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에서 입으로 (115/304)

입에서 입으로

“여보. 나 왔어.”

“회사에 다녀왔어요?”

“아니. 보육원에 다녀왔어.”

“희망 보육원이요? 대외 활동이었네요?”

보통 정치권에서 보여 주기식으로 하는 대외 봉사 활동이 있다.

한겨울 추운 날에 연탄을 나르며 얼굴에 검댕 조금 묻히고 봉사활동 했다며 사진을 찍고, 독거 노인들을 만나 손을 잡아주며 사진을 남긴다.

시간 채우기 봉사활동을 하는 고등학생들도 그렇게는 안 한다.

“당신도 보여 주기 식 봉사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진심이라는 건 확실히 알죠.”

“당신만 알아주면 그걸로 됐어. 그리고 앞으로 보육원 가려면 같이 가자.”

“수녀님이 말해 줬어요?”

“응. 난 당신 다녀간 것도 몰랐다가 이제 알았잖아.”

“아이들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리고 당신 덕분에 아이들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어요.”

“그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8개나 딴 사람이 자신과 친하면 자존감이 안 올라가겠어요? 학교 가서 어깨가 으쓱할걸요?”

“아….”

보육원에서 자신을 만나도 티 내지 않았지만, 학교에선 참지 못했으리라.

수안과 함께 찍은 사진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이다. 매번 갈 때마다 사인을 해 줘도 항상 새로운 사인 요청이 있는데, 반 친구들에게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금메달 따길 잘했다.’

아이들의 행복에 보탬이 된 것만으로 금메달 값어치는 충분히 했다.

아현은 수안의 재킷을 받으며 말했다.

“얼른 씻고 쉬어요. 내일 바로 해외 출장 간다면서요. 출장 갈 짐은 정리해 놨어요.”

“그보다…. 이제야 정리됐어.”

“뭐 가요?”

“당신 고려 호텔 지분. 어머니에서 당신으로 명의 변경 끝났어.”

“네에?”

아현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수안이 따로 챙겨왔다.

금융 위기로 기업의 지분 가치 하락이 두드러졌고 한참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 지분을 일부는 인수하고 일부는 증여받았다. 세금 문제까지 모두 해결하고 아내에게 말하는 것이다.

아내 명의로 이전한 고려 호텔 지분은 총 32%. 충분히 소유했다고 봐도 좋을 지분율이다.

“부모님은 당신이 정원이를 낳고 바로 넘긴다고 하셨는데, 내가 조금 미루자고 했었거든.”

IMF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비싼 세금까지 물면서 지분을 인수할 필요 없었다. 지금이 고려 호텔 명의 변경에 적기였다.

강운 그룹 순환 출자 계열사들도 이번에 유상 증자와 전환 사채 발행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상 증자는 이번에 20조 원이 들어온 더블 스타와 18조 원이 들어온 펜타그램이 나눠서 참여하게 될 것이고, 전환 사채를 발행하는 일부 비상장 계열사는 수안이 직접 인수하기로 했다.

“당신이 맡겨 둔 증권 계좌 통장에 돈이 많이 붙어서 세금 내는 데 문제없었어. 앞으로 당신 호텔 잘 챙겨.”

“…그거 정말로 주신다고요?”

정원이를 낳고 얘기가 없기도 했고, 스스로 잊어버리고 있기도 했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회사 일로는 농담하지 않으셔. 이따 안방에 가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자.”

“전 고려 호텔 부담스러운데….”

“나중에 당신이 어머니 미술관도 챙겨야 할걸? 수진이나 수현이는 미술관에 관심도 없잖아.”

“…강운 미술관까지요?”

“당신 아니면 할 사람도 없어.”

수진이와 수현이는 회사를 경험하며 욕심을 많이 내려놨다.

강운 그룹에서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고, 요즘은 아버지의 허락으로 전환 사채를 받고 계열사에서 보유한 패션과 호텔 지분을 인수하고 있었다.

둘이 강운 미술관에 신경 쓸 시간은 없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머님이 자꾸 저를 미술관으로 데려가시더니, 다 이유가 있으셨네요.”

평소 아현을 데리고 쇼핑도 하지만, 강운 미술관에 데려가서 미술관에서 하는 일들을 알려 주고 유명한 예술가들을 소개해 주곤 했었다.

“어머니 후계자는 지금 당신밖에 없잖아. 수용이가 결혼해서 둘째 며느리가 생기지 않는 이상.”

“아! 도련님을 빨리 결혼시키면 되겠어요!”

“푸흐. 수용이는 아직 대학생이잖아. 무슨 결혼이야?”

“이르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24살에 결혼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도련님 나이가 올해 23살이고 올해는 6일밖에 안 남았네요.”

“아….”

6일만 지나 새해가 되면 수용이 나이가 24살이다. 재수했기에 마지막 4학년을 남겨두고 있었지만, 자신이 결혼하던 때와 같은 나이. 당장 결혼할 여자를 데려와도 이르다고 할 수 없었다.

