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수안을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 강운모 회장의 안부를 편안하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기업들의 창업주가 바로 그들이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총수는 한 명밖에 없었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도 수안의 귀에 익었다.
그리고 수안은 마지막 계좌 400억 엔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대현의 정택주 회장이다.
“괜히 놀랐잖아요!! 왕 할아버지!”
“……!!”
수안의 답에 옆에서 듣던 대현 직원들이 더 놀랐다.
할아버지 강병호 회장을 따라 재벌 총수 모임에 따라갔다가 처음 얼굴을 익혔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종종 만나온 대현의 왕 회장 정택주. 대한민국 재벌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재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택주 회장이 수안을 귀여워해서 곧잘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했었다.
-흐허허. 고 어린 것이 쑥쑥 커서 이렇게 나랑 전화도 다 하는구나. 얼마 전 결혼까지 했다지? 내가 못 가 봐서 어쩌누.
“할아버지 요즘 바쁘시잖아요. 제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그야… 약간 바쁘긴 했지. 그나저나 넌 어쩐 일로 거기에 갔어?
“제가 몇 년 전부터 땅하고 건물 사 모으는 재미로 살거든요.”
-그 빌딩을 네가 샀어?
“할아버지가 관심 있는 건물인 줄 알았으면 제가 샀겠어요? 이 건물 다시 내드려요?”
-아냐. 아냐. 건물은 너 가져라.
“그보다 할아버지. 여기 할아버지 직원들인가 봐요?”
수안이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바짝 얼어 버린 대현 직원들이다.
대현의 왕 회장님도 격 없이 부를 정도로 친분을 가진 수안 때문이다.
-네 말대로 이 할아비가 밖에 나가기 좀 힘들어. 그래서 직원들을 대신 보냈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을게요. 직원들이 말도 못 하고 끙끙대는 거 보니 이유가 있겠죠.”
-역시 수안이가 영특해.
“딱 보면 아는 거죠. 할아버지.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오냐. 조만간 한번 보자.
수안은 무거운 휴대 전화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역시나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전화를 받는 직원이다.
“김 사장. 여기 문제없습니다. 우리 직원들 다 빼요.”
“예. 알겠습니다.”
김현성은 뒤에 남겨놨던 직원들을 챙겨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자리한 대현 직원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수안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큰 문제는 없게 할 거죠? 건물에 흠 생기는 정도는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도련님.”
“믿고 갑니다.”
아직 다 치우지 못해 먼지투성이인 사무실에 남은 것은 대현 직원들뿐이다.
* * *
수안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 김현성 사장에게 물었다.
“정리 수준은?”
“사무실에서 흔적을 지운지 한참입니다.”
“금고는 어떻게 했어?”
“아! 폐기물 모아 둔 쓰레기장에 있을 겁니다.”
내용물만 치웠지, 금고 자체는 어쩌지 못하고 버려 뒀다.
“저놈들이 그걸 못 찾을 리가 없는데.”
“제가 가서 얼른 치우겠습니다.”
수안은 김현성 사장에게 괜히 나서지 말고 지켜볼 것을 지시했다.
“아냐. 괜히 의심만 받아. 그리고 어차피 돌려줄 생각이기도 했고….”
“그걸… 돌려주신다고요?”
김현성 사장도 일련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배영성, 최장호와 마찬가지로 무기명 채권 한 장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국내 계좌 500억, 금괴와 무기명 채권은 물론이고 일본 계좌 400억 엔까지 알고 있었다. 김현성 사장도 일본 계좌 400억 엔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긁을 복권을 미리 산다고 생각해.”
“말씀하지 않으신 다른 계획이 있으십니까?”
“다가올 금융 위기… 그리고 완성차 시장.”
“대현 자동차?”
“대현 말고, 우리나라에 자동차 회사 많잖아.”
“맞습니다. 어느 회사를 인수하려 해도 대현의 도움은 필수적이죠.”
“역시 김 사장은 단번에 알아듣네.”
수안이 가고 김현성 사장은 대현의 직원들이 쓰레기장에서 찾아 꺼내는 금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결국 찾았어.’
곧 사무실에서 누군가 달려 나오고 금고는 차에 실려 이동했다.
그렇게 김현성은 대현의 직원들 몇몇이 금고를 차에 실어 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 * *
금고를 정택주 회장 앞으로 가져간 비서실장은 이미 열어 둔 금고문을 찰칵하고 열었다.
