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승리를 확신한 나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앞으로 로드고가 해 줘야 할 일이 많아. 동물들은 후각이 예민하지. 아이들에게 해로운 독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들도 골라내야 하고… 그리고, 좋아하는 식물도 심어 줘야 해.”
내가 엠마에게 듣기로 로드고는 황실에서 일하는 정원사 다음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식물에도 해박하다나. 슈타디온이 황실 다음으로 손꼽히는 가문이기 때문에 로드고를 고용할 수 있는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했다.
인재를 놓쳐서야 쓰나. 인재의 주머니를 불려 주면 될 일이지.
“그래서 앞으로도 저택 정원은 로드고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새로운 고용 계약서도 꺼냈다. 고작 보상금 한 번으로 마음을 돌릴 수야 있겠어?
“지금 계약한 연봉에 정확히 1.5배야.”
로드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아끼는 정원들과 돈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을 것이다.
“동물들이 후원의 장미 온실에는 절대로 들어가는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흡!”
그 마지막 말이 로드고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슈타디온의 상징은 장미다.
가장 귀한 품종들만 모아서 꾸며 놓은 곳이 유리 온실이고.
거기에는 로드고의 모든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유리 온실을 언급한 건 당연히 일부러 한 일이었다.
너, 그 애기들 두고 갈 수 있어?
이런 의미랄까.
로드고가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응, 나도.”
생긋 웃으며 로드고가 새로 서명한 계약서를 챙겼다.
앞으로 슈타디온은 아주 많이 변하게 될 거다. 거기에 불만을 품고 그만두는 이들도 있겠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내보내면 그만이지만 고급 인력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돈은 원래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거라고.
고급 인력에게 돈을 아껴서야 되나.
그리고 이게 그 첫걸음이었다.
“후우, 후우.”
계약서의 잉크를 불어 말리고는 엠마에게 내밀었다.
“금고에 잘 넣어 둬.”
“네, 공작님!”
기분이 아주 상쾌한 날이었다.
* * *
정원사 로드고가 인부들과 싸워서 승리했다. 인부들이 마구 뽑아 대던 장미를 로드고가 저택의 하인들과 함께 유리 온실로 옮길 수 있게 유예를 준 것이다.
로드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 같았다.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그다음에 나에게 불만을 제기한 건 하녀장이었다. 갑자기 일손이 늘어나면서 이번 분기 예산이 초과한 것이다.
하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작님.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베리타 부인.”
베리타 부인이 날 찾아올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로드고의 방문 이후 엠마가 미어캣처럼 저택의 동향을 속속들이 알아내서 알려 준 것이다.
식료품에 나가는 돈도 늘었고 사람이 늘어나면서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들과 빨래를 하는 하녀들의 불만도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내가 들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저택의 주인인걸. 하녀들이 불만이 있어도 나에게 직접 와서 이야기하는 건 하녀들에게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회사를 생각해도 똑같았다. 부하직원의 불만을 들어 주는 건 그들의 팀장이지, 사장이 아니었으니까.
엠마 말로는 베리타 부인의 주름이 그간 10개는 늘었을 거라나.
베리타 부인은 슈타디온을 지난 30년 동안 돌봐 온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리라.
그래도 한계는 있는 법.
“공작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고 따르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왔고요.”
“자네가 노력한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지금은…….”
“나도 저택의 분위기는 파악하고 있었네. 그래도 이런 일은 베리타 부인의 일이니 내가 끼어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넘어섰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부인에게 줄 게 있어.”
이번엔 봉투가 여러 개였다. 베리타 부인의 눈이 커졌다.
“이건, 부엌 하녀들, 그리고 이건 빨래방 하녀들 용이고… 베리타 부인이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부족할 때 쓰도록 해.”
“공작님, 이러자고 말씀드린 게 아니……!”
“알아. 다음 분기에는 예산이 늘어날 거야. 그때까지는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 베리타 부인은 슈타디온에 꼭 필요한 인재야.”
엠마 말로는 베리타 부인은 돈보다는 이런 거에 더 약하다고 했다. 본디 슈타디온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나.
그러니 내가 이렇게 감동적인 말 몇 마디만 해도…….
“앞으로도 나를 위해서 아니, 슈타디온을 위해서 일해 줄 수 없을까? 내 부모님을 봐서라도 말이야.”
