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뛰어다니는 강아지.
배를 드러내고 잔디 위를 구르는 너구리.
수영을 즐기는 강아지.
내 발밑을 빙글빙글 돌며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이곳은 내가 이룩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 천국을 침범한 평화 파괴자가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었다.
“내 개가 여기에 있다고 하던데, 아가사.”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평화 파괴자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안경 너머의 차가운 적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관심을 끌겠다고 내 개를 납치한 건가?”
평화 파괴자가 유명한 반려견 애호가라는 것은 제국 사람이라면, 그리고 소설 독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납치라뇨. 저는 평생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개구린데요.
“여기에 내 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았어. 시치미 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컥!”
제보? 제보라니?
대에체 어어떤 못난 사람이 억울한 사람을 고발하고 그런답니까. 당장 이리로 데려와. 삼자대면해.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이름은 나엘 밀란 브륄스.
내가 들어온 소설 『성녀 루시아에게 집착하지 마세요』의 남자 주인공 되시겠다.
그리고 동시에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과는 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사이였다.
소설 속 아가사는 남자 주인공을 좋아해서 스토킹하고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녀였다.
아가사는 나엘이 신분이 낮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과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그건 아주 어릴 때 부모님들 사이에 오갔었던 구두 약속 때문에 그런 것이었지만.
아가사는 그 약속을 믿고 두 주인공을 괴롭히다가 결국 모든 재산과 작위를 몰수당하고 반역자로 몰려서 뒤끝이 좋지 않은 엔딩을 맞이한다.
거기가 소설 중반 즈음이었는데 감질맛 나는 연재에 잠시 읽는 걸 중단했었다. 완결 나면 다 읽겠다는 생각으로.
그런데 내가 그 아가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가사로 마차 사고에서 깨어난 지 반년이 지났으니 여주가 성녀로서 각성을 하고 소설이 시작되기까지 6개월가량이 남아 있었다.
“대체 그 개가 왜 여기 있을까요? 아니, 있을까?”
“그러게 말이야. 그건 내가 물어야겠어. 반년가량 조용하더니 병이 다시 도지기라도 한 건가?”
나엘이 차가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은발은 보기 좋게 손질되어 있었다. 게다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최상급의 루비를 골라 섬세하게 세공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는 남자치고는 불그스름해서 적절한 조화를 이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묻힐 정도로 짙은 혐오감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좋아한다는 이유로 괴롭힘당하고 나면 그럴 만도. 원하지 않는 애정은 폭력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전 남친 덕분에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전 남친이 헤어지고 나서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따라다닌 덕에 이사까지 하고 번호도 바꾸고 이직도 하지 않았던가.
아가사가 전에 나엘에게 한 짓은 진심으로 나쁜 짓이었다. 내가 한 짓은 아니라서 억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로또 맞고 들어온 영혼이라고 말했다간 미친 취급이나 받을 게 분명했다.
커흠. 눈빛으로 살인도 내겠네. 눈을 슬쩍 돌리고는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없잖아요? 이건 새로운 관심 끄는 법인가?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군. 이젠 나를 포기했다고 생각한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저절로 존댓말이 나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는 나엘 그림자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간의 주인공을 피하려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은 나엘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웃기네. 지가 찾아와 놓고 왜 나한테 지X이야. 나 억울해.
“후우. 이런 의미 없는 실랑이는 그만하지. 히샤는 내 개야. 데리고 가야겠는데.”
히샤?
히샤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히샤는 나엘의 신수다. 내가 소설을 읽은 부분까지 나엘의 강아지는 신수로 각성하지 못했었다.
그 신수 때문에 나엘과 여자주인공이 얽히게 되는데… 잘못하다가는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 둘 다 얽히는 수가 생기겠어. 그게 바로 데드 플래그 아니겠는가.
나는 서둘러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키우던 강아지를 잃어버렸고 그 강아지만 찾으면 이곳을 떠나 준다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허락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엘이 벌떡 일어나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대체 어느 개가 남자주인공을 물고 온 거야.
제발 얼른 찾아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
금방 찾겠지라는 내 기대를 부수듯, 나엘은 2시간가량이 지나서 나타났다.