“꺼내 봐.”
“예.”
안에는 주수동이 운영하던 학원의 사업자 등록증 원본과 서류가 일부가 들어 있었고, 찾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강제로 열린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댔을 거로 생각하지 못한 박 실장이다.
“해외에 있을 거야…. 홍콩이나 스위스.”
“주변인들 출입국 명세를 살펴봤지만… 특이 사항이 없었습니다.”
쾅!
노구의 몸에도 여전히 힘이 넘치는 정택주 회장이다.
“어떻게든 찾아야지!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해외 건설 수주를 받고 일을 진행하며 마련한 피 같은 비자금이다. 지난 대선에서 사용하고 남은 부분인데, 이를 회수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 돈이 있어야 대현의 경색된 유동성을 살릴 수 있었다.
“예. 회장님. 다시 면밀히 검토하겠습니다.”
“나가 봐.”
* * *
수안은 집 안 서재에서 무기명 채권과 장부, 국내 통장과 일본 은행 통장을 앞에 두고 고심했다. 이 중에서 가장 금액이 큰 일본 계좌가 문제다.
‘…이게 나한테 필요가 있나?’
주수동이 숨겼을지 모를 약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대현의 돈이라면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4백억 엔이라는 돈이 크긴 하지만, 돈으로서 끝이라면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국내 계좌의 세탁된 자금도 500억, 무기명 채권도 150억이다. 국내에서 비자금으로 사용할 자금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해외에서 사용할 돈은 이미 BE로 충분한 상황. 400억 엔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다.
‘…대현. 대현….’
강운 그룹이 차지한 재계 1순위는 불완전했다. 김일삼의 압박으로 대출 길이 막힌 대현 그룹은 앞으로 험난한 2년을 보내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되어 돌아온다. 바로 IMF 금융 위기 때문이다. 국내 대출이 거의 없는 대현은 김일삼 덕분에 위기에서 한발 멀어져 있었고, 이는 재계 1순위 탈환으로 이어진다.
‘그마저도 왕 회장님이 쓰러지면 끝나겠지….’
수안은 김현성 사장에게 미리 말했듯 통장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향후에 일을 부드럽게 해결하자. 그거면 충분해.’
미래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수안이다.
* * *
다음 날 수안은 다시 신영 빌딩을 찾았다.
어제 하다만 작업으로 인해 사무실은 난장판이었다.
“다시 보물찾기 시작입니까?”
장호는 무기명 채권을 받은 흥분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최 실장. 양심 어디다 놓고 왔어? 한 장 받았으면 됐잖아.”
무려 3억이다. 타박을 들어도 할 말은 없었다.
“…농담도 못 합니까.”
수안은 배영성이 장호를 타박하는 소리를 들으며 좁은 사무실을 둘러봤다.
수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금고 자리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쓰레기장에 있던 금고를 챙겨갔다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대현이다.
그리고 수안은 둘에게 밑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했다.
“2차 보물찾기 시작하자. 이번엔 지하에 있어.”
“…네?”
둘은 다시 보물찾기를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장부를 자세히 읽어 보니까 또 있더라.”
집에서 살펴본 장부엔 또 다른 자산 명세가 기입되어 있었다. 이번엔 부피가 있는 물건이었다.
수안과 일행은 지하 주차장을 지나 기계실로 향했다. 기계실엔 보일러 설비와 건물 하수도 라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수안이 향하는 곳은 관리실이고, 최종 목적지는 관리실 더 깊이 들어 있는 작은 창고였다.
“관리직원들 내보내. 아예 퇴근시켜.”
“예. 부사장님.”
배영성이 직원들을 내보냈고, 수안은 최장호에게 지시했다.
“빠루 가져와 봐.”
일전에 사무실을 철거하며 사용하던 공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안은 캐비닛이 있던 자리를 완전히 밀어 버리고 아래를 살폈다.
“잘도 숨겨놨네.”
수안은 최장호에게 받아 든 빠루를 잡아 아래로 힘차게 내리찍었다.
쾅. 푹.
“시멘트 바닥에 빠루가 꽂혀요? 힘 진짜 좋으신데요?”
시멘트 바닥이 아니다. 격자무늬 바닥 아래로 다른 공간이 있었다.
수안은 꼽힌 빠루를 지렛대로 써서 그대로 눌렀다.
