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66)화 (401/486)

제166화

물론 모의 전쟁이 예선 주제이긴 했지만, 레오노라를 제외한 다른 소녀들은 정복을 잘 갖춰 입거나 평소와 같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지, 지휘관에 어울리는 복장이긴 하네요."

수풀을 아장아장 밟고 지나갈 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레오노라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마담 아그네스의 신상 드레스를 구경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실망의 한숨을 터뜨렸다.

그러나 레오노라는 사람들이 실망하든 말든 눈꼬리가 뾰족한 썬글라스를 추켜세우며 뽈록 튀어나온 배를 탕탕 두드렸다.

‘예쁘고 귀여운 게 밥 먹여 주는 줄 알아?!’

물론, 먹여 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었으니까.

잔뜩 긴장한 예비 황녀군들을 지나쳐 미남대(美男隊) 앞에 선 레오노라는 아이와 비슷한 카모플라주 복장을 입고 주변을 살피는 그들을 향해 짧게 턱짓했다.

‘내가 짠 계획만 잘 따라주면 너네는 반드시 이겨.’

레오노라가 결연한 눈빛으로 보내오는 메시지에 가슴이 웅장해진 아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면 뒈진다는 뜻이야.’

아이의 속뜻까지 같이 읽고 난 이후에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아벨이 긴장으로 주먹을 쥐는 것을 확인한 레오노라는 짝다리를 짚은 채 탁탁 둥근 군화코로 바닥을 두드렸다.

'모의 전쟁이지만 지휘관은 지휘만 할 뿐 무력을 발휘할 수 없어.'

쁘띠 플뢰르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후보 개인의 마력이나 이능이 중요했던 그때와 달리 작금의 모의 전쟁은 말 그대로 배동 후보들의 통솔력만 평가하는 자리였으니까.

‘후보 성격에 따라 병사를 운용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겠지.’

레오노라는 제 옆에 나란히 선 후보들의 얼굴을 흘깃하며 침을 삼켰다.

‘스텔라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하는 아이니까 멋들어지게 싸우려고 들겠지.’

"당당하게 싸우고 돌아오세요, 나의 기사들이여!"

레오노라가 예상했던 대로, 스텔라의 분대는 서군의 지원을 받았는지 번쩍번쩍 빛이 나는 갑주를 차려입은 터라 동화 속에 나오는 기사들처럼 보였다.

“정신 똑바로 차린다.”

노엘의 병사들은 그녀처럼 심플한 갑주를 입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다른 분대원들의 모습을 한눈에 살핀 레오노라는 고개를 돌려 분대장을 맡은 아벨에게 걸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작전대로만 움직여. 내 말, 기억하지?”

레오노라의 물음에 잔뜩 굳은 아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단상 위에서 진행 위원이 거대한 뿔피리를 불었다.

“그럼 모의 전쟁을 시작하겠습니다!”

진행 위원의 외침에 탁탁 튀어 뒤로 물러난 레오노라는 아벨에게 신호를 주었다.

서로 엉켜 정정당당하게 싸우기 시작하는 다른 분대와 달리 미남대는 부리나케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푸훕! 오합지졸이 따로 없네요!”

“공녀의 분대는 전부 도망쳐 버린 건가요? 어쩜, 명예도 모르고….”

관중석에서는 그런 미남대를 비웃는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지만, 레오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도 산 아래 낡은 창고로 몸을 숨겼다.

아벨은 그래도 나름 훈련받은 병사인 자신보다도 더 노련하게 스텝을 밟는 레오노라를 흘깃하며 그녀가 설명했던 작전을 떠올렸다.

“신호가 주어지면, 바로 튀어서 산으로 숨어들어.”

“게릴라 전투라도 벌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너네를 제외하면 7분대나 있는 거잖아. 자기들끼리 힘 빼게 내버려 두라고.”

“…상당히 치사한 전력이네요.”

아벨의 말에 레오노라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었다.

“이기고 지는 데 치사한 게 어디 있어?”

진짜 전쟁에 명예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분은 승리를 거머쥔 사람이 뒤늦게 붙이는 변명일 뿐이라며.

“내 사람 목이 한 개라도 더 달려 있게 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러려면 분대장인 네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네 목숨을 우선시하라고.”

늘 버러지 취급만 받던 아벨로선 처음 듣는 말이었다.

* * *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던 미남대의 행동을 전부 비웃었지만, 모의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정정당당’하게 서로를 상대하며 정면으로 승부하고자 나선 분대 중 네 개의 분대가 삽시간에 자멸하고 말았으니까.

자신들도 산이나 언덕처럼 고지대 지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남은 분대들 중, 여덟 명의 대원을 온전히 유지한 분대는 노엘의 것뿐이었다.

“결국 노엘 양도 병사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네요.”

“레오노라 공녀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숨어들어 간 숲이잖아요?”

“대단해요. 공녀님의 병사들은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잖아요.”

