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들이 동물센터로 쳐들어왔다 (2)화 (2/90)

#2화.

따르르르릉─!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슬그머니 떴다. 손을 더듬더듬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아, 이건 또 어디 갔어…….

어김없이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어제 회사 생활의 연장선이라는 회식에 가서 끌려다닌 덕에 몸이 녹초였다.

코로롱 여파가 가시고 마스크를 벗게 되고 하늘길이 열린 것까진 다 좋았는데 회식 자리가 풀린 건 재앙이었다.

그나저나.

“흐아아아암. 또 그 꿈이네.”

목을 풀어 스트레칭하고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고아원에서 지낼 때 곧잘 숲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거기에서 이상한 남자애를 만났었다. 은발에 청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 선명하게 기억이 남는다.

외국인이었나.

어디서 쉽게 볼 생김새는 아니었는데.

가지 말라는 남자애의 손을 놓지 못하고 저녁 시간을 놓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었다. 그날 선생님한테 눈물 쏙 빠지게 혼났었는데. 다음 날 숲에 들어갔을 때 그 남자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름을 들었던 것이 분명한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뭐라고 했더라…….”

휴. 그 외모 그대로 자랐으면 헐리우드를 씹어먹고도 남았을 텐데. 티비 프로그램에 재벌로 나와서 어릴 적 인연을 찾아요,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상하게 그날의 꿈을 꾸는 날이면 하루 동안 경제적 운수가 매우 좋았다. 돈을 주운 날도 있었고 소액이기는 해도 로또가 당첨된 날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그런 식으로 꽁돈이 생기는 행운이 찾아오곤 했다.

짐작하건대 그 남자애가 엄청난 부잣집 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늑대랑 있었던 걸로 봐서는…… 도끼 주워 주는 산신령일 수도. 내가 주운 게 금도끼였던 거지.

후후후. 오늘은 돈벼락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건가.

에휴. 이럴 때가 아니지. 돈이 문제냐, 출근이 문제지. 토요일 언제 와……. 으, 아직도 시야가 흐릿하다. 아, 아직 눈을 제대로 안 떴구나. 침대에서 해파리처럼 흘러내려 바닥으로 내려왔다.

푹신.

응, 푹신?

분명 딱딱한 오피스텔 바닥이 나를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엉덩이에 닿은 것은 보드랍고 폭신한 무언가였다. 뭐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딱딱한 마루가 아니라……?

“……카펫?”

내 집에 이런 고급 카펫이 있었나. 만져지는 느낌만 해도 카드 할부 다 끌어오기 전에는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입고 자는 짱구 잠옷은 어디로 간 거지? 뭐, 그런 상황인가. 눈을 떠 보니 소설 속에 들어왔어요?

“에이, 설마.”

헛생각을 다 해. 잠이 덜 깼나.

그리고 설마가 항상 선량한 개구리를 잡는 법이었다.

……선량한 개구리 살려.

* * *

선량한 개구리는 소설 속에 빙의해 버렸다. 하핫.

‘미친 거 아니냐! 내가 이러려고 죽기 살기로 시험 보고 대기업 입사한 줄 아냐! 한 달 전에 뽑은 내 차는 어떡하라고!’

분노.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태어날 때부터 재수 없었는데 커서 뭐가 다르겠어.’

좌절.

‘하하하핫! 하하하하핫! 그래! 보니까 돈은 많은 것 같네! 그 차가 대수냐. 황금 마차를 뽑겠어!’

실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서 여기가 어느 소설 속이냐.”

수용.

언제까지고 헛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로판 독자로서 단언하건대, 나는 여기서 못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상황 판단을 위해서 방 안을 가볍게 수색했다.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건, 내가 정말 예쁘다는 것. 이런 외모인 것을 보았을 때 그냥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는 아닐 거라는 거.

그리고 또 하나는.

“메리……?”

작고 소중하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나의 메리였다.

“깡!”

메리가 촉촉한 코를 치켜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를 보는 똘망한 눈동자와 고개를 갸웃할 때 한 쪽 귀만 수제비처럼 접히는 것으로 보아 메리가 확실하다.

동네 사람들, 우리 메리가 확실해요!

이게 무슨 일이람. 메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오구, 오구……. 우리 메리. 엄마 따라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 엄마 혼자 보내기 싫어서 따라온 거야? 엄마 걱정돼서?”

“끼잉!”

그렇다는 듯이 메리가 내 손바닥을 마구 핥았다. 우리 귀여운 메리.

“그런데, 메리. 내가 여기 어떻게 온 건지 알고 있어?”

갸웃.

