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왠지 모르게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낑…….”
메리가 불안한지 맴돌다가 내 치마를 잡아당겼다. 메리가 하는 짓을 보다가 또리도 내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나 괜찮아! 진짜야, 얘들아.”
메리는 옛날부터 내 감정에 예민한 편이었다.
“끼이잉……. 깡!”
메리가 두 앞발로 내 다리를 팡팡 쳤다. 무릎을 내어 주자 폴짝 뛰어올랐다. 또리도 메리의 눈치를 보다가 내 무릎 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으이구, 이 귀여운 녀석들.
얘들 때문에 우울한 생각도 못 한다. 메리와 또리가 엉킨 채로 내 무릎 위에 둥지를 틀었다.
강아지들이 전해 주는 온기에 내 마음도 슬금슬금 녹아내렸다. 내 손바닥에 걸쳐진 메리의 두꺼운 앞발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일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과를 초래했다.
제기랄, 이래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랬는데.
* * *
요새 아가사는 나엘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가만히 일을 하고 있다가도, 검을 수련하다가도 어쩔 수 없이 아가사가 떠오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엘을 두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기사, 냉엄의 기사라고들 말하는데, 정말로 그럴까?
나엘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후.”
차갑게 나엘을 잘라 내던 아가사의 눈동자에 들어 있던 건 무심이었다.
[왜 그렇게 고민하지?]
열심히 고구마말랭이를 뜯고 있던 히샤가 귀를 팔랑거렸다.
사료를 사 오던 날 함께 가져온 간식이었다.
[궁금하면 찾아가면 되잖아. 가는 김에… 큼. 나도 데려가면 좋고.]
히샤가 앞발을 앙증맞게 나엘의 발 위에 얹었다.
나엘이 히샤를 힐끔 보았다.
“속 편한 소리를 하는군.”
나엘은 그간 아가사를 마뜩잖아 했었다. 나엘에게 있어서 아가사는 슈타디온의 재산과 작위, 명예를 가져올 황금 거위였다.
정치적인 융합.
딱 거기까지였다. 어렸을 때는 물렁한 마음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니 잘 지내 보자는 생각 정도. 그런데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던 건지 아가사의 집착은 정도 없이 깊어져 갔다.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분명 다른 여자가 들어가는 걸 봤다고 했는데! 어디 있어? 어디에 숨겨 둔 거야?’라며 패악을 떨질 않나.
청승맞게 만날 약속도 하지 않고 와서는 나엘을 기다리고 있다거나.
사교 모임에서 나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귀족 영애들 머리채를 잡질 않나.
그 덕에 나엘의 곁에는 ‘여자’ 사람이 남아나질 않게 되었다.
슈타디온의 딸이 아니었다면, 제 아비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아가사는 진즉에 사교계에서 퇴출되었으리라.
아가사가 떠밀어서 계단을 구르고 다리를 접질린 영애도 있었다.
가장 압권이었을 때는 외교 사신을 맞이했을 때였다. 당시에 사신단 대표로 선출되어 온 이가 슈리아 백작이었는데, 그녀를 질투한 아가사가 훼방을 놓은 것이다.
덕분에 중요한 외교 회담은 물거품이 되었고 관중이 있는 곳에서 오물 벼락을 뒤집어쓴 슈리아 백작은 악담을 하고 돌아갔었다.
“하아.”
과거를 떠올리니 이런 고민을 하는 스스로가 믿기질 않는다.
그런데, 요새 들어 아가사가 너무 조용하니 불안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려오는 소식도 없었다.
그 불안함은 호기심이 되었고, 사라진 히샤가 아가사의 저택에 있다고 들었을 때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간 저택에서 완전히 달라진 아가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부모의 죽음이 아가사를 어른으로 만든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연민도 들었다.
[인간들은 너무 복잡해.]
고구마말랭이를 다 먹어 치운 히샤가 나엘의 발밑을 빙글 돌았다. 나엘의 발 위에 똬리를 틀고 앉은 히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히샤가 눈을 깜빡였다. 한껏 귀여운 척 고개를 꺾었다.
[간식 하나만 더 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나.]
나엘이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머릿속도 복잡한데 히샤는 눈치가 없었다.
나엘이 히샤에게 고구마말랭이를 하나 더 던져 주었다. 차라리 눈앞에 안 보이는 게 낫지.