대단한 사투를 벌이기라도 했는지 나엘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고 히샤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뒷덜미를 붙잡힌 히샤는 덩치가 큰 나엘과 있으니 더 작아 보였다.
“히샤를 찾았으니 다시는 날 찾아올 일 없는 거지?”
“……하.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그러면 내가 공작을 보려고 찾아왔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니.
웬만하면 보고 살지 말자는 거지.
“아니. 앞으로는 이런 일 없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안 보고 사는 게 편한 사이잖아.”
나엘이 무섭지만 할 말은 해야지. 할 말은 못 참는 내 안의 기질이 또 용기를 발휘했다. 나를 혐오까지 하는 남자와 마주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대체 원작 아가사는 저런 남자를 어떻게 쫓아다닌 건지 모르겠다. 눈빛에 질식사 하겠구만.
그런 의미에서 마주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꿈꾸는 파라다이스에 나엘은 아주 큰 방해 요소였다.
“후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나엘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를 힐끗 보고는 내 파라다이스를 떠났다. 그래, 다시는 돌아오지 마. 제발.
“공작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엠마가 내게 물었다. 분명 나엘이 날 찾아왔을 때 날 버리고 멀찍이 도망가는 거 다 봤어. 멋쩍어하는 엠마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소금 뿌려.”
“네?”
“왕소금 사다가 잔뜩 뿌려! 다시는 못 오게!”
“네! 공작님!”
신이 난 엠마가 씩씩하게 말했다.
엠마는 내가 기억을 잃고 나서 황태자를 쫓아다니지 않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하곤 했다. 침실에 있었던 나엘의 초상화를 싹 가져다 버렸을 때 눈물을 흘리더라.
‘우리 공작님이… 우리 공작님이……!’
그런 엠마가 기운차게 왕소금을 가져다 뿌리는 것을 보면서 나도 손을 탁탁 털었다.
우리 손절하자고, 손절!
* * *
저택 밖으로 나온 나엘이 한숨을 내쉬며 히샤를 노려보았다. 히샤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히샤는 평범한 개가 아니다. 실상 히샤는 제가 원한다면 납치 따위는 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귀찮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지?”
“깡?”
“개소리하지 말고.”
[모욕적인 발언이야.]
나엘의 말에 귀여운 짓을 그만둔 히샤가 근엄하게 말했다. 나엘의 어깨에 올라탄 남청색의 아기 늑대가 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겉은 깜찍한 강아지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 본질은 늑대였다.
“저 여자가 납치한 건가? 분명 뿌리칠 힘이 있었을 텐데. 도망칠 수도 있었을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엘이 요새 지내고 있는 사택에 얌전히 있던 히샤가 여기에 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모르겠어.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
역시.
그 여자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지난 반년 동안 아가사는 이상하게 변했다.
본래 사치스럽고 파티를 좋아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저택에서 안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가사가 아프다는 이야기도 퍼졌으나, 길거리에서 패악을 부리며 다른 영애가 키우던 강아지를 빼앗아 간 일로 스스로의 멀쩡함을 증명했다.
신수들이 격을 잃고 나서도 귀족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동물들을 부양하고 있었다. 물론, 버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도 키우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동물을 빼앗은 것이다.
강아지를 빼앗긴 영애가 울면서 그 일로 가십지 인터뷰를 한 덕에 온 사교계에 소문이 났었다.
하지만, 아가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동물들을 더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간 제멋대로야.”
아가사는 본디 그런 여자였다. 언제나 제가 가장 중요한 사람. 어린 시절부터 나엘의 감정은 중요치 않다는 듯 자신의 감정만을 강요했다.
‘너는… 평생 그렇게 살겠지.’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오늘의 아가사는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나엘을 상대로,
‘안 보고 사는 게 편한 사이.’
라는 말까지 했다.
아가사가 정말로 변한 걸까?
“무슨 상관이야.”
멈칫했던 나엘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엘을 기다리고 있던 수행 기사가 말을 끌고 왔다.
오늘로 아가사를 보는 것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