내 손바닥에 발을 얹은 메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또 한 쪽 귀가 팔랑하고 접혔다. 모르는구나.

그래, 넌 아무것도 몰라도 돼! 귀여우려고 태어났는데! 자기 할 일 다 하고 있는데! 어휴 참, 내가 뭘 더 바란 거람. 우리 메리가 건강하고 귀여우면 됐지.

어려운 건 엄마가 짤게. 우리 메리는 따라만 와.

메리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다시 침대에 기대앉았다.

고기를 잡는 어망이 된 심정으로 얌전히 방 안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사실 돌아다니면 뭐 해. 이런 화려한 로열 저택이면 나를 돌봐 줄 사람이 올 텐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기 집에서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는 바보 같은 여자주인공’ 타이틀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문이 열리고.

“엇, 어, 어!! 공작님!!”

아, 나 공작씩이나 해?

내 어망 속으로 귀여운 물고기가 헤엄쳐 들어왔다.

“저… 초면에 죄송한데 누구세요?”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멍하니 날 보던 하녀가 와앙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흘려 대는 통에 대답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가사 공, 공작님! 저 엠마잖아요!”

아가사? 아가사. 아가사! 아가사 공작님……?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

내가 아는 공작 아가사는 그 여자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잃은 악녀 아가사. 심지어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영지를 다녀오다가 마차 사고까지 당한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만에 깨어나게 되는데.

이건 『성녀 루시아에게 집착하지 마세요』에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그 ‘한 달 만에 깨어나게 되는데.’ 시점에 빙의한 건가?

그러니까 빙의한 나는 아주 대단한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있었다. 돈을 써도 써도 늘어나기만 하는 그런 가문의 주인이 된 것이다.

어쩐지 공기부터 다르다고 했어.

대박.

“엠마… 나 아무래도 성공한 거 같아.”

“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엠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엠마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난 사교 활동이나 정치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사업도 체질이 아니었다. 원작처럼 다른 사람 괴롭히면서 남자 주인공 스토킹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핫, 공돈이, 그것도 평생 놀고 펑펑 써도 남을 돈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스─토킹? 악─녀?

남자 주인공 스토킹할 시간에 금고에 쌓여 있는 금화를 세는 게 더 이득이었다.

물론, 먼저 해야 할 것들은 있었다.

* * *

한참을 울고 나서야 진정한 엠마가 눈물을 닦아 냈다. 우는 동안 몇 번이나 내 기억의 소멸 여부를 물었다.

‘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 안 나세요?’

‘그렇다니까……. 내 이름이 아가사인 것도 몰랐어.’

라던가.

‘흐어엉……. 그, 그러면 마차 사고도 기억 안 나시겠네요?’

‘그건 기억나는 것도 같아…….’

라던가.

‘여기가 슈타디온 공작 가라는 건요?’

‘방금 너한테 들었어.’

라던가.

아주 솔직하고 진실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가사의 삶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필연적으로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소설 속의 아가사는 주인공이 아니라 악녀 포지션이었기에 그녀의 생활 패턴이나, 사소한 습관 같은 건 알 수가 없었다.

엠마가 나의 기억상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엠마는 퉁퉁 부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아 내곤 코를 훌쩍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 강아지는 어디서 온 거래요?”

나는 메리를 안아 들었다.

나주~ 평야~ 발바리치와와.

디X니의 애니메이션이 생각나는 딱 그 자세였다.

우리 애 좀 자세히 봐 봐. 착하고 귀엽고 완벽한 애야.

“글쎄. 이 강아지가 나를 깨워 준 것 같은데.”

모르는 척하는 게 맥락상 맞지.

“어머! 그러면 이 강아지가 은인이네요! 어디서 들어온 거지?”

“모르지. 신께서 보내 주셨는지도?”

“정말로요. 주치의께서 공작님이 깨어나실 수 없다고 했을 땐 정말로……. 정말로…….”

엠마는 다시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 손바닥 부채질을 하며 눈물을 말리는 엠마의 모습에 한숨 돌렸다. 하도 울길래 한강의 기적이라도 일으키려는 줄 알았다.

어쨌든 다행히 엠마는 자연스럽게 강아지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이 소설이 신수 기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듯했다.

“옛날에 신수들은 사람들 목숨도 구하고 그랬다던데. 기특도 해라. 이름은 뭘로 할까요?”

그래. 동물이 사람보다 나을 때도 많더라. 이름이라. 이름은 하나뿐이지. 크리스마스에 만났으니까, 선물 같은 우리 강아지.

“메리. 이름은 메리가 좋아.”

“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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