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원한다면 그러겠죠.”
“여기 이 돌 위에서 식빵을 굽고? 요?”
이브라임이 거대하고 편평한 돌을 손가락질했다. 이번에 조경을 꾸미면서 새로 들여온 돌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게 따끈하게 생겼다.
“그러겠죠? 낮잠을 잘 수도 있고……. 주변에 풀벌레도 많으니 냥냥 펀치 연습을 할 수도 있겠네요.”
뭔가 젤리한테 관심이 아주 많은 것 같은데. 저 넋 나간 표정 좀 봐.
“냥…… 냥 펀치?”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은 그런 것도 봅니까?”
이브라임의 말이 빨라졌다. 무언가 대단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럼요? 젤리가 아침부터 깨워 주기도 하고 가끔은 안마도 해 주는데요. 핑크색 앞발로 이렇게, 팡팡!”
두 손을 모으고 파닥파닥거려 보았다.
“모닝 알람에 안마……? 팡팡?”
이브라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날카롭게 치켜올라 간 눈꼬리가 이유를 알 수 없게 아래로 축 처졌다.
왜 저러는 거야?
“그, 그러면 젤리가 배도 보여 줍니까?”
“당연하죠. 젤리는 애교가 정말 많은 아이인걸요. 친해지면 그 모든 걸 해 준답니다. 아침에 젤리가 제일 바쁜걸요. 나도 깨우고 여기 엠마도 깨우고 자길 돌봐 주는 사육사도 깨우고. 그리고 자기가 기분 내키면 사람들 안마도 해 주고. 아, 요새는 새로운 개인기도 생겼어요.”
“새로운…… 개인기?”
“보여 드릴까요?”
이브라임이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 같던 표정은 지우고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젤리는 사육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젤리! 쥬르 먹을까?”
내 말을 들은 젤리가 하던 걸 멈추고 날래게 뛰어왔다.
“냐앙!”
쥬르 내놓으라는 거겠지.
두 다리로 서서 짧은 앞다리를 휘저었다.
“냐아앙!”
“잠깐만, 젤리.”
“냐아!”
젤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쭈그리고 앉았다.
“젤리, 하이 파이브!”
내가 메리에게 가르친 건데 이게 고양이도 될 줄 몰랐거든. 젤리가 핑크색 발바닥으로 내 손바닥을 쳤다.
“잘했어!”
젤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엄지와 검지로 브이를 그려 보았다.
“젤리, 브이!”
“냐앙!”
귀찮지만 놀아 준다는 표정으로 젤 리가 내 손가락에 제 턱을 얹었다.
“아주 잘했어! 자, 쥬르 먹어!”
“냐앙!”
젤리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먹어 치우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젤리의 요새 개인기 2종 세트다. 배부르게 간식을 챙긴 젤리는 놀던 곳으로 달려가 버렸다. 이브라임이 그 뒤를 아련한 시선으로 좇았다.
“…….”
이브라임이 뭔가 패배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람.
“큼. 이 정도는…… 기본이죠.”
약간 팔불출 학부모가 된 기분으로 말했다.
댁네 고양이는 이런 거 못 하시나 봐요? 이런 느낌을 가득 담아서. 어깨가 하늘 위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나머지 공사 잘 부탁드려요.”
이브라임은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느라고 나한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네. 원래 성격이 저랬나?
* * *
“친해지면 다 해 준다고. 친해지면. 팡팡도 해 주고, 브이도 해 주고, 하이 파이브도 해 준다는 거잖아.”
“이브라임님……?”
“결국 친해지면 된다는 거잖아. 친해지기 위해서는 자주 봐야 하고.”
“저기요, 이브라임님?”
수습 마법사가 불안한 얼굴로 이브라임을 불렀다. 그 까칠한 인상이 전부 무너져 있었다. 사실 이브라임이 고양이에게 유독 약하다는 건 수습 마법사인 그도 알고 있었다.
마탑 주변에 고양이가 넘쳐나는 건 그들이 마력에 끌리는 족속들이어서가 아니다. 마탑의 상징이 고양이기에 그런 것도 아니다.
