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마와 루이스
수안의 차가 다시 주수동의 학원 건물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더블 스타 직원이 바짝 인사했고, 배영성은 창문을 열어 얼굴을 보인 다음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배영성이 굳이 따라오려는 건물 관리직원을 만류하고 셋은 주수동이 사용하던 학원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제 보물찾기를 시작하자.”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쳇. 벌써 동심을 잃었어… 노땅들 같으니.”
“쉬고 계십시오. 저희가 찾겠습니다.”
“내 운이 얼마나 좋은데? 내가 돌아다녀야 찾을 수 있을걸? 나 강수안이야.”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모른다. 죽었다가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은 엄청난 운이었고, 게다가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서자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하나밖에 없는 여자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이보다 대단한 운을 가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
“…….”
“나 못 믿어?”
수안은 배영성과 최장호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꼭 놀란 표정으로 바꿔 주고 싶었다.
.
.
.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먼지투성이 사무실을 아무리 찾아도 쓸모없는 학원 교재와 아이들이 시험 본 종이만 나왔다.
각자 맡은 곳을 열심히 찾느라 옷에는 금방 뽀얗게 먼지가 쌓였다.
작지 않은 사무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다 빼가고 남은 물품이 별로 없었다. 서류들도 오래된 것들뿐이었다. 남기고 간 가구를 빼서 확인하고 책상 서랍을 뒤집어 털며 구석구석 살폈지만 먼지와 잡동사니 외에는 없었다.
“오! 100원 찾았다!”
서랍 구석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나왔다.
“…….”
배영성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수안은 시계를 보는 척하다가 진짜 놀라서 말했다.
“앗! 벌써 저녁 시간이야! 한 끼 못 챙기면 그 한 끼는 영원히 못 먹는 거야! 쉬었다 하자. 중국집에서 저녁 먹고 올까?”
결국 저녁까지 근처에서 해결해야 했다. 수색은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본래 수안은 노력한 만큼 얻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보상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땀 흘린 만큼 받는 보상에 길들었는데, 여기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어 기운이 쭉 빠졌다.
“나 이제 더는 못하겠다.”
털썩.
수안은 덜렁거리는 중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읎네. 읎어.”
수안이 앉은 자리 뒤로 주수동의 웃는 얼굴이 박힌 커다란 사진이 꼭 이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배영성은 사진이 크게 거슬렸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우선이었다.
“아무 데나 보관하진 않았을 텐데요….”
최장호는 아무리 사무실 안을 찾아도 중요한 물건을 보관할 만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혹시 여기 없을 수도 있잖아?”
“그것도 맞는 말씀이죠. 처음부터 약이 아예 없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비밀 금고 같은 데 들어 있을 줄 알았더니… 금고도 안 보이냐.”
“푸흐. 부사장님. 보통 그런 건 여기 쓸데없어 보이는 액자 뒤에다 숨기잖아요.”
배영성은 최장호가 말을 꺼내자마자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얼굴 보고 싶지 않았는데… 최 실장. 그거 떼 버려!”
저 사진이 무척 거슬리던 참이다.
“옙!”
최장호가 들고 있던 나무 쪼가리로 수안 뒤에 있던 액자를 툭 쳤지만,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쭈. 이제 이따위 것까지 말썽이야?”
장호가 마음먹고 액자를 발로 세게 차자 박혀있던 피스와 함께 뽑힌 액자가 옆으로 날아가며 떨어졌다.
굉음은 당연히 뒤따랐다.
퉁! 째쟁!
“으앗!. 죄송합니다.”
배영성과 수안은 함부로 액자를 깨트린 최장호를 나무라지 않았다.
수안과 배영성은 깨진 액자가 아니라 그 뒤를 보고 있었다.
“…저게 저기 있었네요.”
금속제 문이 달린 비밀 금고가 액자 뒤에 숨어 있었다.
“여길 쓰던 사람들이 저걸 왜 몰랐지?”
“이곳 사무실이 좀 깊은 곳에 있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하고 높은 사람이 사용하던 집무실인 것 같습니다.”
배영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기가 바로 주수동이 사용하던 사무실이다.
한 사람 외에 아무도 이곳에 비밀금고 있는 걸 모른다면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싶다.
“…그렇다고 이걸 몰라? 이렇게 떡하니 있는데?”
