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뛰어다니는 강아지.
배를 드러내고 잔디 위를 구르는 너구리.
수영을 즐기는 강아지.
내 발밑을 빙글빙글 돌며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이곳은 내가 이룩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 천국을 침범한 평화 파괴자가 테이블 건너에 앉아 있었다.
내 손에 위태롭게 들려 있던 찻잔이 찻잔 받침 위로 떨어졌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였다.
딸깍.
그 소리에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움직였다. 평화 파괴자 또한 찻잔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개가 여기에 있다고 하던데, 아가사.”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평화 파괴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관심을 끌겠다고 내 개를 납치한 건가?”
남자의 목소리는 유독 차가웠다.
평화 파괴자가 유명한 반려견 애호가라는 것은 제국 사람이라면, 그리고 『성녀 루시아에게 집착하지 마세요』 독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납치라뇨. 저는 평생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개구린데요.
“여기에 내 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았어. 시치미 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컥!”
제보? 제보라니?
남자가 얼굴을 찌푸린 채 나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레들려 컥컥대는 게 꼴 보기 싫다는 듯이. 남자의 이름은 나엘 밀란 브륄스.
“대체 그 개가 왜 여기 있을까요?”
나는 안 데리고 왔는데.
내 말에 도로 고개를 돌린 나엘이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안경을 쓰고 있는 데도 그 너머로 느껴지는 살기가 대단했다.
분명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남자 주인공 버프를 얼굴로 전부 받았나 싶을 정도로.
커흠. 눈빛으로 살인도 내겠네. 눈을 슬쩍 돌리고는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는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는 나엘 그림자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은 나엘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엘을 만나기 위해서 그가 키우는 강아지를 납치했다고 오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 억울해. 나 정말 아니야. 이게 바로 억까 아니냐고.
“후우. 이런 의미 없는 실랑이는 그만하지. 히샤는 내 개야. 데리고 가야겠는데.”
평화 파괴자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뭐든 간에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키우던 강아지를 잃어버렸고 그 강아지만 찾으면 이곳을 떠나 준다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얼른 찾으러 갑시다.”
내 허락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엘이 벌떡 일어나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누구야. 대체 어느 개가 남자 주인공을 물고 온 거야.
정말이기만 해 봐. 아주 귀여운 엉덩이를 앙앙 깨물어 줄 거니까.
원작 아가사는 저런 남자를 어떻게 쫓아다닌 건지 모르겠다. 눈빛에 질식사하겠구만. 평화 파괴자의 뒤를 쫓아가면서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입으로 했다가 들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입방정 떨다가 눈빛에 쏘여 죽으면 그 또한 개죽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생에서 마주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꿈꾸는 파라다이스에 나엘은 아주 큰 방해 요소니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나엘은 금세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분명 나엘의 강아지가 여기에 없을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후우. 너는 정말로 못 말리겠군, 아가사.”
돌아온 나엘의 손에는 작은 강아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초면에 미안한데 너 이리 엉덩이 대. 앙앙 물어 버릴 거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엘의 강아지를 납치한 꼴이 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가 나를 대신해서 억울한 마음을 가득 담아 항변했다.
“낑…….”
“닥쳐.”
귀요미한테 말하는 거 하고는. 그러다가 애기 상처받으면 지만 손해지. 강아지들이 얼마나 잘 삐지는데?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마, 아가사. 경고했어.”
퉤퉤.
대답 대신 속으로 침을 뱉었다.
나는 잘생긴 얼굴에도 침 뱉을 수 있어. 물론, 속으로만.
잘못했다가는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원작에서도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은 나엘 손에 죽는다.
나엘이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를 힐끗 보고는 내 파라다이스를 떠났다.
그래, 다시는 돌아오지 마. 제발.
“공작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녀가 내게 물었다. 분명 나엘이 날 찾아왔을 때 날 버리고 멀찍이 도망가는 거 다 봤어. 멋쩍어하는 하녀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소금 뿌려.”
“네?”
“왕소금 사다가 잔뜩 뿌려! 다시는 못 오게.”
침 대신 소금이다.