“공작님! 저는 공작님께서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항상 저를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무시하셨었죠!”
인성 말아먹은 X끼.
아가사, 너는 어른 공경도 모르냐.
“그건… 그건 내가 너무 어렸었지. 방황을 했었나 봐.”
사춘기도 그 정도면 썩어도 아주 썩었다. 나 새로 태어났어, 베리타 부인. 이런 나를 받아 주겠어?
진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베리타 부인을 그윽하게 보았다. 내 진심이 통한 걸까? 다행히도 마음 넓은 베리타 부인은 나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러실 수 있지요……! 공작님은……. 하지만, 이렇게 공작님의 본심을 알게 되었으니 저는 다 괜찮습니다.”
베리타 부인이 무슨 말을 삼켰는지는 알 만했다. 아가사의 부모는 아가사에게 별 관심 없었으니까.
베리타 부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나를 위로하는 말을 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공작님!”
“어어, 잘 부탁해.”
손을 어색하게 들어 올리고는 흔들었다.
“잘하셨어요.”
엠마가 속닥거리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두 개 펼쳐 주었다.
후후. 이렇게 한 고비, 한 고비 넘어가는 게 아니겠어? 베리타 부인은 내게서 받아 간 돈을 적절하게 사용했고 덕분에 하녀들의 불만도 줄어들었다.
이게 바로 윈윈 아니겠는가.
* * *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내 꿈이 이루어졌다. 개조가 마무리된 저택 대문 옆엔 명패가 하나 달렸다.
<슈타디온 동물 보호 센터>
이 소설에 버림받는 동물들이 넘쳐나는 것은 ‘사라진 신’ 때문이었다. 신 마엘리스. 이 세상의 주신이자 신수의 수호자였다.
본디 신 마엘리스가 이 세상을 열었을 때 모든 동물은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동물이 아니라 ‘신수’였으니까.
인간은 신체 어딘가에 신 마엘리스의 낙인만 가지고 있다면 신수를 다룰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나타난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대대로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신수를 다룰 수 있는 이들은 각 나라에 귀족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낙인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제발, 마엘리스 신이시여. 저희 가문에도 낙인을 내려 주소서.’
낙인이 없는 사람들도 신수를 집안의 보물로 생각해 항상 함께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신 마엘리스가 사라진 이후부터 신수들은 말을 잃었고 능력을 잃었다. 그렇게 신이 사라진 지 100년쯤 되자 희망을 품었던 이들도 인내심을 잃고 신수를 길바닥에 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자 주인공이 성녀로 각성하고 나서도 주신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소설 속엔 버림받고 나서 죽어 가는 동물들이 많다는 서술도 있었고 인간들을 습격했다는 서술도 있었다.
인간들과 지내면서 야생성을 상실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래서 나는 버림받은 신수들을 위한 쉼터를 만든 거다. 넘치는 돈을 전생에선 못 했던 좋은 일에 쓰기로 한 거다.
나는 평생 이렇게 지낼 생각이었다.
조용히.
혼자서.
아기들하고.
주인공들 없이.
마지막 별표!
* * *
내 꿈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공들하고 멀리서 혼자만의 소박하게 사는 꿈 말이다.
“후후후후. 엠마, 어때?”
“너무 좋아요, 공작님! 메리하고 또리도 좋은가 봐요!”
넓은 정원의 3분의 1을 싹 밀어 버리고 잔디를 심었다. 뛰뛰를 좋아하는 동물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메리하고 또리가 그 위를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캉캉!”
목소리만 들어도 신나 보이는 걸.
항상 내 곁에 있어 준 메리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다.
“자, 이제 아기들만 데리고 오면 되겠네.”
이것으로 주인공들하고는 완전히 안녕인가?
주인공들은 제국을 구하고 사람들을 구하느라고 바쁠 테니 말이다. 『성녀 루시아에게 집착하지 마세요』의 기본 줄거리는 마물과의 전쟁이었다. 황태자와 성녀가 사랑도 하고, 제국을 마물들로부터 구하는 그런 흔한 로판 소설.
그러니까 주인공들이 브륄스 제국과 인간을 구하는 동안 나는 능력을 잃고 버림받은 신수들을 구하는 거다.
각자 할 일 하는 거지.
얼마나 좋아?
나는 내 계획이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이대지 않으면 남자주인공이 나와 얽힐 일은 없을 테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