뿌드득. 뿌득. 퉁.
힘을 견디지 못한 비밀 문이 경첩과 함께 그대로 튕겨 나왔다.
비밀 공간에서 누런빛이 흘러나왔다.
“……!!!!”
“……!!!!”
“보물찾기 1등 강수안.”
사무실 금고에 네 개만 있던 10킬로 단위 금괴가 바닥 두 번째 금고에는 가득히 들어 있었다.
족히 50개는 되어 보인다. 요즘 금 시세가 1온스에 320달러. 10킬로 금괴면 개당 11만 달러다. 50개면 560만 달러였다. 나중엔 온스당 2천 달러에 육박하지만, 지금은 소소한 재미 수준이다. 말 그대로 보물찾기였다.
“미친….”
“우아….”
“보지만 말고 하나씩 차로 옮겨. 요즘 돈복 터졌다.”
“크흐흐. 이거 왜 이런답니까. 흐하하하.”
“역시 우리 운과 부사장님 운은 차원이 다르네요. 하하하.”
수안은 펜타그램 집무실에 금괴를 옮겨 놓으라고 지시했다.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고 회사로 가져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욕심은 이걸로 끝내자.’
일본 계좌는 그만한 대가를 받기로 하고 돌려주면 된다.
수안은 차에 타서 전화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대현 비서실입니다.
“나 강운 강수안입니다. 왕 회장님과 통화 가능합니까?”
이제 정택주 회장을 만날 차례였다.
* * *
수안은 며칠 뒤 약속된 한정식당을 찾았다.
“…요정이네.”
“맞습니다. 식당이라고 하긴 뭐 하네요.”
배영성의 평가나 수안의 평가나 같았다.
고풍스러운 한옥에 높은 벽이 내부를 감추고 일본식으로 꾸며진 정원은 예전 권력자들이 만나 밀담을 나눴다는 요정으로 보였다. 예전엔 정부 주요 현안이 모두 이런 요정에서 결정되었다고 들었다.
수안은 홀로 안으로 들어가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안에 계십니다.”
드르륵.
열린 문 사이로 정택주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노령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다.
“할아버지.”
“허허허. 이놈아. 뭘 그렇게 급하게 보자고 해?”
“제가 맛있는 걸 얻어먹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앉아. 내가 제대로 내오라고 했으니 먹을 만할 게다.”
수안의 식성엔 한정식이 잘 맞는다. 정택주 회장과 대수롭지 않은 요즘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함께하고 식후 차도 한 잔 나눠 마시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지난번에 하시던 일은 잘되셨어요?”
잘 안 됐을 게 뻔했지만, 다음 얘기를 위해 말을 꺼낸 참이다.
“잘되긴… 헛수고였다.”
“저런, 제가 뭔지 알아도 될까요?”
“아냐. 너까지 알 필요 없어. 괜히 이런 일에 발 담글 필요 없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랬죠. 지난번에 빌딩 다시 가 보니까 아주 난장판이더라고요.”
“우리 애들이 치우지도 않고 갔어? 이놈들이. 거기에 가서 어지르고 그냥 왔다고?”
“괜찮아요. 덕분에 재미있는 물건을 찾았어요.”
수안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물건?”
정택주 회장의 관심도 오롯이 수안에게 모였다.
“…무슨 물건이 그렇게 재미있어?”
“저는 발 담그지 말라면서요. 입 꾹 다물고 있어도 되죠?”
“노친네 숨넘어가는 꼴 보려고 그래?”
“히히. 할아버지. 제가 뭘 찾았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수안은 먼저 봉투를 꺼냈다.
“짜잔! 대현에서 금고를 가져갔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건물 전체를 다 뒤져봤더니 지하실 바닥에 작은 금고가 또 있더라고요.”
“뭣이!!”
탁.
정택주 회장의 손이 번개처럼 봉투를 낚아채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무기명 채권?’
수안은 정 회장이 단 1장의 무기명 채권에 눈이 팔린 사이 천천히 재킷에 손을 넣고 통장으로 보이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진짜는 이거죠. 이 물건에 비하면 채권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허!”
“누가 숨겼는지는 몰라도 사람이 참 꼼꼼해요.”
“이, 이리 다오.”
수안은 정 회장이 휘젓는 손을 얄밉게 피하며 통장을 다시 품으로 가져갔다.
