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대체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는데, 히샤 관리 좀 잘해 주실래요?”
“뭐?”
억울하니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말이 막 튀어나왔다. 나엘의 반문에 또 쏘아붙였다.
“뭐긴요! 황태자 전하께서 히샤 관리를 잘 못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두 번이나 히샤를 잃어버리셔 놓고 왜 제 탓만 하세요?”
“너, 지금…….”
나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 번뜩이는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뚝 하고 떨어졌다.
눈빛으로도 살해가 가능했던가…?
나엘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로 눈빛으로 살해가 가능했다면 나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지도.
“큼.”
할 말 다 하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네. 여기는 현대 사회가 아니었다. 황족이 수틀리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중세 기반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이었다. 입 조심하자, 좀.
“그러니까… 히샤를 잘 돌보시면 좋겠다는 말이죠.”
“좋아. 네 말대로 히샤를 아주, 잘 돌보도록 하지.”
그건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경고.
아마도 히샤에게 감시를 붙이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떳떳했다. 아니, 지금 저택 안에도 동물들이 넘치게 많은데 내가 히샤한테 집착할 이유가 뭐야.
나엘이 나를 한 번 더 노려보고는 히샤를 어깨에 얹은 채 돌아갔다. 말발굽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엠마를 불렀다.
“엠마, 소금 어딨어! 소금! 아주 마구니가 끼었어.”
“예?”
“가지고 온 소금 다 뿌려!”
그때 뿌린 소금이 부족했었던 게 틀림없었다.
“네! 공작님!”
다시는 보고 살지 말자, 좀!
* * *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히샤가 그렇게 돌아가고 메리가 약간 침울한 모습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메리, 그러다가 우리 다 죽는 수가 있어. 이거 진짜다?”
“끼잉…….”
메리가 촉촉한 코를 내 뺨에 비볐다.
“그렇게 서운해?”
“낑낑.”
발을 버둥거리며 내 품을 벗어나려고 하는 메리를 보니 마음이 안쓰러웠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게 하필이면 폭탄 뇌관이라니.
하지만, 이런 것도 극복할 수 있는 기적의 간식이 있었으니!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말린 고구마가 그 주인공이었다. 우리 메리를 홀리는 간식. 메리도 무슨 이유에선지 육류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해서 채소 위주로만 먹고 있었다.
“메리, 이거 받고 우리 화해하는 건 어때?”
타박타박 걸어가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메리가 고개를 쓱 하고 돌렸다. 시무룩하게 처져 있던 눈동자가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그치, 메리? 이거 메리가 가장 좋아하는 거잖아.”
삐져서 돌아섰던 강아지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마법의 간식! 겨울철 강아지들을 비만으로 만드는 마약!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하자 메리가 우리를 향해 몸을 확 하고 틀었다.
“오옳지!”
참지 못한 메리가 나한테 달려왔다. 잘게 자른 고구마를 그릇에 담아 주니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후후후. 요 귀여운 놈 같으니라고. 메리가 히샤는 잊어버린 얼굴로 배를 발라당 까 보였다.
“깡! 끼잉!”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두툼한 앞발을 휘저었다.
그런 메리의 모습을 보니 낮에 함께 있던 히샤가 떠올랐다. 나엘의 어깨에서 날 바라보던 눈빛이란…아, 근데…….
‘오히려 싫어한다구요!’
그러고 보니 그 말은 조금 심했나.
대놓고 누군가에게 싫다는 말을 해 본 적은 없어서 마음에 턱 걸렸다.
“아니지! 나엘이 먼저 잘못한 건 맞잖아? 지가 황태자면 다야? 나도 슈타디온 공작이야! 나도 돈 많아, 왜 이래?”
아, 뭐 하는 거야. 들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메리만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젤리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었다.
젤리 옆에는 또리가, 그리고 그 옆에는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거의 고양이와 강아지 밭이구만.
“메리. 얘들한테 좀 니들 방 가서 자라고 말 좀 해 줄래?”
“깡!”
메리가 귀엽게 짖으며 내 몸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가끔 메리가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가나다라를 할 것 같았다.
아니지. 이 나라는 그게 아니지.
“메리, 지금 내 말 알아들은 거야?”
“깡깡!”
메리가 맞다는 듯이 짖으면서 귀여운 앞발로 내 팔을 툭툭 쳤다.