레오노라의 선구안에 귀부인 한 명이 감탄사를 터뜨리자, 군중 속에 숨어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입술을 씰룩이며 앞으로 튀어 나온다.

“그건 당연하잖아요. 모두 야비하게 숨어 있었는데!”

노엘을 응원하기 위해 군중석에 나와 있던 레이첼의 말에 그녀를 흘깃한 리콘 남작 부인은 우아하게 쥘부채를 움직이며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야비한 걸까요? 아니면 아무도 생각 못 한 일을 혼자 세울 만큼 영특한 걸까요.”

“……다, 당연히 야비한…!”

“누군가의 업적을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건 옳지 않아요. 레이첼 양이 지금 감옥이 아니라 환한 하늘 아래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것도 다 레오노라 공녀의 너그러운 마음씨 덕분일 텐데요.”

남작 부인의 말에 레이첼은 입술을 꾹 깨물며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레이첼이 연회에서 감옥으로 끌려가지 않은 건 그녀의 말대로 레오노라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던 그녀를 용서했기 때문이니까.

‘…설마 나쁜 아이가 아닌 건가?’

하지만 교단은 레오노라가 세상을 파괴시키고 혼돈에 빠뜨릴 끔찍한 아이라고 했는데….

혼란 속에 붕붕 고개를 저은 레이첼은 산속으로 사라진 레오노라와 노엘의 모습을 찾으며 심통 난 볼을 부풀렸다.

아이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노엘이 레오노라와 함께 들어간 숲속에서 몬스터보다도 더 큰 위험을 조우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 * *

아이네스의 배동이 누가 되든 말든, 기실 그레고르는 큰 상관이 없었다.

아이네스와 칼리시만 황제의 추천으로 율리아를 비(妃)로 맞아들인 그레고르의 가장 큰 관심사는 또 어떤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이냐였다.

“에이브. 요즘 아이네스가 부쩍 외로워 보이지 않던가?”

황제의 수석비서관 에이브는 그레고르의 물음에 단상 위를 보았다. 거대한 황금 의자에 앉아 경기를 구경하며 발을 팔랑이는 황녀를 흘깃하니 황망해 입이 벌어졌다.

“…네?”

외롭긴커녕, 병사들이 피 튀기며 싸우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아이네스는 외려 행복해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엄마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아비인 나뿐이라 그런 모양이야.”

하지만 그레고르는 아이네스가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혼자 혀를 끌끌 차며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네스를 위해서라도 정부를 늘려야겠어. 저번에 올린 전국 미인 리스트를 갱신하도록.”

“아, 예에…. 명 받잡습니다, 폐하.”

황제의 수석비서관 자리는 모든 행정관의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이브는 만고의 노력 끝에 그 자리에 오른 자신이 전국을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여자의 신상정보 따위를 긁어모아 정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거면 그냥 헨리 마사드를 따라 하차니아 공작 각하의 보좌관 자리를 노려볼걸.’

에이브는 제 학술원 동기인 헨리를 떠올리다 과거의 제 선택을 한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스파르 하차니아의 어진 성품과 인성은 이미 그때부터 소문이 자자했었으니까.

‘황제가 이렇게 여색이나 밝히는 파렴치한인 줄 그때 알았다면…!’

주먹을 꾹 쥔 채 에이브가 후회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레고르가 눈을 빛내며 자신의 보좌관을 돌아본다.

“에이브.”

“예, 예?!”

지레 찔린 에이브는 화들짝 놀라 황제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나 제 보좌관이 허둥대든 말든 관심도 주지 않는 그레고르는 손가락을 들어 경기장을 가리킬 뿐이었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

“아, 노엘이라는 평민 아이입니다. 이번에 레이디 뮤리엘의 후원으로 아이네스 황녀 전하의 배동 선발전에 참가했습니다.”

“몇 살이기에 아이네스의 배동이 되겠다고 나섰다는 말인가?”

“올해 열여덟로 알고 있습니다.”

“배동이 되기엔 나이가 좀 있군.”

그레고르는 제 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병사들을 대동하고 호리호리한 몸을 움직이는 노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벨루치 브리넨, 그 건방진 여자는 짐의 정부 자리를 마다했었지.’

일개 평민이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온국민의 사랑을 받는 스타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엘은 벨루치와 상황이 달랐다.

“아이네스의 친구보다 짐의 친구가 되는 게 더 어울리는 나이가 아니겠는가?”

“…예?”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으니 예선전이 끝나면 짐을 찾아올 수 있게 하도록.”

“예, 폐하.”

에이브의 대답에 그레고르는 흡족한 입꼬리를 올리며 턱을 괴었다.

노엘은 보면 볼수록 그레고르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빼앗긴 여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짓밟아 줘야지.’

그는 이 제국의 황제였고, 제 기분을 거스르는 존재를 남겨 둘 필요가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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