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는 사람
다음 날 수안은 흐뭇한 얼굴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옆자리에는 아내 아현이 함께하고 있었다.
“좋은 일 있었어요?”
“응. 있을 예정.”
금고에 그 약이 있을지 모르지만 있든 없든 확인은 가능했다. 끈덕지게 귀찮게 하던 물건을 이제야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결혼식이 끝나고 확인할 예정이다.
밤사이 최 실장이 금고를 잘 지키고 있었고 오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나도 같이 알면 안 돼요?”
“어허. 회사 일이야. 지금은 결혼식에 집중해. 우리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잖아.”
“느 우스믕스 므르능 그 앙보으으?”
웃으면서 말하는 거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었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복화술을 흉내 내고 있었다.
“푸흡. 언제 복화술까지 연습했어? 개인기로 예능에서 보여 주려고? 크흡.”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는 수안이다.
본인들 결혼식에선 잔뜩 긴장하고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고 결혼식을 즐길 수 있다.
“식 시작한다. 잡담 그만하고 우아한 자세 유지해.”
“예. 어머니.”
“네. 어머님.”
수안과 아현 옆에는 모친도 함께하고 있었고, 아버지도 물론 자리하고 있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웃어요?”
아버지도 며느리의 복화술을 들었는지 웃음을 참고 있었다.
“큼큼.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아버지는 시치미 뚝 떼고 결혼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현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수안은 신랑에 이어서 신부가 들어오자 탄성을 내뱉었다.
“아! 역시!”
아현은 참지 못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뭐가 역시예요?”
“당신이 최고로 예쁘다고. 역시 당신을 따라올 수 없다는 뜻이었어.”
“흐흣.”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아내에게 점수 따는 법을 알고 있는 수안이다.
그리고 화살은 아버지에게 향했다.
“…당신은 아들이 하는 말 듣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수안이가 당신 닮았잖아. 뭐가 더 필요해?”
“훗. 수안이가 날 닮긴 했죠.”
수안은 아버지만 볼 수 있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래된 유부남의 훌륭한 처세였다.
수안은 정지훈과 윤혜린의 결혼식을 기쁘게 축하해 주고, 고모님과 고모부님께도 함께 인사드렸다.
“수안 조카 잘사는 거 보니 우리 지훈이도 잘 살겠어.”
“하하. 그렇겠죠. 고모부.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래요. 잘해 주시면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안사람이 요즘 곧잘 며느리하고 쇼핑도 하더라.”
“이제 고모님도 마음을 여셨나 봐요?”
수안이 고모를 돌아보고 묻자, 곱게 한복을 입은 고모님이 딴 곳을 보면서 답하셨다.
“열긴 뭘 열었다고….”
밖에 같이 나가면 뭔가 우쭐해지는 기분이 있었다.
혜린은 아직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씩 마음을 열어가는 시댁 식구들이다.
“고모도 처음엔 며느리였잖아요. 같은 며느리 마음 누가 알아주겠어요.”
“너는 항상 애늙은이 같은 소리만 하니?”
“저야 맨날 이렇죠. 뭐. 하하하.”
수안은 고모 식구도 봤겠다, 더는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차량으로 향했다.
“당신은 먼저 들어가. 난 배 이사랑 갈 곳이 있어.”
“일찍 들어와요. 저녁밥은 집에서 같이 먹어요.”
“이제 겨우 점심 지났으니까. 저녁까진 들어갈 수 있겠어.”
보물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배 이사. 얼른 가자.”
“저도 궁금해 죽겠습니다.”
수안과 배영성이 탄 차량이 출발하고 경호원들이 탑승한 차량도 뒤이어 출발했다.
서초동 신영빌딩. 주변엔 대부분 학원가가 밀집되어 있었다.
어제 몇 번 봤다고 관리실 경비가 바짝 경례를 붙인다.
“수고하세요.”
“옙!”
운전기사는 차에, 경호원들은 사무실 밖에 두고 둘만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렁… 쿨….”
최장호 실장이 몽둥이를 품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배영성이 얼른 달려가 최장호를 깨웠다.
“최 실장! 일어나!”
“우앗! 누구야!”
휘잉!
몽둥이가 순식간에 배영성의 머리칼을 스쳤다.
허리를 숙이지 않았으면 제대로 맞을 뻔했다.
“야!! 누구 잡을 일 있어?”