“네! 공작님!”
하녀가 기운차게 왕소금을 뿌리는 것을 보면서 손을 탁탁 털었다. 우리 손절하자고, 손절.
너만 나 싫어?
나도 너 싫어.
원작의 아가사 루시 슈타디온은 나엘에게 제 인생을 바쳤다. 소설을 읽을 때부터 의아했다. 아가사는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쁜데 왜 악녀 타이틀을 달면서까지 나엘에게 집착하는지.
내가 아가사가 된 지금은… 더 이해 안 돼. 이젠 인성도 갖췄는데 남자한테 목맬 이유는 뭐야?
부르주아 아가사 님은 저런 놈한테 관심 없다고.
원래 아가사는 싫어할지 몰라도 이미 나한테 몸을 양보한 거라면 선택권은 없는 거지. 평범한 소시민이던 내가 부르주아 아가사가 된 것은 6개월 전의 일이었다.
* * *
“멀리 가면 안 돼! 유나야!”
“네, 선생님!”
씩씩하게 대답한 작은 여자아이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는 숲속으로 쏙 몸을 숨겼다.
돌봐야 할 아이들이 많은 선생님은 김유나를 굳이 찾아다니진 않을 것이다. 놀이 시간이 끝나고 고아원 안으로 들어갈 때쯤 되어서 슬쩍 나가면 된다.
하루 이틀 해 본 일이 아니라 유나는 편안한 얼굴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면 늑대가 널 잡아먹을지도 몰라. 숲에 늑대가 나오는 거 알고 있지?’
“안 믿어.”
유나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부 선생님이 아이들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겁준 걸 거다.
한 번도 숲에서 늑대를 본 적이 없었다. 유나가 코를 씰룩였다.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금방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었던 엄마는 유나가 8살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 다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유나가 터덜터덜 걸을 때였다.
“윽…….”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유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유나가 지내고 있는 고아원은 숲속에 있어서 인근에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분명…….
유나가 바닥으로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수풀을 손으로 걷어 냈다.
“어……?”
거대한 남청색 늑대의 털이 잎 사이로 스며든 햇빛에 반짝였다. 늑대의 털엔 윤기가 가득했고 신비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유나를 보는 날카로운 보라색 눈동자는 자수정을 박아 넣은 것처럼 빛났다.
‘정말로 늑대가 있었어!’
하지만, 늑대는 유나에게 조금도 적의가 없어 보였다. 유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 아픈 거야?”
늑대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늑대가 주둥이로 제 품에 안긴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쳤다. 그러자 신음 소리가 짙어졌다.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다쳤어?”
늑대가 고개를 들어 유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내가 가까이 가면 날 다치게 할 거야?”
늑대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유나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유나가 조심스럽게 늑대에게 다가갔다.
늑대의 품 안에 있는 것은 유나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였다. 유나가 늑대의 눈치를 보며 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빛에 반짝거렸다. 동화 속에서 본 것 같은 그런 머리카락 색이었다.
“어디 다쳤어?”
유나가 소곤소곤 물었다.
그러자 남자애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드러난 눈꺼풀 사이의 눈동자는 이 숲의 녹음을 고스란히 담은 것 같은 아름다운 녹색이었다. 은은한 푸른 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아파…….”
남자애가 눈물을 똑 하고 떨어뜨리자 당황한 유나가 벌떡 일어서 허둥거리며 말했다.
“울 정도로 아픈 거면 정말 아픈 건데……! 어떡하지……!”
어린 유나가 지금 당장 남자아이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없었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다.
“내, 내가 선생님을 데리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안 돼… 그건 안 돼…….”
남자애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나의 옷을 붙드는 손길은 간절했다. 늑대가 남자애를 보호하듯 제 품으로 끌어들였다. 그 모습을 본 유나가 침을 삼켰다.
“안 돼? 왜?”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올 거야…….”
쪼꼬만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우리나라 경찰 아저씨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누가 너를 죽인다는 거니? 우리 고아원 선생님들 다 착한데…….”
남자애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숨이 막히는 듯 희게 질린 얼굴이었다. 남자애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따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