“두 번 속으면 바보죠. 그리고… 맨입으로요?”
“…….”
허망하게 빈 손을 들고 있는 정택주 회장이다.
“오늘 음식 대접으로 퉁 치시는 건 아니죠? 괜히 없어 보이게 그런 말씀 하시진 말고요.”
“…끄응.”
주도권은 수안이 갖고 있었다.
“제가 슬쩍 봤는데… 엄청나던데요?”
“후우….”
“경찰서에 유실물로 넘겨줘도 20%는 받지 않을까요? 검찰로 가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어요.”
“…….”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것이 있어야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을 끄시겠죠?”
“…끄응.”
말을 아끼는 정택주 회장을 보며 수안도 말을 줄였다.
아쉬운 쪽에서 먼저 시작해야 했다.
“…….”
수안이 말을 멈추자 정택주 회장의 입이 열렸다.
“…병호 손주가 언제 이렇게 컸누.”
“에이. 우리 할아버지 얘기하시면 반칙이죠.”
수안은 얼른 통장을 내려놓고 정택주 회장 앞으로 쭉 밀었다.
“……!!”
수안이 이렇게 쉽게 내놓을 줄 몰랐던 정 회장이다.
“뭐 하세요? 얼른 열어 보세요.”
이랬건 저랬건 지금은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이 중요했다.
통장 겉면에 보이는 은행명을 보고 탄식부터 내질렀다.
“아!”
‘내가 일본을 간과했구나!’
그리고 안을 열어 금액을 확인하고 긴장을 툭 내려놨다.
‘400억 엔. 됐다. 됐어… 이제 한시름 놨다.’
기존 예상했던 금액과 얼추 비슷했다. 일부 손실이 있었다 해도 이거라면 수안의 말대로 발등의 불을 끌 수 있었다.
“요즘 대현에 자금줄이 꽉 막혔는데, 일이 쉽게 풀리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겠어요? 그렇죠? 하하하.”
“…바라는 것이 있더냐? 요즘 빌딩 모은다고 했지? 원하는 곳을 짚어 봐. 내가 몇 개 내주마. 그리고 이 무기명 채권도 다시 가져가.”
통장을 인질로 정 회장에게 뜯어내려 했으면 이런 푸근한 대응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거래를 하려 해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 한다.
거대한 대현 그룹을 일궈낸 창업주 정택주 회장과 거래하려면 인질이 아니라 작은 방심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안에겐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빌딩은 내 돈으로 사야 제맛이죠. 그래도 요건 아까운 참이었는데, 감사히 받을게요. 3억은 이제 제 거죠? 하하하.”
고작 빌딩 몇 개나 무기명 채권 1장을 얻자고 4백억 엔이나 되는 돈을 내놓지 않았다.
“그럼 바라는 게 뭐야? 얼른 말해 봐.”
“우리가 남이에요? 할아버지 저 섭섭해요.”
“크흐. 그래. 병호 손자가 남은 아니지! 네가 날 할아비라 부르고 나도 널 손자처럼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하하하.”
수안은 어색하게 정택주 회장의 비위를 맞추다 더 어색하게 뿔을 드러냈다.
“제가 바라는 건 별거 아니고요. 나중에 제가 원할 때 크게 양보 한 번만 해 주세요.”
“양보?”
“제가 나중에 완성차 시장에도 진출해 보려고 하거든요.”
완성차 시장에 진출하려면 대현 자동차의 용인이 필요했다.
“…강운 자동차가 벌써 출범하지 않았느냐. 내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강운 그룹에서 시작한 강운 자동차는 아버지 거고요. 전 제 자동차 사업을 말씀드렸어요.”
“……!!”
“대현 자동차와 강운 자동차가 게임이나 되겠어요? 전 제 사업을 하고 싶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네가 자동차를 하겠다고? 고작 컴퓨터와 삐삐 만드는 계열사나 몇 개 인수한 더블 스타에서?”
정택주 회장은 수안의 회사 더블 스타 홀딩스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작은 회사지만 나중에도 작은 회사로 남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누구든 시작이 있는 법이고요.”
“허허… 꿈도 야무지구나.”
