냈다면 린다는 펜타곤이 경찰서 구치소로 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경찰서에 가 있는 동안 요원들을 통해 테이프의 존재를 찾아냈을 것이다.

“더는 거짓말을 듣고 싶지 않군요. 누구도 이 테이프의 존재를 알지 못해요. 도청이 아니면 말이 되질 않아요.”

“설마요. 이미 당신이 기자와 접촉한 것을 알고 있어요.”

“무슨 소리죠? 난 어디에도 연락한 적 없습니다. 이 테이프의 존재는 아무도 몰라요.”

“……!”

“나와 통화한 르윈스키도 이 테이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데 도청이 아니면 말이 안 돼요. 오직 나만 이 테이프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까요.”

“아….”

분명 수안은 방송사에서 린다의 정보를 얻었다고 했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

클린턴이 황망한 기색을 드러내자 린다는 오히려 얼굴을 풀었다.

“할 말이 궁색한가 보군요. 괜찮아요. 나도 펜타곤에서 일했던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미워하던 대통령이 자신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의 복직과 함께 마음속 응어리졌던 분노가 날아가 버렸다.

“그 말엔 어폐가 있군요. 일했던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도 당신은 정부 사람입니다. 린다 요원.”

“풋.”

“펜타곤으로 복귀한다니 가슴이 떨리나요?”

“아닙니다. 프레지던트. 제자리로 돌아간다니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요.”

린다는 펜타곤 요원으로 돌아와 대통령을 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복귀를 받아들인 것이다. 자신이 특수 요원은 아니었지만, 요원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요원이라고 불리면 꼭 비밀 요원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펜타곤은 당신과 잘 어울릴 겁니다. 국방부를 부탁하죠. 그리고 도청은 이제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이 오늘로 깨끗하게 정리되었으니까요.”

도청을 한 일도 없지만, 이를 굳게 믿고 있으니 그에 따라준 것뿐이다.

“친구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테이프는 사과드리겠습니다. 프레지던트.”

클린턴은 환하게 웃으며 린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사과를 기쁘게 받겠습니다. 린다 요원.”

“르윈스키가 왜 반했는지 알 것 같네요. 앞으론 민주당을 응원해야겠어요.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대통령이었어요.”

“오우. 난 이제 영부인만 보고 살 생각입니다.”

“하하. 잘 선택하셨습니다. 프레지던트. 저도 더 이상의 추문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

과거의 추문이 여전히 그를 따라다닌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클린턴은 수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백악관의 정보 보안이 허술할 리가 없었다. 르윈스키와의 일도 그렇고 린다 트립의 테이프도 그렇고 일개 개인이 파악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BE 인베스트먼트가 거액을 움직이는 금융 회사라고 해도 가능한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다. 이 정도 정보를 취득하려면 최소한 미국과 비슷한 수준을 가진 국가 기관이 나서야 했다.

린다의 집에서 도청 장치를 회수하는 척하며 요원들에게 장비가 설치된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지시했던 클린턴이다. 결과는 클리어. 너무 깨끗했다. 그 어떤 외부 장비의 흔적도 없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정말로… 얼굴만 보고 이 모든 것을 맞췄어?’

수안이 열성적으로 설명했던 동양의 신비에 생각이 미친다.

* * *

수안은 로버트 재무부 장관과 골프를 치던 와중에 전화를 받았다.

“스티븐. 프레지던트께서 자넬 찾는군.”

로버트의 전화를 받아 목소리를 들어 보니 일을 해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수안입니다.”

-나만 빼고 로버트와 골프를 치러 가다니 실망이야.

목소리가 한결 가볍다.

“문제가 잘 해결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간상? 이라고 했나? 목소리로도 상대가 한 일을 알아맞힐 수 있어?

관상의 발음도 쉽지 않은지 엉뚱하게 발음하고 있다.

“훗. 관상엔 세상 만물의 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방대한 학문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나도 그 간상이라는 것을 연구해 봐야겠어.

일전엔 콧방귀도 뀌지 않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싶다.

‘일을 잘 해결해서 관심이 생겼나?’

“스스로 공부하시면 10년도 부족합니다. 대신 제게 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볼 수 있는 만큼 하늘의 비밀을 말씀드리죠.”

-하하하. 하늘의 비밀이라니 정말 재미있군. 그럼 저번에 얘기한 아내 이야기를 해 보게.

영부인에 대해서라면 얘기할 것이 좀 있다.

“프레지던트께서 아내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이신다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도 불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부부가 대통령을 역임한 초유의 사건이 되겠군요. 나중에 따님도 정치에 입문시키시죠. 온 가족이 대통령이 되면 정말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이봐. 미스터 강. 그건 너무 심한 농담이야.

“따님은 농담이지만, 영부인의 능력은 농담이 아닙니다. 영부인은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프레지던트의 빛에 가려졌을 뿐이죠. 영부인을 한껏 지원해 주십시오.”

-와우.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로군.

이제 클린턴에게 오점이 없으니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물론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미국의 대통령이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수안은 한국인으로 살다가 한국인으로 죽을 생각이다.

