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64)화 (64/90)

#64화.

“뭐, 일단은요.”

체이스가 생긋 웃었다. 멍청하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야 알아듣는다.

체이스가 제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가사 공작님, 앞으로도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여러 가지 의미로.”

체이스가 아가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내렸다. 명백한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아가사가 찻잔을 움켜쥐었다.

‘찻잔으로 저 새끼 뚝배기를 깨 버릴 파티원 구함.’

아무래도 이런 내용의 구인 광고를 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다음 주에도 뵙겠습니다, 공작님.”

체이스가 생긋 웃고는 자리를 떠났다.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엠마가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아. 한동안은 참을 수 있어. 어차피 곧 저렇게 까불지 못하게 될 테니까.”

* * *

체이스가 다녀간 이후로 내내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정말 머릿속에서 체이스는 몇 번이나 내 손에 뚝배기가 깨졌다.

‘역시 싸대기는 김치 싸대긴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밤비와 푸우를 만나러 갔다. 하루에 한 번. 반드시 들러서 두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밤비는 확연하게 좋아졌다.

밤비와 푸우를 돌봐 줄 전용 사육사도 구했다. 영양 상태가 좋아지니 푸석하던 밤비의 털에도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밤비가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밤비. 그동안 잘 지냈구나.”

밤비가 내 주변을 맴돌았다. 사슴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밤비를 보면서 알았지 뭐람.

밤비는 푸우의 옆을 한시도 떠나질 않고 있었다.

“기특한 녀석. 힘들지는 않고?”

밤비가 내 손바닥을 날름날름 핥았다. 밤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행히 이곳에 와서 밤비는 꽤 행복해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푸우만 태어난다면 좀 더 행복해지겠지.

밤비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왔다. 나엘 황태자.

나엘과 내 자리는 정원에 마련되었다. 히샤는 내게 인사를 건네고는 저택을 쏘다니며 놀고 있었다.

메리와 또리, 히샤가 다시 삼총사가 된 것이다. 조용하게 한참 동안 밤비를 보던 나엘이 말했다.

“괜찮아졌군.”

“다행히도요.”

“아가사, 오늘 온 건 이번 일을 처리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야.”

나엘이 내게 서류를 건넸다. 전에 약속한 대로 일의 진척을 알리기 위해서 온 것이다.

“내일 오후에 기사가 하나 발표될 거야. 거기 기사도 넣어 놨어.”

나엘은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착취당한 신수들에 대해 작성된 신문 기사는 최대한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엘리스 신의 종복이라고 불리는 신수. 그들에 대한 핍박이 옳은 걸까?’

나엘이 내 표정을 살피곤 물었다.

“마음에 들어?”

“적당히 자극적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그래. 그다음에 있는 건 고소 내용이야. 죄인들뿐만 아니라 돈을 받아먹은 귀족들 중 일부의 작위를 몰수할 예정이지.”

더 이상 귀족이 아니게 되는 건가.

“이 많은 인원에게 전부 죄를 물어 작위를 몰수할 수는 없어. 그 대신 벌금을 받을 생각이야.”

나엘은 본디 아가사에게만 박하지 공명정대하고 똑똑한 인물이었다. 자기 신념도 확고하고.

나라에 대한 이상향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나엘의 결정은 옳았다. 300명을 다 내쫓았다가는 지들끼리 똘똘 뭉쳐서 들고 일어나겠지.

대신 일부는 벌금으로 끝내고, 또 그 벌금의 액수에 차등을 두고, 또 누군가는 작위를 몰수당한다면 그들은 오히려 흩어질 것이다.

“……좋은 것 같아요.”

나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피곤함이 깊게 누적된 얼굴이었다. 사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데이먼 백작 가에서 판 신수들을 추적하고 있어. 그들을 찾으면 연락할게.”

“네, 빨리 찾아야 할 텐데요.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서둘러 볼게.”

오늘 왜 이렇게 착하게 구냐.

애가 독기가 다 빠졌네. 그만큼 피곤한 건가?

“큼. 젬이를 한 번 만나 보실래요?”

이건 내가 나엘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젬이라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젬이를 불렀어?”

우리의 귀여운 관종이 나타났다.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톡 하고 튀어나온 거다.

“젬!”

루시아가 그 뒤에서 젬을 쫓아왔다.

“루시아!”

젬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엘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젬, 이 사람이 젬이를 보고 싶다고 해서 불렀어.”

“젬이를?”