지금은 수안의 꿈이 어림없어 보이는 정택주 회장이다. 완성차 산업은 아무나 달려들어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위로는 국가 기관인 건설교통부를 상대하고, 아래로는 가장 강성하다는 자동차 노조를 구슬려야 했다. 거기다 자동차 산업은 국가의 산업발전을 선도하는 기간 산업이자 전략 산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철강, 기계, 전기, 전자, 화학, 섬유를 포함해 광범위한 관련 공업 제품을 결합하는 자동차 산업은 아무나 시작할 수 없는 분야였다.
“우리 할아버지 피가 어디 가요?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또 제게로. 이렇게 이어지는 거죠.”
“푸흡. 그렇지! 병호도 그렇고 운모도 그렇고 너까지 마찬가지로구나. 하하하. 좋다 좋아. 응당 물려받아야지.”
“문서는 따로 남기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약속만 해 주시면 그걸로 족해요. 할아버지가 한 입으로 두말할 분도 아니잖아요.”
“써 달라면 못 써 줄 것 같으냐? 그나저나 어찌 자동차를 시작하려고? 아예 맨땅에 시작할 셈이야?”
“인수해야죠. 기화 자동차나 쌍륭 자동차도 있고 대운 자동차도 있네요? 이야. 이 작은 나라에 어느 나라는 하나도 없는 자동차 회사가 몇 개나 있잖아요? 인수할 회사 많죠?”
여기가 바로 방심의 시작점이다.
수안에겐 앞으로 일어날 사실이지만, 정택주 회장에겐 방심을 끌어낼 허황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어색하게 스스로를 꾸민 이유도 이 방심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뭐, 뭐라고? 푸흐흐…. 아하하하.”
더블 스타와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말에 정 회장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그 회사들을 인수할 기회가 올 때… 할아버지는 분명히 제게 양보하셔야 해요. 약속해 주세요.”
정택주 회장의 약속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거짓으로 약속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지키지 않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약속이라는 말이 나왔으면 하늘이 무너져도 지킬 사람이다. 물론 예외는 있겠으나, 그만큼 신뢰를 중히 여기는 대현의 창업주 정택주 회장을 믿고 있었다.
“하하하. 물론이지. 물론이고말고. 얼마든지 양보하마.”
정택주 회장은 수안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식당 종업원에게 종이를 가져오도록 하고 거기에 자필로 각서를 작성했다. 지금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나 정택주는 훗날 기화 자동차, 쌍륭 자동차, 대운 자동차를 인수할 기회가 있을 시 강수안과 그가 소유한 회사에 이를 양보하고 전심전력으로 인수를 돕는다. 대현 그룹 회장 정택주.
정 회장은 멋들어지게 사인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하하. 이거 가져가라, 수안아.”
“이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직접 써 주셨으니 감사히 잘 보관하겠습니다.”
구두 약속과 마찬가지로 지키지 않아도 될 각서였지만, 정 회장에게 약속을 상기시킬 중요한 서류였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무조건 지키마.”
“그럼 안 지키시려고요? 꼭 지켜 주셔야 해요.”
평소 정택주 회장이 약속을 어찌 여기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염려는 크지 않았다.
“푸흐하하. 오늘 내가 네놈 덕분에 몇 년 치 웃을 것을 다 몰아 웃었다. 하하하하.”
“할아버지가 기분 좋으시다니 저도 좋네요. 하하하.”
“오늘 먹은 보리굴비는 내가 특별하게 포장하라고 했다. 집에 가서 운모도 맛을 보여 줘야지.”
“아버지께 왕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았다고 자랑할게요.”
“오냐. 오냐. 하하하하.”
수안이 정택주 회장과의 식사를 마치고 배영성에게 오늘 성과를 자랑하려는 찰나 수안의 뒤로 누군가 뛰어왔다.
“도련님….”
“…할아버지가 뭐 잊은 거라도 있으시대요?”
수안은 품 안의 각서를 도로 찾아가려나 싶어 걱정이었다.
“회장님 명함입니다. 나중에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직통 번호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건네준 것은 정택주 회장의 금테 두른 명함이다.
“어? 할아버지는 명함 안 쓰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정 회장은 자신의 얼굴이 곧 명함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기 위한 명함은 필요 없다고 말해 온 정택주 회장이다.
“중요한 분들께만 드리는 특별한 명함입니다. 잘 보관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선물 들고 오느라 수고했다고….”
수안이 받은 하얀 봉투에는 십만 원권 자기앞 수표가 가득했다.