“…배 이사님… 어휴. 부사장님도 오셨습니까.”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나 봐?”
“뭐… 그렇죠.”
지금까지 혼자서 금고를 지켰다. 잠깐 졸았던 것을 뭐라 하겠는가.
사실 어제 배영성과 맥주를 마시느라 늦게 잠들었지만, 배영성도 최장호도 밝힐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다른 곳으로 들고 갈 걸 그랬나 봐.”
“물건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그럴 수야 있나요.”
“함부로 이동했다가 걸리면. 생각만으로 끔찍하다 야.”
마약을 소지했다가 경찰에 걸리기라도 하면 일이 커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럼 우선 열어 보죠.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야 저 금고를 처리하죠.”
“오케이. 최 실장. 열어.”
“예. 기다려보십시오. 10분이면 됩니다.”
최장호는 배영성이 챙겨온 청진기와 꼬챙이를 가지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금고 다이얼을 돌리기 한참. 열쇠 구멍에 꼬챙이가 들락날락하길 또 한참.
최장호의 이마엔 땀방울이 줄줄 흘렀다.
철컥!
금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부턴 부사장님께 맡기겠습니다. 흐흐흐.”
“수고했어.”
수안은 목장갑을 착용하고 금고문을 살며시 열었다. 옆에서 배영성이 품에서 꺼낸 조명을 비춰 준다.
“……!!”
“…어라?”
여기가 자기 자리라는 듯이 골드바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헙! 진짜 보물입니까?”
먹다 남았을지 모를 약을 찾으려 했는데, 엉뚱하게 금전적 이득이 생기고 있다.
“부사장님 말씀대로 보물찾기 성공이네요. 집에 못 들어간 보람이 있습니다. 흐하하.”
“역시… 부사장님 운이 여기까지 힘을 씁니다. 제가 괜히 의심했어요.”
수안은 입구를 막고 있던 네 개의 금괴를 꺼내 의자에 가만히 내려놨다.
수안이 찾는 약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붉은색 옆면을 가진 장부 하나와 통장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수안은 통장의 은행명을 확인하며 뒤로 넘기다가 마지막 통장에서 멈췄다.
“허… 이거 뭐야?”
통장 안을 얼른 열어보니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찍혀 있었다.
“우아. 일, 십, 백, 천, 만. 400억입니까? 정말 400억이에요? 우아…. 이런 돈이 있었는데 학원은 왜 망했죠?”
옆에서 통장을 보던 배영성이 엄청난 금액이 들어 있는 통장에 놀랐지만, 통장의 금액은 400억이 아니다.
“…이거 일본 은행 계좌야. 엔화로 4백억, 한화로 대략 3천 2백억.”
“힉!”
“그리고 주수동은 죽었으니, 이 돈이 있든 없든 다시 학원을 일으키지 못했을 거야.”
“후우. 살 떨리네요. 무슨 돈이죠?”
“장부에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집에 가서 읽어 볼게.”
대현 정택주 회장이 스위스나 홍콩 아니면 제삼세계에 있을 거라 예상하던 비자금이 바로 일본 은행 계좌에 있었다. 장부에 대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은 수안이 확인하기 전이다.
계좌는 일본에서도 특수하게 사용하는 비밀 계좌가 틀림없었다. 일본의 차진호 지사장에게 들었던 은행 계좌와 모양이 비슷했다.
‘정치와 연결되어 있는 건 알았지만… 자금 세탁을 맡을 정도로 긴밀한 사람이었나?’
남아 있던 장부를 열어 대충 확인하니 지금까지 입출 금액과 명세가 기록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뇌물을 주고받으며 남긴 장부가 아니라 돈의 입출 간단히 기록한 장부였다.
장부엔 계좌의 입출뿐 아니라 비밀번호까지 모조리 기재되어 있었고, 돈의 주인이 기재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확인하기로 하고 다른 계좌를 확인했다.
‘꼼꼼하기도 하셔라….’
그냥 넘겼던 다른 국내 계좌도 다시 하나씩 열어 봤다. 국내 계좌도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일본 비밀 계좌보다는 못하지만 500억가량은 되는 돈이었다.
그리고 금고 바닥에서 갈색 대봉투가 하나 나왔다.
수안은 두툼한 봉투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려 안에든 서류 뭉치를 끄집어냈다.
수안의 손이 종이 뭉치를 넘기며 확인했다.