이브라임이 제 월급을 전부 털어서 고양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고양이들이 꼬이고 있는 거였다.
열심히 뛰어놀고 있는 황금색 치즈 냥이를 보는 이브라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사실 젤리는 다른 고양이들과는 다르게 이브라임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성안의 사람들을 졸졸 쫓아다니는 재미에 옴팡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젤리를 쫓아다니는 건 이브라임이었다. 공사는 뒷전에 두고 젤리 덕질이나 하고 있으니 속이 타는 건 수습 마법사의 몫이었다.
“이브라임 님……?”
“아무래도 오늘 다 공사를 끝내진 못할 것 같군.”
왜 항상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 건지.
“내일도 슈타디온엘 와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분명 오늘 안에 다 끝내실 수 있을 텐데……?”
수습 마법사의 눈앞에는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내가 안 된다면 안 된다는 거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수습 마법사가 눈물을 삼켰다. 그간 지랄 맞은 이브라임 밑에서 견뎌 온 숱한 세월이 떠올랐다. 어차피 지 뜻대로 할 건데.
“예,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수습 마법사가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 * *
평화가 도래했다.
평화파괴자는 더 이상 저택을 방문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히샤도. 대체 누군지 모를 유괴범이 그만둔 모양이다.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었고.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진다.
후후후후.
차가 꿀맛이네.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공작님.”
“당연하지, 엠마. 요새는 황태자 전하가 안 나타나고 있잖아. 우리에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거야!”
“안 그래도 좀 있으면 사료를 보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암, 얼른 보내. 안 보내 줬다가 다시 나타나면 어떡해?”
엠마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공작님이 황태자 전하를 다시 보면 마음이 바뀌실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에?”
“공작님께서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신 지 오래되기도 하셨고……. 사실 이제는 기댈 곳도 없으시잖아요.”
엠마가 심란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천천히 고민하는 것 같았다.
“공작 가 사용인들이 걱정이 참 많았어요.”
“어떤 면에서?”
“양친을 잃으셨으니까요.”
아……. 엠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엠마의 말대로 아가사는 양친을 잃고 마차 사고까지 당한 상황이었다.
내게 기억이 있었다면, 그니까 내가 원작의 아가사였더라면 엠마의 말대로 황태자에 대한 집착이 깊어졌을 수도 있었다.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그 애가 조금씩 이해가 되려고 그런다.
소설을 읽을 때는 뭐가 모자라서 남자한테 목을 매나 싶었는데. 아가사의 입장이 되고 보니 그 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가사는 세상이 무너진 것이다.
“그랬었지…….”
“저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공작님께서 기억을 잃으신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엠마…….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실 나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는 것은 저택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위화감 없이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에는 엠마의 노력이 있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엠마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공작님께서 양친을 잃고, 마차 사고까지 당하고 나니 조금 변하신 것뿐이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고맙다는 거야.”
엠마가 어설프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엠마가 망설임 끝에 말했다.
“그래도……. 공작 대부인의 기일에는 그분을 찾아뵐 거죠?”
“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엠마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나는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가실… 거죠?”
엠마가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물었다.
엠마가 저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가사의 양친은 그리 다정다감하고 아이를 잘 챙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가사는 제 어머니를 똑 닮았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파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으며, 타인을 깔아뭉개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
그녀의 생전에는 아가사 또한 제 어머니를 두려워했었다.
“그래야지.”
그래도 내가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이라면 가고 싶었을 것 같았다. 제 어머니가 아무리 엉망이었어도 사랑받았다는 기억은 있을 테니까.
그제야 엠마의 얼굴이 밝아졌다.
엠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신전에서 공작 대부인을 위한 미사가 있을 거예요. 외출을 준비할까요?”
내가 아가사가 된 이후로 외출한 일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좋아. 엠마가 잘 준비해 줘.”
“네, 공작님!”
아가사, 보고 있는 거지? 내일 네 어머니를 보러 갈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