예전 정 회장이 천종산삼을 먹을 때 아내에게 산삼을 씻어온 값이라고 수표를 꺼내줬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중요한 물건을 심부름한 사람에겐 그 값을 꼭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택주 회장이다.
‘통장을 들고 온 값이라… 진짜는 이미 받았으니, 용돈으로 생각하지 뭐.’
“용돈 잘 받았다고 회장님께 전해 주세요.”
“…예. 도련님.”
* * *
“박 실장. 이거 가져가서 다 찾아와.”
차에 타자마자 통장을 넘기는 정 회장이다.
박 실장은 강운 그룹 아들인 수안을 통해 자금을 일부 융통했다고만 생각했다.
“예.”
계좌에 얼마나 들었나 싶어 들춰봤더니, 엄청난 금액의 잔고가 눈에 들어왔다.
“억! 회, 회장님.”
“큭. 수안이 녀석이 주수동이 갖고 있던 계좌를 가져왔어. 기특한 녀석.”
“하. 하하….”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이렇게 저절로 복이 굴러들어올 줄은 몰랐다.
“먼저 간 병호가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손주 녀석 사업 머리는 영 아닌 모양이야. 운동이나 계속할 것이지… 다 말아먹겠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넘겼다는 말씀입니까?”
박태수 실장은 400억 엔이 들어 있는 계좌를 그냥 줄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크흠… 어린애 손에 들린 사탕 뺏은 기분이 이런 건가 싶으이.”
“허!”
“녀석이 뭐라는 줄 알아? 이걸 줄 테니, 나중에 강운이 아니라 자기 회사로 기화, 쌍륭, 대운을 먹을 때 나보고 양보하라고… 나 참. 맹랑한 녀석.”
“네에? 하. 하하하하.”
젊은 나이 꿈이라 치부하기에도 너무 높은 목표였다.
“나도 녀석 덕분에 한참 웃었어.”
“큼. 강 회장 근심이 크겠습니다.”
“녀석이 여태 잘해 왔는데….”
“지금은 대현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안타까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명함이랑 용돈 따로 보내고 털어 버렸다. 이제 가자.”
“예. 회장님.”
작다고 생각했던 약속은 훗날 큰 거래로 돌아올 예정이다.
* * *
수안은 펜타그램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안심하고 배영성과 대화할 수 있었다.
“거액의 계좌를 이 종이 쪼가리와 바꾸셨다고요? 이게 아까 자랑한다고 하셨던 결과물이라고요?”
“어차피 내 돈도 아니었잖아. 나중에 할 기름칠을 미리 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정 회장이 이 약속을 다 지킬까요?”
각서의 내용은 잠깐만 봐도 다 읽을 수 있었다.
기화 자동차, 쌍륭 자동차, 대운 자동차… 정택주 회장은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도 BE의 자금이면 인수가 불가능하지 않았다. 물론 지분을 쥐고 있는 오너의 매각 의사가 필요하지만, 인수가 가능하다는 점이 핵심이다. 재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수안의 재력은 이미 국내에서 따를 자가 없다.
“물론!”
수안은 확신에 차서 답했다.
“아니지!”
“네에?”
“다 지킬 거라고는 나도 안 믿어.”
“그럼요?”
“대현 자동차는 첫 번째 인수 기회가 왔을 때 날 만나야 할 거야. 그리고 정택주 회장은 약속된 양보를 거절하고 오히려 내게 양보해 달라고 부탁하겠지. 거의 확실해.”
국내 완성차 업계의 절대자가 될 기회를 대현이 쉽게 놓칠 리 없었다.
“…그럼 계좌는 그냥 날린 거잖아요.”
배영성은 기업 양보가 담긴 종이 쪼가리가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나중에 양보로 차지하지 못한다면 400억 엔은 허공에 날아간 것과 같았다.
“자동차 회사는 하나가 아니잖아. 기화 자동차는 대현이 가져가라고 하고 나는 나머지를 노릴 생각이야.”
수안의 진짜 노림수는 기화 자동차가 아니다. 단 두 곳 쌍륭과 대운이다.
여기에 강운 자동차까지 챙길 필요 없었다. 쳐 내야 할 가지는 쳐 내야 더 맛있는 열매가 맺히는 법이다. 강운 자동차는 알아서 자생해야 했다.
“잠깐… 기화 자동차, 쌍륭 자동차, 대운 자동차 전부가 매물로 나와요? 정말이요?”