촤라라락.
“……!”
한눈에 이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장당 3억. 대략 50장이 넘어.’
150억 원에 달하는 무기명 채권이다.
“…이거 다 먹으면 체하겠는데?”
다른 계좌나 무기명 채권, 금괴는 먹어도 되고 주인이 누구라도 상관없다. 일본 계좌의 주인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상당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얼른 장부 뒷면을 열어 보자 장부 마지막에 이 계좌의 주인이 적혀 있었다.
‘대현… 이 계좌는 분명 탈이 난다.’
“후우… 어떻게 하죠?”
“우선….”
무기명 채권 한 장을 최장호의 손에 하나 넘겨주고, 나머지 하나를 배영성에게 건네줬다.
“보물찾기 성공한 보너스야.”
3억짜리 무기명 채권이 하나씩. 도합 6억의 보너스였다.
“우앗!”
“허!”
“김현성 사장 불러와. 빨리 처리해야겠다.”
“예!”
김현성은 호출을 받고 뛰어와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수안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비서실에서 파견된 직원도 함께였다.
김현성 사장이 불러들인 사람들은 집기를 부수고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서실 직원은 미리 얘기된 대로 금고가 있던 집무실에 들어가 금고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 * *
수안이 공사를 지시하고 며칠이 지났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검은 정장의 인물들이 좁은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누구십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기 있던 사람들 다 어디 갔어?”
대현의 직원들이다. 두 여자의 말을 조합해 주수동의 활동 반경을 파악하고 지금은 그 위치를 하나씩 파악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많이 늦은 상황. 이미 주수동의 사무실은 잡동사니를 치우는 중이라 상당히 지저분했다.
“누구시냐고! 여긴 왜 들어옵니까? 나가세요!”
“모두 나가. 지금부터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이다.”
“이봐. 당신이 뭔데 마음대로야? 여기 우리 회사 건물이야! 누구 마음대로 출입 금지야?”
더블 스타 직원은 따로 들은 바 없었다.
얼른 곁에 있는 다른 직원에게 지시했다.
“가서 사장님께 연락하고 관리실 직원들 불러! 거기 조폭입니까? 아니면 사채업자? 요즘 때가 어느 땐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겁박합니까?”
더블 스타 직원은 작업 인부들과 함께 단단히 사무실을 막아섰고,
대현 직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젠장.”
폭력적으로 나섰다가는 괜히 일을 키울지도 몰랐다.
조용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 * *
수안은 느긋하게 더블 엔터에 들렀다 퇴근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차량에 설치된 카폰으로 연락이 들어왔다.
-신영 빌딩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직원들과 대치 중입니다. 조폭이나 사채업자 정도로 추측됩니다. 공사 중에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경찰을 부를까요?
“기다려봐. 내가 갈게.”
수안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누구지? 주수동의 거처를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나? 계좌의 주인 중 하나가 시켰을까?’
그만한 돈이면 충분히 추적이 붙을 수도 있었다.
“…신영 빌딩으로 차 돌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수안의 차량은 금방 신영 빌딩에 도착했다.
“가서 김현성 사장부터 안전하게 지켜!”
차에서 내린 수안의 경호원들이 먼저 달려 나갔다.
수안도 뒤따라 들어갔다.
좁은 사무실이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 치워 버려! 이것들은 또 뭐야? 왜 자꾸 늘어?”
수안은 등을 보이고 소리치는 남자를 밀치며 말했다.
“…이봐. 길 좀 비키지?”
“넌 또 뭔데? 어, 어?!”
수안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직원들을 얼른 뒤로 물렸다.
“내 건물에서 뭐 하는 짓이야? 경찰 불러서 일 키워야겠어?”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수안의 등장 그리고 경찰 얘기까지 나오자 더 이상 자신들로는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평범한 건물 주인이 아니라 강운 그룹이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기다리면? 식구들 더 불러오게? 검사 몇에 경찰까지 불러서 서로 쪽수 맞춰 줄까?”
“아닙니다. 강수안 님. 금방 설명 가능합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남자는 품에서 벽돌 같은 휴대 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빌딩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강운 그룹 강수안 님이 나타났습니다. 예.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수안에게 전화를 두 손으로 건네줬다.
수안은 당당하게 전화 받았다.
“나 강수안입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운모는 잘 있더냐?
“……!!!”
수안을 알면서도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