‘군대는 안 가도 된다고 했고….’

일전에 있었던 교통사고를 핑계로 면제를 받아 버린 녀석이다. 물론 여기에 아버지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갔지만, 동생 녀석은 군대에 안 간다는 것 자체를 반기고 있었다.

‘진짜 결혼을 시켜? 아니지…. 첫째 수진이부터 짝을 찾아줘야 해.’

아버지가 동생들 관짝까지 짜줄 거냐며 타박했던 말은 또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셔츠를 벗으며 동생들에 관해 생각하는데, 아내가 작은 선물을 가져왔다.

“당신 크리스마스 선물은 제가 어머니랑 같이 골랐어요.”

“내 선물?”

“마침 미국으로 출장을 간다고 해서 정장에 어울릴 시계와 커프스 버튼으로 골랐어요. 당신은 한참 전에 사 둔 것 그대로 바꿔 가면서 쓰기만 해서 앞으로 어머니랑 제가 알아서 골라서 채우려고요.”

은색 계열의 시계와 커프스 버튼이 정장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 나도 선물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이걸 어쩌지? 난 따로 준비한 선물이…. 요기 있네?”

지난 크리스마스에 빈손으로 집에 들어왔다가 어찌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이번엔 바쁜 와중에도 미리 준비해 둬서 선물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포장된 선물을 뜯어 안의 내용물을 본 아현이 살짝 놀라 말했다.

“우아… 당신이 이런 것도 고를 줄 알았어요?”

“당신 목이 허전하더라고, 그래서 적당한 목걸이 하나 골랐어.”

수안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아현의 목에 걸어줬다.

아이를 낳았어도 여전히 미모를 유지하는 아현의 우아함과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는 목걸이다.

“당신이 쇼핑도 못 하고 여자 선물은 더 못 고른다고 어머니랑 흉봤는데, 취소해야겠네요?”

“…거짓말은 아니잖아.”

이번 선물도 배영성의 도움을 받아 고를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목걸이가 아니라 목도리나 사 왔을지 모른다.

수안과 아현은 아들 정원이를 데리러 안방으로 갔다.

안방에 가서 부모님께 고려 호텔에 지분 이전에 관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어머니 손에서 정원이를 넘겨받으려는데….

“오늘은 우리가 재울까 싶어.”

“어머님. 그러다 밤에 잠 설치셔요.”

아현의 말에 반박하는 건 아버지셨다.

“요즘 정원이 밤에 잘 자잖아. 괜찮다.”

“그야 그렇긴 한데….”

결국 부부는 아들을 조부모 손에 맡기고 빈손으로 방에 돌아왔다.

“맨날 같이 자다가 떨어지니까 되게 허전하네.”

“그러게요.”

수안은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신생아로 태어난 당시의 상황부터 기억하고 있기에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던 때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동생이 생겼더랬지.’

“오늘 밤이 길지도 몰라 여보.”

“아이참.”

통통.

아내가 가슴을 치는 손길이 간지럽다. 정원이가 칭얼거려서 근래 뜸하긴 했다.

조만간 정원이 동생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 * *

대현 그룹 비서실은 정영수 회장의 지시에 따라 수안의 행보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수안이 청와대로 향한 날에 영수 회담이 열렸다. 기사 어디에도 강운 그룹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국가 지도자급 인사와 만난 것이 분명했다.

‘…강수안 부회장이 정부에 가진 영향력은 확실히 대현보다 크다.’

대현은 초청받지 못했는데, 오로지 수안만 영수 회담에 초청받았으니 정치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서 한참이나 뒤로 밀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수안이 더블 스타 홀딩스와 펜타그램의 지분 거래로 거액의 달러를 들여왔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거액의 달러에 달린 꼬리표는 바로 BE 인베스트먼트였고, 이 정도라면 배후라고 해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규모의 회사였다.

“BE! BE 인베스트먼트가 강운 그룹의 숨겨진 힘이다.”

“…실장님. BE 인베스트먼트 오너를 추적하던 중에 홍콩 페이퍼 컴퍼니에서 익숙한 이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름이 뭔데?”

“Stephen Gang. 스테판이나 스티븐으로 불리는데, 스티븐 호킹 박사의 철자도 이와 같습….”

“강? 강씨라면 한국인인가?”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강수안 부회장이 미국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Stephen Gang입니다. Steven이 아니라 Stephen을 사용하는 것도 독특한 일이죠.”

“……!!!”

수안이 금용으로 살면서 받았던 세례명이 바로 스테파노였고, 이를 따서 스티븐(Stephen)이라는 영어 이름을 지은 것이다.

“BE 인베스트먼트는 강운 그룹과 협력관계 정도가 아니라 지배 관계일 가능성이 큽니다.”