“…보아하니 미국의 다음 대통령도 보이더군요.”

-그런가? 누구지?

“다음은 당신이 재선을 막은 전 대통령의 아들이 오르게 될 겁니다. 이쪽은 미국 사상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 되겠군요.”

-부시가(家)를 말함이로군.

클린턴은 수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부시가(家)는 전통적인 공화당이었다. 수안의 말대로라면 다음 대선은 민주당이 정권 유지에 실패한다는 뜻이다.

“부시가(家) 이후 대통령도 알고 있는데 얘기해 드릴까요?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겁니다. 새로운 세상이죠.”

-오! 이런. 내가 또 깜빡 속아 넘어갔군. 됐네. 그보다 미스터 강은 내게 부탁할 일이 있나?

자신의 와이프가 대통령이 된다는 말은 흥미로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부시까지도 가능성이 있었지만, 흑인 대통령이 나오는 부분에서 막혀 버렸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수안의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은 클린턴이다. 흑인의 인권을 신장해야 한다고 떠드는 세상이다.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은 노력으로 신장되어야 할 만큼 인식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런 미국에서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아 줄 시민은 없다고 생각했다.

‘진짠데.’

“프레지던트에게 부탁할 만큼 간절한 일은 없군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게. 해피 뉴 이어.

본래 민주당에 주려고 했던 로비 자금이 굳었다. 대통령 본인의 성 추문을 수안이 막아낸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후원금 일부를 받는 것보다 더 고마워할 일이다.

통화를 마친 수안은 골프를 치며 계속되던 로버트 장관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대통령의 일이 너무 궁금하지만, 참도록 하지.”

사전에 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던 로버트 장관이다.

“별일 아니니 궁금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나저나 캉드쉬 총재에게 말 좀 잘해 주십시오. 지원금에서 무려 200억 달러가 줄어들었는데, 조건이 바뀌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한국 정부에서 수안이 백악관에 가는 걸 알고 협상 중에 겪은 어려움을 전달해 왔다.

캉드쉬 총재와의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지원금 200억 달러를 줄인 것 외에 다른 부분에 전혀 양보가 없다는 소식이다.

“미국 재무부 장관을 보고 IMF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 하잖나.”

“안 되는 걸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니니 그렇죠. 무려 200억 달러가 줄었잖습니까.”

수안은 그린과 거리를 가늠하고 힘차게 스윙했다.

카앙!

수안의 공이 쭉쭉 날아간다.

“굿 샷.”

“아니면 프레지던트에게 미리 부탁해야 했을까요? 제가 부탁하면 뭐라도 해 주실 것 같았거든요. 휴대 전화를 다시 빌려주시죠.”

“어차피 IMF는 내 소관이야. 캉드쉬 총재에겐 따로 전화하지.”

“감사합니다. 장관님. 퇴직하시면 말리부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말리부?”

“아름다운 별장이 있어서 매입했는데, 저보단 로버트 장관님께 더 어울릴 것 같거든요.”

“하하하. 말리부 해변이 아름답긴 하지. 말리부에서 휴가를 즐기면 정말 좋겠군.”

간단한 대화와 승낙으로 말리부의 별장을 선물 받은 로버트 장관이다. 거액의 정치 후원금 대신 아담한(?) 별장 하나로 대체했으니 남는 장사였다.

로버트와의 골프는 오래지 않아 마무리되었고, 결과는 수안의 압승이었다.

‘접대 골프라고 해서 져 줄 필요가 있나. 접대는 별장 하나 선물했으면 됐지.’

“…자네 골프 해 볼 생각 없나?”

“진지하게 말씀하지 마세요.”

“쩝. 자네가 골프를 너무 잘 쳐서 그러지.”

“…로버트 장관님은 퇴임하시고 뭐 하실 겁니까?”

“미국에서 재무부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할 일이 없겠나?”

“제가 골퍼가 되면 캐디가 필요할 것 같아서 물어봤습니다. 제가 골퍼가 되면 캐디를 부탁드리죠. 제 골프클럽 들고 카트 운전하며 따라다니십시오. 주급은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뭐? 하하하. 자네 같은 재력가에게 골퍼라니 내가 실수했군.”

역지사지는 쉽지 않은 법이다.

자신이 캐디가 된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수안이 골퍼와 어울리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엔 요트 선상 파티에 초대하지. 소개해 줄 사람이 많아.”

“예. 장관님. 기대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워싱턴엔 언제 다시 올 텐가?”

“…한 10년쯤 후예요.”

괜히 조만간이라고 말했다간 당장 약속을 잡을 사람이다.

“이 사람아. 그땐 내가 재무부 장관 자리에서 내려왔을 거 아닌가.”

그걸 알기 때문에 10년이다.

“프랭크 빈치 부장관은 뭘 시켜서 얼굴도 안 보입니까?”

“그 사람은 바빠. 장관이 일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부장관이 바빠야지.”

“…….”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가리는 잘 논다.

“프랭크 빈치 부장관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다시 와야겠네요. 또 뵙겠습니다. 장관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