“뭐, 예뻐해 달라구?”
“낑…….”
손을 뻗어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좀 알아듣는 김에 황태자한테 가서 말 좀 해 줄래, 메리? 내가 뭐 그렇게 아주 너무 많이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아, 좀. 아가사, 너 악녀 이미지 지켜. 꿀 빠는 악녀 라이프를 버릴 거야? 에휴. 나도 참 착해 빠져서는.
한숨을 푹 쉬고 메리를 끌어안고 눈을 억지로 감았다.
* * *
“히샤. 짐작 가는 게 있나?”
나엘이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나엘의 눈동자가 이전보다는 차가운 빛을 벗어 내자 히샤가 본체를 드러냈다.
거대한 남청빛 늑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 잠에서 깨어났을 땐 그곳이었지.]
나엘이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전이었다면 아가사가 뭐라고 하든 그녀를 범인으로 몰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있을 때 100에 90번은 그녀가 범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이상했다.
나엘을 보며 소리치던 아가사의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에 속아 넘어가 주고 싶어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나도 모르겠군.]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히샤가 결백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거대한 늑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엘이 생각에 잠겼다.
‘저도 이제 황태자 전하 안 좋아해요.’
그 말이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히샤가 사라졌을 때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었고 두 번째에는 확신으로 찾으러 갔었다. 그런데 자꾸 부정하던 아가사가 마음에 걸린다.
나엘의 말을 부정하면서 파르르 떨었던 아가사. 어릴 적부터 되바라지게 반말을 하더니 존댓말로 쏘아붙이던 아가사.
나엘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히려 싫어한다구요! 대체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는데, 히샤 관리 좀 잘해 주실래요?’
나엘의 머릿속에 자꾸 그 말이 떠올랐다. 아가사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말이라 그런 건가.
“왜 자꾸 생각나는 거야.”
나엘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행동이었는데 외려 고개를 젓던 아가사가 떠올라 버렸다.
“……갑자기 내가 그렇게 싫어졌다고?”
나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알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다 자기 멋대로야.”
좋다고 그랬다가, 싫다고 그랬다가. 나엘이 아가사의 장단에 놀아줘야 하는 신분도 아니고.
나엘의 눈동자가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분명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왜 휘둘리는 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나엘은 머리가 아파 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황태자 전하?”
“…….”
“황태자 전하!”
두 번째 부름에서야 정신을 차린 나엘이 고개를 돌려 보좌관을 보았다.
“이대로 주무신 겁니까? 편히 주무시지 않고요.”
나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용케도 그 신호를 알아들은 보좌관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그게… 히샤 님이 식사를 안 하십니다.”
“왜? 어디 아픈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나엘이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가 어그러지면 꼭 다른 하나도 말썽을 부리곤 한다.
히샤가 신수로 각성했다는 것과 히샤가 인간의 말을 한다는 건 나엘만 아는 비밀이었다. 나엘이 보고 있던 서류들을 내려 두고 방을 나섰다.
“히샤는 어디 있지?”
“정원에 계십니다.”
평소처럼 잔디가 깔린 정원에 늘어져라 누워 있는 히샤가 왜 갑자기 식사를 거부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나엘은 히샤와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
[맛없어.]
“뭐?”
[맛없다고 했다.]
“……개소리하지 말고. 진짜로 밥 안 먹는 이유가 뭐야.”
나엘이 눈가를 문질렀다. 왜 이렇게 눈이 허전한가 했더니 안경을 두고 왔다. 안경이 없을 땐 인상이 훨씬 더 날카로워 보이는 편이라 항상 잘 챙기는데 하필… 그런데도 히샤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 태연하기만 했다.
[정말이야. 맛이 없는 걸 먹을 수는 없군. 이미 맛을 알았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리고 이것들은 성의가 없어.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은 법이라고.]
히샤가 투덜거리며 작은 콧잔등으로 그릇을 톡톡 쳤다. 나엘이 히샤를 고요히 응시했다.
“그래, 좋아. 너한테 맛을 가르친 게 누구지?”
나엘의 목소리는 폭풍 전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히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바닥을 사탕처럼 핥으며 히샤가 말했다.
[그, 거기. 슈타디온에서 먹은 사료가 맛있었지. 보기도 좋고.]
나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마치 빠직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