그런 나엘에게 타개책을 제시한 건 보좌관이었다.
“그, 황태자 전하.”
보좌관이 목을 가다듬었다.
“내일이 세일라 대부인의 기일입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서 아가사 공작을 에스코트 해야 할 것 같은데… 내키지 않으신다면…….”
말을 하면서도 주저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엘이 어떤 불벼락을 내릴지 긴장한 듯했다.
사실 지금 아가사는 황후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여성이었다. 어릴 적 친분도 있었고 여러 이해관계를 따져 보았을 때, 나엘이 가장 적임자였다.
“해야지.”
나엘이 빠르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자연스럽게 아가사를 만나러 갈 핑계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아가사가 정말로 변한 게 맞는 건가.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엘은 아가사의 요즘이 궁금했다.
“내일 아침에 아가사를 에스코트하러 가겠다. 내일 일정은 비워.”
보좌관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열중해서 말랭이를 씹고 있던 히샤가 나엘을 힐끗 보았다.
‘흥. 보러 갈 거면서 빼기는.’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인연인데.
* * *
그리고 세일라의 기일을 준비하고 있는 이는 한 명 더 있었다.
다름 아닌 체이스 데이먼이 그 주인공이었다.
사실 아가사와 황태자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 사이에 오갔던 구두 약혼은 유명무실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황태자와 아가사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기로 했단다.
가뜩이나 양친을 잃고 구두 약혼자까지 잃은 셈이니 아가사가 얼마나 상심이 크겠는가.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약해진 마음을 파고들기에 아주 적기였다.
“제가 내일 공작 가로 찾아가겠습니다.”
체이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큼, 체이스.”
데이먼 백작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무리 공작이 멍청하다고는 해도 너는 아직 유부남 아니냐.”
데이먼 백작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로살린이 황후 자리에 있는 지금 너무 경거망동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로살린이 사일러스 황자를 위해서라도 자중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던 것이다.
게다가 데이먼 백작은 멜리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차남인데.
“그 자리에는 아무래도 멜리슨이…….”
“아버지, 그랬다가는 멜리슨이 모든 일을 말아먹을 겁니다. 공작의 눈에 멜리슨이 차겠습니까?”
“그 계집이 뭘 안다고. 그래 봐야 이제 갓 20살 넘은 여자애 아니냐. 멜리슨이 그런 여자 하나 못 구워삶을까.”
“그러니 그 자리에 제가 가장 적임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멜리슨보다는 제가 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어린 공작 하나 못 구워삶겠습니까.”
망설이는 백작에게 체이스가 덧붙였다.
“지금 결혼 무효 소송을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아버지. 제가 듣기로는 재판관이 제 손을 들어 줄 확률이 높다더군요.”
체이스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슈타디온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것이 황태자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진정으로 사일러스 황자 전하를 위하는 길이겠습니까?”
데이먼 백작이 흔들렸다.
슈타디온에 가면 바닥에 금화가 굴러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 노다지를 빼앗긴다면?
배가 아프겠지.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새 황제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계속해서 ‘빼앗긴 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던가.
여러 봉건 왕국이 한 데 모여 ‘브륄스 제국’을 건국할 당시에 뜻이 맞지 않았던 북부의 봉건 영주 일부가 빠져나갔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는데, 그게 바로 테일럼, 율란, 피어스 왕국이었다.
빼앗긴 땅이라는 건 그 세 왕국을 이르는 거였다. 역대 황제들도 북부의 세 왕국을 복속시키려는 노력을 했었지만 실패했었다.
현 황제는 그 오욕을 씻고 치세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리고 총사령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게 나엘 황태자였다.
황태자의 전쟁에 슈타디온이 군자금을 댄다면?
“……끙.”
데이먼 백작이 이마를 꾹 눌렀다.
“그건 아니 될 말이긴 하지. 사일러스 황자 전하를 위해서도 옳지 않아.”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아버지. 제가 언제 실망시켜 드린 적 있었습니까?”
데이먼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멜리슨 놈보단 네가 훨씬 낫지. 그런데 정말로 결혼이 무효로 판결나겠느냐?”
“예, 아버지! 재판관이 사실 제 친구의 아버지의 친구분의 삼촌분이시더군요.”
“옳지! 역시 인맥이 중한 법이지!”
체이스가 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아가사를 손아귀에 쥔 것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