“저희도 우연히 찾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액자 좀 보십시오.”
수안은 배영성의 손가락을 따라 액자에 시선을 줬다.
배영성이 왜 액자를 보라고 했는지 수안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 단단하게도 붙여 놨었네.”
바닥에 부서진 액자는 한 곳에만 고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네 귀퉁이 전부가 나사로 박혀 있던 흔적이 있었다. 회사가 망하며 급하게 나가면서 챙겨가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발로 세게 차지 않았다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을 액자였고, 나중에 내부 인테리어를 다시 하는 시점에나 밝혀질 금고였다.
수안은 다른 이가 찾기 전에 미리 발견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호 힘이 장사라 떨어진 거네.”
“도움이 되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흐흐흐.”
“최 실장. 저 금고 부수지 않고 열 수 있겠어?”
장호는 금고를 슬쩍 살피고 말했다.
“시간 좀 걸리겠는데요?”
“무슨 상관이야? 이제 우리 회사 건물인데. 시간 넉넉해.”
“그래도 지금은 장비가 없어서 무리입니다. 몇 가지 장비를 가져와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필요한 장비 말해.”
“제가 가서 가져오면 됩니다. 회사에 있으니 내일 아침에 들러서….”
그냥 두고 나갔다가 내일 오자는 말이었지만, 수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럼 여긴 누가 지켜?”
장호는 배영성을 돌아봤지만, 수안과 배영성이 장호를 보고 있었다.
“…지켜요?”
“누가 와서 저 안에 있을지 모를 약을 먹으면? 혹시 여길 아는 사람이 나중에 찾아오려고 마음먹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 지켜야지.”
이미 전적이 화려한 약이다. 한번 맛을 보면 위아래 양옆으로 쭉쭉 퍼져 나간다.
“…제가 해야겠네요. 빌딩 경비원에게 시킬 수도 없으니….”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내일 결혼식 다녀와서 같이 보자.”
“그럼. 내일까지 지키라고요?”
“이런 중요한 일을 누구한테 맡기겠어? 최 실장 아니면 내가 누굴 믿어?”
“저만 믿으세요. 제가 바로 최장홉니다!”
“최 실장. 부탁한다. 가자. 배 이사.”
배영성도 엄지손가락을 들어 응원하며 수안과 함께 나갔다.
그렇게 최장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먹을 거라도 주고 가셔야지.”
고요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최장호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사박.
“…누, 누구야!”
“에헤이. 우리 최 실장 겁이 많네?”
웃는 얼굴의 배영성이 그늘에서 나왔다.
“형님!”
“내가 우리 장호 남겨 놓고 혼자 어떻게 가? 도련님 먼저 집에 보내고 왔다.”
수안도 최장호가 안타까운 참이라 배영성에게 금일봉을 건네줬다.
배영성의 품에 있는 봉투는 곧 최장호의 품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역시! 우리 형님이 최고요. 뭐 사 오셨어?”
장호는 배영성 손에 들린 비닐봉지부터 보였다.
“짜잔. 맥주나 한잔하자.”
“크흐. 좋지요.”
둘은 가끔 이렇게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요즘 힘들지?”
“…애 키우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소.”
“나도 그랬지. 그래도 신기하게 100일 넘으니까 밤에 잘 자더라.”
“그래요? 우리 애도 이제 곧 100일인데….”
예전엔 직장 생활이 주요 주제였다면, 요즘은 비슷한 시기에 낳은 아이가 주제였다.
“산후 우울증을 조심하라고 하더라고….”
“오오….”
* * *
“죄송합니다. 회장님.”
“…….”
밤이 지나도록 심문이 진행되었지만, 두 여성에게서 빼낼 정보는 많지 않았다.
둘이 내뱉은 말들은 전부 쓸모없는 정보들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배달원의 입이 무거웠던 모양입니다.”
“저도 죽을지 모른다 생각했으면 함부로 말하지 못했겠지.”
“박 실장.”
“예. 회장님.”
“주수동이 확실하긴 한 거야? 이미 딴 놈 통해서 해외로 나가지 않았겠어?”
“……!!”
“이번 일에 관련된 놈들 출입국 기록 확인해 봐. 홍콩, 스위스… 유럽 쪽까지.”
“예! 회장님!”
“우리가 찾아야 하는 돈이 정확히 얼마지?”