젬이의 통통한 볼을 쿡 찔렀다. 그 하얀 속눈썹에 감싸인 루비 같은 눈동자가 호의를 가지고 반짝였다.

“응. 젬이의 멋진 이야기를 들었나 봐.”

내 말에 젬이가 활짝 웃었다. 하늘로 뽀르르 날아올랐다가 도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가장 멋진 자세로 섰다. 한 다리를 찻잔 받침 위에 올리고 그 위에 팔을 얹었다.

입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풀잎을 물고 있었다.

“젬이 이야기를 들어 보겠어?”

나엘이 홀린 얼굴로 젬을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엘은 이미 젬의 포로였다.

아, 진짜. 지구 뿌셔, 우주 뿌셔!

요새 젬은 슈타디온의 비타민, 활력소나 다름없었다. 저 귀여움으로 모두를 홀리고 다니니까.

“루시아, 여기 앉아.”

“어, 하지만…….”

루시아가 나엘의 눈치를 보았다. 어허. 나중에 연인이 될 사이끼리 이렇게 내외를 해서야.

“나엘, 루시아가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괜찮아.”

나엘은 여기에 관심도 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처음 봤을 땐 정말 충격적이었거든.

“아가사. 저 생명체는 대체 뭐지?”

하하하. 뭐겠어. 우리 집 재롱둥이?

* * *

다음 날.

나엘이 이야기했던 대로 신문 기사가 발표되었다.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차지한 기사의 제목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할 만했다.

‘신수들의 억울한 죽음. 신의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가.’

차를 마시며 신문 기사를 느리게 읽었다. 참 맛깔나게 잘 썼네. 이 정도면 사람들에게 신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틈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문은 하루 만에 제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직접 시가지를 오가며 확인했다.

“공작님! 사람들이 이번 일에 공분하고 있어요. 신의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더라구요!”

“공작님. 제 친구가 그러던데요. 이게 정말로 있었던 일이냐고요. 아무리 그래도 신수들을……. 불쌍해서 눈물이 찔끔 났대요.”

“지금 광장에 촛불 시위가 번지고 있어요. 억울하게 희생된 신수들을 위한 애도라나. 그리고 황성에 강력하게 항의할 거래요!”

잠들어 있었던 제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신분제가 존재한다고는 해도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두고 있는 세계관이다.

시민 자유 의식이 어느 정도 팽배해 있다는 거다. 제국민들은 저들마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작님! 제도에 거주하는 제국민 대표가 황성에 죄인들을 지탄하는 서류를 제출했대요!”

됐다. 나엘이 일은 참 잘해.

아마도 기사를 계속해서 회자되게 하고 바람잡이 하는 이들을 투입했을 것이다.

기사가 나가고 고작 일주일 만에 원하던 결과를 얻어 냈다.

밤비, 푸우. 기다려. 우리의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 *

이 소식을 접한 황제의 분노가 천장을 뚫었다.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감히 신의 짐승들에게 손을 대? 황실은 그런 것을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거늘!”

귀족들은 그간 신수들을 방관해 왔던 것을 잊은 듯하다며 한마디씩 얹고 싶었으나, 황제의 분노 앞에서 그들은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현 황제는 기분파였고 매우 즉흥적이고 다혈질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영웅 심리에 도취되어 있는 황제를 건드려 화를 사고 싶은 이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영명하신 황제 폐하를 농락하는 행위입니다!”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귀족들의 청원이 줄을 이었다. 나엘이 그것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너무 생각대로 움직이니까 재미가 없네.

“나엘 황태자!”

“네, 아버님.”

“너는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죄송합니다, 폐하.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 모든 일을 바로잡고 폐하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큼!!”

황제가 수염을 쓸었다.

나엘은 이러나저러나 그의 입맛에 잘 맞는 아들이었다.

시킨 일은 꼬박꼬박 잘하고. 듣기 좋은 말도 잘해 준다. 게다가 능력도 있으니 이런 일도 척척 해결해 주곤 했다.

그래서 황제는 이번에도 나엘에게 떠넘길 생각이었다.

“좋다, 나엘. 그러면 이번 일을 잘 해결해서 가지고 오도록! 그리고 자네들은 말이야. 나엘을 제대로 보필하도록 해! 에잉, 내가 끼어들지 않으면 항상 엉망이야!”

황제가 무릎을 탁 하고 내리쳤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귀족 재판이 소환되었다. 황제의 분노에 힘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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