“제, 젠장. BE 인베스트먼트에 관해서 더 알아 와!”

* * *

대현 자동차 비서실장은 비서실에서 취합한 BE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정보를 모아 정영수 회장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강수안 부회장의 배후를 찾다가 BE 인베스트먼트가 튀어나왔습니다.”

“BE?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 법인 아니었나?”

“미국 법인이 아니었습니다. 홍콩에 미국 BE와 일본 BE의 지분을 갖는 지주 회사가 따로 존재합니다.”

“…일본에도 BE가 있었지.”

“그리고…. 홍콩 지주 회사 소유주는 스티븐 강이라는 인물로 파악되었습니다.”

“스티븐 강? 한국계인가?”

“강수안 부회장이 미국에서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

“강운 그룹과 BE는 협력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그럼 BE 인베스트먼트가….”

“실질적으로 강운 그룹이 지배하는 회사라고 봐야 합니다. 미국 BE와 일본 BE. 이 거대한 투자 회사를 한국계 인물이 이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은 강운 그룹 임직원임이 분명합니다.”

Stephen Gang이 강수안과 동일인이라는 가정으로 출발해 미국과 일본 BE 사장들도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기반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미국 BE와 일본 BE. 두 회사는 월스트리트와 일본 금융계에서 손에 꼽는 투자 회사였음에도 한국계 사장이 이끌고 있었다. 특히 이방효 사장과 차진호 사장의 출입국 기록이 튀어나오고 여기엔 마치 누군가에게 보고하듯 정기적으로 한국으로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대현 비서실장은 BE가 강운 그룹 소유임을 확신했다.

“BE 인베스트먼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강운모 회장이 챙겨온 것 같습니다. 명의를 강수안 부회장으로 만들어 놨으니 명목상 소유주는 강 부회장입니다.”

BE의 역사가 있으니 강운모 회장의 입김이 있었을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강운모 회장의 선견지명으로 외부에 아들의 이름으로 회사를 세운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BE의 자산규모는?”

“자체 운용자금 최소 1천억 달러, 외부에서 유입된 펀드로 운용하는 자금까지 더하면 천문학적입니다. 금융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BE 인베스트먼트는 미국의 시가 총액 상위 주요 기업 지분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개발 중인 유전과 희토류 광산에 많은 투자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확인 결과 이번 동아시아 금융 대란에 한 다리 걸친 것으로 보입니다. 소로스 펀드가 선두에 나섰지만, 가장 큰 자금이 바로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제공되었습니다.”

‘기화를 무슨 돈으로 인수하느냐는 질문에 웃음이 나올 만했어….’

“…….”

정영수 회장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그냥 들이받았으면….’

강운 그룹은 감히 비벼 볼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대현은 국내에서나 힘을 쓰지, 해외는 어림도 없다. 이번 금융 위기로 국내 재계 서열 2위를 탈환했지만, 한참이나 높은 곳에 강운 그룹이 존재한다. 이젠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운 그룹이다.

“…정말 죽을 뻔했군.”

BE 인베스트먼트라면 씨티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당연했다.

* * *

같은 보고서가 자택에서 쉬고 있는 정택주 회장에게도 전해졌다.

“BE 인베스트먼트라….”

BE 인베스트먼트에 대한 정보를 읽어 내려가며 본인의 짐작보다 더 큰 규모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써 한참이나 밀려났음을 몰랐군.”

국내 대기업을 기준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과거 자신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한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며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왕 이리됐으니 차라리 도움을 줘야겠지.”

정택주 회장이 전화를 들었다.

* * *

“예. 아버지. 저도 확인했습니다.”

-기화 그룹 인수 지원은 네가 알아서 해.

“…예. 인수에 문제없도록 강운 그룹을 지원하겠습니다.”

정영수 회장도 강운 그룹 장자에 대한 거리낌을 완전히 지운 상황이다.

대출 연장을 절반이라도 허락해 준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대운 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 조사가 시행된다고 합니다. 검찰에서도 몇 가지 혐의점을 찾았다고 합니다. 김 회장의 출국 금지 조치도 시간문제입니다.”

-대운 자동차도 결국….

“정말 대운까지 무너지겠습니까?”

-그치는 시류를 읽지 못했어. 어쩌자고 물이 새는 배에 운명을 걸었는지….

대운에 대한 수안의 요구를 김일삼이 들어준 것이다.

“대운 자동차도 인수가 가능하겠군요.”

-기화 자동차와 비슷한 시기에 나오든지 그 이후에 나올 테지. 하지만 우리 대현엔 여력이 없다. 여력이 있다 한들 어쩌겠어?

강운 그룹 장자가 허락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규모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혼자서 둘 다 먹을 수는 없습니다.”

허락이야 받으면 될 것 아닌가.

-아주 기가 죽진 않은 모양이구나. 좋다. 어디 해 봐.

“예. 아버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