“일전에 한국에 닥칠 금융 위기 상황에 관해서 설명했잖아. 위기가 그냥 위기겠어?”
아버지 강 회장에게 IMF 환란을 경고하고 배영성에게도 이에 관해서 설명한 바 있었다.
물론 자세한 내용까지 전부 설명하진 않았지만, 앞뒤 상황 정도는 파악할 정도였다.
“그 큰 회사들이… 매각될 정도라니….”
“어쨌든 내가 없는 말 하진 않잖아. 배 이사가 안 믿으면 누가 날 믿누?”
“정 회장 흉내 내지 마시고요. 어쨌든! 약속을 어기고 다시 양보를 해 주면, 그다음은 무조건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래야 모양이 예쁘지 않아?”
상대는 대국 장소에 앉지도 않았는데, 수안은 얌체처럼 몇 수를 먼저 두었다. 여기에 대국의 전체적인 흐름과 위기 상황, 대처 방법까지 모두 머리에 담고 있으니 정택주 회장은 첫수를 놓기도 전에 지고 들어가는 판이었다.
“아주 모양 좋게 빠진 외통수잖아.”
“…나중에 협상하는 자리에 저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정 회장 난감한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래?”
“부사장님께 용돈이나 던져 주면서 얼마나 우습게 봤겠습니까.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 저도 봐야겠습니다.”
수안은 손에 들린 하얀 봉투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수안은 배영성의 충성심도 날로 심각해져 간다 생각하며, 기분을 가라앉힐 말을 던져 줬다.
“살날이 오래 남지 않은 양반이야. 너무 미워하지 마.”
“……!!”
“길어야 6년… 이래서 참 씁쓸해.”
스스로 120년을 살겠다고 큰소리치던 정택주 회장의 말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이 지나고 2001년 3월 재계의 거목이 쓰러진다.
“…후우. 제가 괜한 소리를 한 모양입니다.”
‘어차피 왕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마음대로 갈라 먹고 찢어 먹을 대현 그룹.’
수안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거기다 대현이 원래 먹었을 기화 자동차를 빼앗으려는 것도 아니고, 대현 그룹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 대운과 쌍륭을 먹겠다는 계획이다.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정택주 회장에게 수안보다 대현이 중요하듯 수안에겐 대현보다 강운이 중요했다.
‘완성차 산업을 먹으면 그 뒤에….’
그 뒤의 계획까지 연이어 떠올랐지만, 지금은 너무 먼 얘기였다.
수안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는데, 배영성의 말이 수안의 신경을 다시 끌어들였다.
“…대현이 숨겨 둔 비자금도 이 정도였는데, 다른 총수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
미안하지만 수안이 아는 것은 없었다. 훗날에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재벌가의 자산이다. 삼디 그룹의 경우에도 차명계좌만 4조 원이 밝혀지지만 검찰이나 국세청에서 이걸 회수하지도 않는다. 이번 일은 어쩌다가 발생한 우연한 사고였을 뿐이다.
“거기까진 노릴 수도 없어.”
“있긴 있겠죠?”
“없겠어? 있긴 하겠지만, 이미 감춰진 자금이야. 언젠가는 튀어나오겠지만 쉽게 발견할 수도 없고, 흔적도 거의 남기지 않았을 거야. 국가 기관에서 달라붙어도 힘들어. 하물며 같은 재벌가에서 그걸 건드려? 이번에도 괜히 가져다준 것이 아냐. 먹으면 분명히 탈이 났을 물건이라 돌려준 거야.”
“예. 제가 괜한 얘기를 꺼낸 모양입니다.”
수안은 더 이상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까지 없었는데, 일이 틀어져 생긴 결과였다. 이에 대한 미래의 나비효과가 어떤 식으로 반영될지도 심히 걱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주수동의 내연녀 두 사람에게 뭐라도 보상해 줘야겠어.”
“아… 예.”
조동팔과 일당은 본래부터 범죄 조직에 연루되어 있어 마음이 쓰이지 않았지만, 주수동에게 준 마약 때문에 둘은 생각지도 않았던 마약을 복용하고 범죄자가 되었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고 있을 거야. 어디 취직이라도 시켜 주고 월급이나 쥐여 줘. 돈을 줘 봤자 엉뚱한 짓이나 할 거야.”
“적절한 보상이 되겠습니다.”
수안은 이것으로 마음의 짐을 털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