“3천 5백억입니다. 세탁과정에서 약간의 손실이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작 그 돈을 구하려고 이렇게 고생이라니….”
“국내 은행 대출이 다 막혔습니다. 지금 대현 그룹에서 대출이 가능한 은행은 김일삼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씨티 은행밖에 없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이라고 불린 노인의 이름은 대현의 왕 회장 정택주.
지금도 대한민국 재벌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대현 그룹의 수장이다.
정택주는 현 김일삼 대통령, 김대준 대선 후보와 함께 14대 대선에 야심 차게 출마했었다.
대선에서 정택주는 김일삼을 강도 높게 비방하고, 서울과 경남, 경북에서 김일삼의 표까지 나눠 먹었다. 자칫하면 야당 김대준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김일삼 입장에서 정택주는 원수와 다르지 않았다.
지난번 삼풍 백화점 붕괴와 더불어 긴급하게 실시한 건축물 안전 점검도 정택주 자신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지금은 전직 두 대통령과 함께 비자금 사건으로 모진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대한민국 재벌의 산 역사나 다름없는 대현에게 작은 고난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올해 발생했다. 대통령 김일삼의 지시로 현재 대현은 모든 시중 은행의 대출이 막혀 있었다. 국내 은행은 모두 대현에게 등을 돌렸고, 남은 은행은 외국계 은행 하나밖에 없었다. 단 한 푼의 자금이라도 아쉬울 때였다. 자칫 잘못하면 이번 대출 위기가 대현이라는 거대한 배를 뒤집을 수도 있었다.
“내 돈 찾는 게 이리 어려울 줄이야.”
“그래도 주수동이 이동했던 흔적과 의심 가는 장소는 찾았습니다. 주수동의 과거 이동 라인을 따라 추적과 탐색을 진행한 다음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내연녀 둘은 밤이 지나도록 이어진 심문을 통해 주수동과 어디서 만났는지, 주수동이 평소 어디로 향하고 어디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지 등을 말했다. 둘은 자신들이 아는 대부분 정보를 전달했고, 대현 직원들은 빈도수와 거리를 따져 가며 주수동의 활동 범위를 체크해 중요한 물건을 숨길만 한 장소를 몇 군데 고를 수 있었다.
* * *
아침이 되어 두 여성은 폐공장에서 벗어나 처음 납치되었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둘이 똑같이 눈은 퀭하게 들어가고 입술은 푸석하게 말라 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수고 많았고.”
“…아니… 에요.”
“크흑. 캑캑….”
목소리는 다 쉬어서 쇳소리가 나온다.
“억하심정이 남지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이죠. 친절히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도록 살겠습니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질문과 비슷한 대답이 밤이 지나도록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둘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에 의심 어린 시선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뭔가 알게 되거든… 이리로 연락해. 만약 너희가 주수동이 가진 물건을 숨긴 것이 밝혀지면 이번처럼 곱게 돌아가진 못한다.”
둘은 건네주는 명함을 받지 않을 수도 없다.
“…네. 찾으면 바로 연락할게요.”
대현 비서실 직원들이 차에 타고 사라지는 동안 둘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저 꼴도 보기 싫은 집에 들어가야 하나.’
둘은 집을 올려보다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갈 곳 있어?”
“없지….”
돌아가자면 갈 곳이 없을까마는 마약에 손대고 구치소까지 다녀온 몸이다.
지금은 가족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럼 들어와….”
“…아무리 그래도… 나 괜찮아?”
“뭐 어때? 그 새끼도 이미 뒈지고 없는데. 우리가 그딴 새끼 때문에 싸워야 하겠어? 그 새끼로 인한 고생은 지금까지 충분히 했잖아?”
“…너 좀 멋있다.”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였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않았고, 경찰에 쫓기는 상황도 아니지만,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부담 가면 청소라도 하든가. 혹시 아냐? 집에서 그 새끼가 남긴 금붙이라도 나올지?”
“오오~ 나오면 반반이다.”
“너 다 가져.”
“오! 진짜? 내가 청소는 잘하지.”
이미 집을 한번 뒤집어 본 내연녀 1번은 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연녀 2번을 집에 들이는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 남은 재산인 집을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함이다. 다른 내연녀가 나타나 자신의 상속분에 흠집이 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상대의 사정을 헤아려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집에 들인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돌아가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